반짝이는 나의 어둠에게 2부
-씨앗을 키우는 완벽한 방법 3권-
지은이 | 홍유디
표지 일러스트 | 서나원
타이포 디자인 | 림재
발행처 | 다설
ISBN | 979-11-94229-96-4
ⓒ 2025, 홍유디
2025년 3월 6일 발행
정가 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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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악몽 (2)」
그의 시선이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마야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아닌 그녀에게 시선이 먼저 가는 것을 보며 드보라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이어, 네 수행관이 아주 몹쓸 짓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벌을 줘야 할까? 네가 상관이니까 한번 말해 볼래?”
“…….”
에이스에 있던 시절, 자신이 주로 하던 질문을 역으로 받게 되자 휴고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마야는 바닥에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휴고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상관이니, 제가 대신 책임지겠습니다.”
“마이어.”
곧장 말을 막는 그녀를 휴고가 쳐다보았다. 드보라는 웃는 건지 화내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향해 물었다.
“왜 저 여자를 감싸지?”
그녀의 살갗이 파들파들 떨렸다.
“내가 힘들게 꽃을 피워서 너에게 준 걸 저 여자가 훔쳐 갔는데, 마이어 넌 화가 나지 않는 거야?”
드보라는 썩어 가는 드라실에서 영양분이 점점 부족해져 죄수들의 몸을 땅에 묻어 영양분으로 삼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피워 낸 꽃인데, 어쩌면 꽃을 피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아 이 꽃이 자신의 마지막 꽃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꽃을 도둑맞았는데 마이어는 화를 내지도 않는다니…….
드보라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네가 책임질 게 아니라, 저 여자에게 고통을 줘야지! 그때 절도범들을 총으로 처형했던 것처럼……!”
“밀랍의 성에 감금하시죠.”
휴고의 냉담한 말에 드보라가 흥분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다리도 부러졌겠다, 햇빛도, 바람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서서히 말라 죽게 내버려 두겠습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그건 드라이어드인 그녀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장 가혹한 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드보라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좋아. 가장 적절한 벌이야. 단.”
휴고가 쳐다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안 보는 사이에 네가 저 여자를 찾아가 물과 음식을 줄 수도 있으니, 너에게 새 감시관을 붙여야겠어.”
드보라는 옆에 있는 벤터를 보며 말했다.
“이름이 벤터라고 했나? 제국에서 마이어처럼 감찰관 대장직을 맡았었고.”
“예.”
벤터가 그녀를 향해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해 보였다.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네가 앞으로 마이어와 이 여자를 감시해.”
휴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벤터가 그런 그를 여유롭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곧 신관들이 나타나 마야의 양쪽 팔을 붙들고 밀랍의 성으로 끌고 갔다.
마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휴고를 지나쳤고, 휴고 역시도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았다.
드보라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돌아가자, 방에는 휴고와 벤터만 남았다.
벤터 역시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려는 그때, 휴고가 말했다.
“……어디 가, 침입자.”
벤터가 돌아보자, 휴고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감히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내 지위까지 노려? 현 감찰부 대장이라고 네가 나와 같은 줄 알아?”
벤터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물론 당신과 저는 다릅니다. 당신은 제국에서 쫓겨난 거고, 난 선택한 거니까.”
휴고는 살갗이 떨릴 정도로 크게 웃어 젖혔다. 벤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휴고가 뚝 웃음을 멈추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범죄를 눈감아 줄 때처럼 이번에도 눈감아 주지 그랬어. 내가 널 눈감아 줬듯이.”
그 말에 여유롭던 벤터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널 위협할 것 같아서 이런 일을 꾸민 건가?”
휴고가 느긋하게 웃으며 벤터에게 걸어왔다.
“내게 씨앗의 위치를 팔아넘길 때부터 알아봤지. 남을 팔아서 살아남는 게, 꼭 기생충 새끼 같잖아.”
“…….”
“나는 쫓겨났고, 너는 선택한 거라고?”
휴고는 이내 그의 앞에 멈춰 서서 그의 얼굴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그래봤자, 너도 나처럼 도망자일 뿐이야. 나를 따라오길 선택한 그 순간부터 너도 제국으로는 못 돌아가. 네 비리랑 함께 널 지옥까지 함께 끌고 가 주지.”
휴고가 은회색 눈을 섬뜩하게 빛냈다. 벤터는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긴장으로 저도 모르게 목젖이 한 번 꿀렁였다.
*   *   *
다음 날, 해가 밝자마자 드보라는 기드온을 찾아갔다.
감옥에 갇혀 있던 기드온은 저 멀리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드보라를 발견하고 살짝 눈이 커졌다.
그녀의 표정이 몹시 험악했다.
휴고까지 옆에 대동하지 않은 것을 보며 기드온은 어젯밤 마야가 그녀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드온 앞에 멈춰 선 그녀가 파수꾼들에게 지시했다.
“끌고 와.”
곧 파수꾼들이 철창 문을 열고 우리 안으로 들어와 기드온의 양팔을 붙잡았다.
