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나의 어둠에게 1부
-괴물을 사랑하는 완벽한 방법 8권-
지은이 | 홍유디
표지 일러스트 | 서나원
타이포 디자인 | 림재
발행처 | 다설
ISBN | 979-11-94229-93-3
ⓒ 2025, 홍유디
2025년 3월 6일 발행
정가 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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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수용소 (2)」
크리드와 오르한은 심각한 얼굴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방은 한없이 고요했다.
크리드는 입가에 주먹을 대고 충격적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에스헨더는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에스헨더는 그런 두 사람에게 잔류사념석을 내밀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잔류사념석을 동시에 잡았다.
그들의 눈앞에 마치 기억이 펼쳐지듯 생생한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발키리 시절 제나의 기억으로, 그 안엔 조정자인 기드온도 있었다.
방에는 오래도록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이윽고 종이에 뭐라고 적으려던 두 사람은 펜촉을 종이에 댔다가, 다시 떼고 잠시 혼란스러운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제 방에는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인간도, 사념체도 아닌, ‘신’이 되겠군.]
크리드의 글씨를 보며 에스헨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길 수 있는 싸움인가?’라고 혼잣말처럼 적었다가 줄을 죽죽 긋고 다시 썼다.
[이겨야만 하고, 해야만 하는 싸움이다. 집행부에서 인력을 꾸려 기드온, 제나, 카일룸이랑 접선 준비하지.]
세 사람은 서로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헨더는 두 사람이 곧장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검이 부러졌어도, 본부에 돌아오길 정말로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크리드가 도청을 의식하며 들으란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수고했다, 에스헨더. 오르한, 나는 곧 회의에 참석해야 하니까 네가 나 대신 이 보고서들 정리하고 있어.”
“네.”
“혹시 너무 많으면 특별반 팀원들을 데려다가 같이 정리하고. 다들 본부에 갇혀 있어서 한가할 테니까.”
두 사람이 미묘한 시선을 교환했다.
“네.”
“정리 끝나면 부대장들에게도 최종 확인 보고서 복사해서 전달해.”
“알겠습니다.”
오르한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크리드가 방을 나가려다 말고 포스트잇에 글씨를 써서 에스헨더의 보고서에 붙였다.
[복사해서 돌리고 원본은 불태우거나 분쇄해. 읽고 나면 똑같이 하라고 전하고.]
크리드는 그대로 방을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   *   *
총장은 회의를 위해 휴고와 크리드를 에이스 총본부 회의실로 불렀다.
그는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직접 보고받기 위해 요즘 들어 자주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불렀다.
크리드는 수색 임무에서 완전히 빠진 상태였기에 할로우 포획 작전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보고했다.
“할로우는 예전부터 제나 리의 곁을 맴돌았습니다. 일련의 사건에서 제나 리는 할로우에게 실종당할 뻔하다가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기드온이 제나를 도망치게 한 것은, 자신의 분신인 할로우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크리드는 진지한 시선을 들며 말했다.
“현재로서는 제나 리를 미끼로 할로우를 잡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고로, 제나 리 수색 임무에 집행부 역시 참여할 것을 요청드립니다.”
휴고가 비웃었다.
“너희 집행부가 사적인 마음으로 움직일 줄 어떻게 알고? 넌 예전에 제나 리의 심문 때도 물러 터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크리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럴 일은 두 번 다신 없을 겁니다. 할로우를 반드시 잡는다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공적인 마음으로 수사를 할 것이니, 부디 수색 임무에 참여하게 해 주십시오. 감찰관들이 사념체와 싸우면서 수색 임무를 동시에 하는 건 무리라는 걸 휴고 대장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저에게는 이제 할로우를 잡는 목적밖에는 없습니다. 이번 임무에 실패하면, 그때는 정말로 대장직을 내려놓겠습니다.”
각오 어린 크리드의 말에 총장은 과거의 기드온을 보는 것 같아, 잠시 감회에 잠겼다.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웨인 대장, 임무에 참여하게.”
“총장님!”
휴고가 항의하자, 그가 말했다.
