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나의 어둠에게 1부
-괴물을 사랑하는 완벽한 방법 6권-
지은이 | 홍유디
표지 일러스트 | 서나원
타이포 디자인 | 림재
발행처 | 다설
ISBN | 979-11-94229-91-9
ⓒ 2025, 홍유디
2025년 3월 6일 발행
정가 3,200원
이 책은 피키북이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이므로 본서의 내용을 무단 복제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습니다. 작가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는 생략합니다. 문의 사항은 pickyou@pickybook.com으로 문의 바랍니다.
「12장. 사역혼 (2)」
결국 이 이야기는 그에게도 들어가고 말았다.
리건이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뭘 고민해? 그냥 확 휘어잡아! 너 대장이잖아! 네 집무실에 불러서 딱 뒷짐 세워 두고 ‘너, 나랑 교제할래, 아님 징계 받을래’ 물어보란 말이야. 남자는 박력, 몰라?”
“…….”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한 사람 추가였다.
키아라 부대원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키아라에게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녀의 부대로 끌려가 암살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건은 눈치 없게 잔뜩 신나서 말했다.
“크리드, 너 그러다 진짜 일만 실컷 하다가 폭삭 늙어서 은퇴하는 수가 있다? 대장직이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는 아는데, 그래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지, 연애도 못 하고 20대 청춘을 다 날려 버리면 어떡하냐? 우리 벌써 20대 후반이라고. 30대 금방이다? 동기로서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인생 좀 즐기면서 살아라.”
크리드는 그 말을 듣고 진심으로 심각성을 느꼈는지 말수가 더욱 줄어들었다.
정말로 20대 청춘을 모조리 사념체와 싸우면서 보내기엔 너무도 아까웠다.
사실 여성 부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남성 부대원들의 최대 관심사 역시 ‘연애’였다.
남녀 부대원이 섞여서 같이 임무를 나가다 보면 어느새 없던 마음도 싹이 터 짝사랑을 하는 부대원도 생겼고, 고백했다가 차이는 부대원들도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장, 샬리아, 부대장, 부관이라는 남자 넷이서 옹기종기 모여 연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핑크빛 풍경이었다.
리건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애가 마음에 들면 지금부터라도 이미지 관리 좀 하고 그래. 옷도 훌렁훌렁 벗고 다니지 말고 대장답게 제복도 반듯하게 다려 입으란 말이야. 오르한, 네가 부관이니까 신경 좀 더 써 줘. 일단 아델한테 잘 보여야 할 거 아니야!”
오르한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그는 이미 크리드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충분히 등골이 빠질 것 같았다.
크리드는 그런 그를 힐끔 보다가 다시 리건을 쳐다보았다.
제복 상의는 어디다 벗어 두고 왔는지 리건은 내의만 달랑 입고 있었다.
“……리건, 네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난 뭐 천성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만, 넌 지금 목적이 있잖냐.”
크리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 말이 타당하다고 느꼈는지,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기드온도 옆에서 슬쩍 조언했다.
“향수도 뿌리는 게 좋겠어.”
“……그래. 여자들은 수컷 냄새 싫어하잖아, 그치?”
“제나는 좋아해.”
기드온의 단호한 대답에 크리드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게실에서 벌어진 비밀 간부회의 이후로 크리드는 사람이 조금 달라졌다 싶을 정도로 단정해졌다.
마치 에이스 총회에 참석하는 것처럼 말끔히 다려 입은 제복에는 여러 휘장과 배지가 달려 있었고, 머리는 왁스로 깔끔하게 넘겨 카리스마와 절제미마저 느껴졌다.
지나가던 부대원들이 갑자기 변한 그의 모습에 모두 눈이 커져서 한 번씩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야성미가 넘쳐서 그렇지, 크리드도 꾸미면 뭇 남성들에 뒤떨어지지 않는 말끔한 외모였다.
그는 아델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키아라 부대에 자주 들렀다. 그런데 그 꼴을 발견한 키아라가 우웩, 하며 말했다.
“크리드! 너 향수 좀 작작 뿌려라!”
“왜? 향기롭지 않아?”
“향기로운 것도 적당히 향기로워야지! 머리 아파 돌아가시겠다.”