기드온은 그들에게 끌려가면서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죄수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드보라가 직접 찾아와 철창에서 죄수를 빼갈 때는 오로지 ‘처형’하는 순간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드라실이 아닌, 자연의 한복판이었다.
주변이 완전히 숲으로 둘러싸인 공터에서 기드온은 파수꾼들에게 붙잡힌 채 말없이 드보라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가 네게 꽃을 보여 주러 다녀온 것 같던데. 그 얘기는 비밀을 알았다는 얘기일까?”
기드온은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드보라가 비웃었다.
“아들이란 놈이 아버지를 빼다 박았잖아?”
이온의 이야기에 기드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
드보라가 눈매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그 애도 끌려가기 전에 딱 그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었어. 왠지 그다음 대사도 똑같을 것 같은데?”
“세나랑 샤론 괴롭히지 마. 이 나무, 아줌마 거 아니잖아.”
기드온은 드보라의 말에 이온도 진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 편이 더 나았고, 또 그래야만 마야와 이온이 안전할 수 있었다.
드보라가 슬쩍 웃었다.
“입이 무거운 것까지 똑같아.”
그녀는 나무뿌리를 소환해 땅에 구멍을 뚫고 말했다.
“이놈을 드라실에 가둬 두는 건 위험해. 지 새끼랑 똑같이 나무의 다른 기억들까지 몽땅 열람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놈들이랑도 격리해서 아무도 모르게 여기 파묻어 놔야겠어.”
파수꾼들이 기드온의 양팔을 잡고 구멍에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기드온은 얼굴만 밖으로 꺼내진 채 몸이 전부 흙에 파묻혔다.
당황하는 그를 보며 드보라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죽지는 않게 옆에 파수꾼들을 붙여 놔 줄 테니까.”
그녀가 성큼성큼 돌아가고 파수꾼 두 명이 나무에 기대앉아 그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땅에 파묻힌 기드온은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야가 들켰다면 분명 그녀도 어딘가에 붙잡혀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제 드보라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드온은 이온을 떠올리며 흙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   *   *
제나 일행은 해가 질 때쯤 베리타스 지역에 도착했다.
베리타스 지역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눈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눈으로 온통 새하얗게 변한 베리타스는 하얀 눈과 대비되는 폐건물 때문에 더욱 초라하고 피폐해 보였다.
“세고 지역이랑 베리타스 지역 중에 어디가 더 낫지?”
세실이 중얼거리자, 엘리사가 쳐다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발키리로서의 승부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나는 오해를 없애기 위해 서둘러 말했다.
“세고 지역은 불바다였는데, 여기는 추워서 그래요!”
엘리사는 세고 지역의 핵심 감정이 ‘분노’였다는 얘기를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고 지역은 라피스 제국의 중심이에요. 세고 지역의 지명은 원래 ‘Sego’가 아니라 ‘S-ego’이기 때문이죠.”
그 말에 집행관들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말대로 세고 지역은 소울에고(Soul-ego), 즉, 가장 중심이 되는 자아를 뜻했다.
엘리사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동안 참 많이 얽매여 있었네요. 분노라는 감정에…….”
그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집행관들은 모두 가슴에 가장 큰 감정인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사념체들과 싸워 왔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동료들의 죽음에 분노했고, 대부분이 그 분노로 집행관이 되었으며, 분노로 트라우마 소드를 제어하고 사념체와 싸울 수 있었다.
분노는 인간에게 행동을 끌어내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발키리 중 프레이야가 가장 힘이 강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에드윈이 중얼거렸다.
“그럼 베리타스 지역의 핵심 감정은 뭘까요…… 이렇게나 추운데…….”
제나바라기 에드윈은 제나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제나 역시도 자신의 핵심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잔류사념석을 찾아야 하는데, 가뜩이나 눈바람이 불어서 온몸이 추위로 마비되고 시야가 가려졌다.
집행관들은 적응되지 않는 추위에 가방에서 겉옷을 꺼내 입고는 눈바람을 헤치며 걸었다. 모두가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어서 눈이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소리, 눈바람이 부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뒤쪽에서 묵묵히 걷고 있던 아델이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모두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델!”
키아라 부대의 부대원들이 모두 달려왔다. 아델이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물속에 계속 있다가 찬바람을 맞아서 그래.”
키아라는 다급하게 가방에서 겉옷을 잔뜩 꺼내 아델에게 입혔다. 이사벨라는 옆에서 열심히 그녀의 언 손발을 따뜻하게 녹여 주고 마사지해 주었다.
에스헨더는 치유 엑스터시를 사용해 그녀를 치료해 주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증상은 조금 나아질 뿐, 원래 상태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째서…….”
에스헨더는 눈이 떨려서 말했다.
“제가 에이르 님보다 치유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니. 그 이유 때문이 아닐 수도 있어요.”
냉정한 목소리에 모두가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악몽 속에서 이 지역의 핵심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거예요. 주변을 한번 둘러봐요. 당신 말고도 안색이 안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 말에 집행관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살짝 눈이 커졌다.
카일룸과 이사벨라, 제나와 세나 역시 안색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