“모든 열쇠를 그 아이가 쥐고 있다면, 현재로선 에이스가 힘을 합쳐 전력으로 수색을 해야 하는 게 맞네.”
“제 의견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장님.”
크리드가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휴고는 조금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그 역시 현재 감찰부에 업무가 가중되어 인력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던 참이었다.
최근에 감찰부에서는 귀족 회의가 열렸었다. 에이스에 속한 자들은 집행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최근 늘어난 수색 업무에 대해 불평불만을 잔뜩 늘어놓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들의 볼멘소리를 듣고 있던 휴고는 문득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엄청난 소리에 모두가 놀라서 쳐다보자, 휴고는 고개를 숙이고 분노로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모두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사념체랑 싸워 본 적도 없는 개새끼들이, 고작 냄새 맡고 쫓아가는 게 힘들다고 왈왈 짖어대기나 하니…… 감찰부 위상도 다 뒤졌어? 어?”
그들은 그 돌아 버린 눈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아무도 개지랄을 떠는 레이놀드 가문의 가주를 막을 수 없었다.
크리드가 한 말대로 감찰부는 사념체와 싸울 수 없었다. 게다가 만약 제나 리를 찾게 되더라도 할로우가 나타나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크리드가 끼어드는 게 못마땅했지만, 휴고는 침묵했다.
*   *   *
기드온은 오후 노동에 투입되었다.
크롤러들은 수용소에서 주로 광물을 캐거나 쓰레기를 태우고 재활용품을 만드는 일을 했다.
감찰관들의 감시 아래 기드온은 땡볕에서 녹슨 수레에 광석을 담아 옮겼다.
아직 부상이 낫지 않아 몸이 좋지 않았지만, 감찰관들의 의심을 피하려면 노동을 해야 했다.
기드온은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고 쓰러질 사람처럼 절뚝거리며 수레를 끌었다.
주변의 감찰관 두 명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저놈은…… 샬리아잖아?”
“크롤러들한테 호되게 당했나 보군.”
“당연하지. 에이스 소속이었던 놈을 누가 좋아하겠어.”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기드온은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보였고 옷에 구멍이 뚫린 낡고 허름한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크롤러들에게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차림이었다.
그때, 한 크롤러가 기드온에게 매섭게 소리쳤다.
“빨리 움직여! 너 때문에 작업이 늦어지잖아!”
기드온은 땀을 뚝뚝 흘리며 수레를 끌다가 돌에 발이 미끄러져 앞으로 쓰러졌다.
크롤러가 혀를 차며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야! 너는 그냥 광산 안으로 들어가서 수레에 돌을 담아. 나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말을 끝내며 그 크롤러는 기드온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기드온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떠 보이고는 다리를 절며 광산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크롤러가 감찰관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중얼거렸다.
“샬리아라는 게 사실이야? 힘도 못 쓰는 게, 영 쓸모가 없잖아.”
혹시라도 기드온이 도주를 하거나 공격을 할까 봐 긴장했던 감찰관들은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긴장을 풀었다.
아무리 그라도 주변이 온통 적인 곳에서 저런 다친 몸으로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드온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들은 곧 흥미를 잃어버리고 평소처럼 술통을 입에 기울이며 따분한 시간을 죽였다.
이곳은 수용소에서도 가장 열악하고 구석진 곳에 있었다. 이런 곳까지 에이스가 찾아와 제대로 일을 하는지 감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그 사실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한편, 광산에 들어오자마자 기드온의 걸음걸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나가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이자, 기드온도 살짝 입매를 올렸다.
그의 연기 실력이 나날이 늘고 있었다.
제나와 기드온은 크롤러들을 따라 광산에 따로 만들어 둔 비밀 루트로 이동했다.
깊은 굴을 따라 걷던 제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입을 벌렸다.
그곳에는 버려진 잔류사념석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모두 지금껏 진이 몰래 반입시킨 것들이었다.
제5지구엔 광산과 쓰레기장이 모여 있어 감찰관들에게 들키지 않고 잔류사념석을 숨길만 한 비밀 장소가 많았다.
레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잔류사념석은 트라우마가 담겨야만 무기의 형태로 바뀌고 사념체를 공격할 수 있다지. 하지만 함부로 만지면 모양이 변형될 우려가 있어 크롤러들도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게 한 곳이야. 이 장소를 아는 크롤러는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아주 극소수이기 때문에 들킬 염려는 없어. 어떤가. 무기를 만드는 걸 도와줄 수 있겠나.”
기드온은 버려진 잔류사념석을 들어 잔잔히 살펴보았다. 보라색으로 변한 그의 심안이 극심하게 흔들렸지만, 이내 잔류사념석은 모양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마치 화살촉 같은 날카로운 모형이 나타나자, 크롤러들은 모두 감탄했다.
기드온이 이내 손을 떼며 차분하게 말했다.
“잔류사념석으로 트라우마 소드를 만들면 당사자가 아닌 이상,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도 트라우마 극복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더더욱요. 하지만 제 트라우마를 이용해 이런 식으로 화살촉이나 총알로 변형시키면 손이 닿지 않고도 간접적으로 무기로써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롤러들이 모두 흥분해 웅성거렸다. 그의 기발한 생각에 제나도 감탄했다. 기드온의 말대로 하면 잔류사념석을 직접 만지지 않고도 누구나 사념체를 사냥할 수 있었다.
버려진 잔류사념석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줄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었다
이건 모두 샬리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대 샬리아였던 크레시온 역시 잔류사념석을 변형시키는 법을 알았지만, 워낙 정직했던 남자라 에이스가 회수해 가는 잔류사념석으로 무언가를 해 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레오가 누군가를 보며 말했다.
“샨, 한번 시험해 봐.”
“예!”
마치 산적같이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기드온이 수용소에 처음 온 날, 앞장서서 그를 흠씬 두들겨 팼던 남자였다.
샨은 기드온이 만든 화살촉을 화살에 붙이고 과녁을 겨누었다.
화살이 팽, 하고 날아가 과녁의 정중앙을 살짝 빗맞았다. 그가 활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보통 화살보다 조금 무거워지긴 합니다만,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맞추려면 연습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B랭크 이상의 사념체부터는 무조건 핵을 찔러야만 죽었다. 그리고 신이 사는 신전에는 주로 A랭크 사념체가 출몰할 것이다.
다만 장점이 있다면 트라우마 소드는 직접적으로 손으로 잡아야만 사용할 수 있어서 무거움 외에도 다른 감각이 장애가 되는 반면, 잔류사념석을 이렇게 보조 무기로써 사용하게 되면 제한이 훨씬 적어졌다.
게다가 이곳의 크롤러들은 과거에 범죄자였던 자들이 많아서 이미 총을 쓰는 데 능숙한 자들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확실히 효율성이 있을 것이었다.
기드온이 말했다.
“감찰관들에게서 몰래 총을 구할 수 있다면 똑같은 모양으로 총알을 만들 수 있을 듯합니다.”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의 경우엔 화살보다 훨씬 효율성이 좋았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진에게 연락해서 분해한 부품을 수용소로 반입할 수 있게 해 보지.”
크롤러들은 점점 더 흥분했다. 샨이 어깨를 으쓱하며 제나와 기드온에게 다가왔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흠흠. 저는 명사수이자, 제5지구에서 행동대장을 맡고 있는 샨이라고 합니다.”
“썅이요?”
제나가 못 알아듣고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주변의 크롤러들이 푸흡 웃었다.
샨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썅이 아니라, 샨! 샨이요!”
크롤러 한 명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여신님, 그거 아세요? 여기 있는 썅이 애인분이 수용소에 온 날, 아주 흠씬 두드려 팼지 말이에요.”
“……썅이 기드온 몸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제나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미간을 좁히고 콧구멍이 발랑거리는 게, 마치 성난 수달을 보는 것 같았다.
샨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슬쩍 딴청을 부렸다.
“그, 그건…… 저희 세계에서는 죽기 전에 맛탱이 간 모습까지 봐야 진정한 동료라고 믿는 풍습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