크리드는 눈치를 보며 슬쩍 자기 몸 냄새를 맡아 보았다. 원래 향수를 처음 뿌려 보는 사람은 향수 냄새가 얼마나 독한지 모르고 다다익선으로 뿌려 대는 법이었다.
키아라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여자라도 생겼어?”
정곡이 찔린 크리드는 눈에 띄게 흠칫했다. 키아라가 더욱 인상을 굳혔다.
“우리 부대원이면 죽는다.”
“아니, 키아라…….”
크리드가 뭐라 항변하려는 그때, 지나가던 아델이 그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후다닥 자리를 피하는 그녀를 보며 크리드는 입을 달싹이다가 차마 알은척을 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그 순간 여자라도 생겼냐는 키아라의 말만 듣고 아델이 오해할까 봐 심히 걱정이 되었다.
한편, 집행부에는 귀여운 손님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장을 차려입은 두 꼬마 신사들이 손님 휴게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아라는 감사의 날 면회 때문에 크리드가 그렇게 신경을 썼나 싶었지만,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윽고 집행관들이 차례차례 휴게실에 들어오자 두 아이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경례를 해 보였다.
자세는 엉망이었지만 집행관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우리 멋진 신사님들께서 집행부엔 무슨 일로 왔을까?”
크리드의 자상한 물음에 두 아이가 동시에 외쳤다.
“제나 리 집행관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왔어요!”
무리에 서 있던 제나가 깜짝 놀랐다. 집행관들이 웃으며 등을 두들기자 제나가 엉거주춤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두 아이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공룡 모양 초콜릿 상자와 행성 모양 막대 사탕 세트를 내밀었다.
단것을 보자 제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한 아이가 쑥스럽게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누나, 저 기억해요? 라피스 축젯날 불꽃놀이 장소에서 만났었는데.”
“아!”
제나는 깜짝 놀랐다. 이 아이는 이제 보니 훈련생 시절에 제나가 불꽃놀이 현장에서 구했던 코흘리개 아이였다.
뒤에 서 있던 부모가 웃으며 말했다.
“집행관이 되셨다는 얘기를 지금에서야 들었어요. 그날, 인파에 휩쓸려 애를 잃어버릴 뻔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아이한테 들어 보니 사념체한테서도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감사드려요.”
제나는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그 당시, 조그마했던 아이는 이제 키가 조금 크고 어딘가 늠름해져 있었다.
“고마워! 소중하게 아껴서 먹을게!”
제나가 기뻐하자 소년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저도 나중에 누나처럼 멋진 집행관이 될 거예요! 저 영안도 뜰 줄 알아요!”
아이는 힘을 주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눈이 살짝 은회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집행관들의 눈이 커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건 분명 영안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소년도 질세라 소리쳤다.
“나도 할 줄 안다, 뭐!”
소년 역시 눈 한쪽이 은회색이 되었다가 돌아왔다. 집행관들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이거, 제나가 미래의 집행관 인재들을 구했잖아?”
다른 한 소년이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저는 쇼핑센터에서 누나가 구해 줬던 남자예요.”
스스로를 ‘남자’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며 집행관들은 웃음을 참았다.
제나는 자신을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 준 아이들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집행관들 무리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드온이 보였다.
두 소년은 이제 각자 자신이 검도장에서 쓰는 목검을 내밀고 사인해 달라고 했다.
제나는 처음으로 자신의 팬에게 사인을 해 주게 되어 가슴이 떨렸지만, 지워지지 않는 매직으로 정성껏 예쁘게 사인해 주었다.
두 소년은 짜리몽땅한 목검을 돌려받고 굉장히 좋아했다. 그 모습에 제나는 어릴 적, 처음 손에 검을 잡기로 결심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라 미소 지었다.
크리드는 어린 소년들의 패기에 크게 감명을 받아 말했다.
“이거, 아주 용감한 녀석들이군! 우리 멋진 신사님들께서 강인한 전사가 되어 집행부에 들어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다.”
크리드의 말에 두 소년은 가슴 벅차하며 다시 한번 경례를 척, 했다.
“예, 대장님!”
크리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두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델은 멀리서 그 모습을 미소 지으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우연히 발견한 리건과 오르한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몰래 웃음을 참았다.
다행히 아델은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맞아 보였다.
소년들의 부모님은 감사의 날을 맞이해 집행관들 나눠 먹으라고 수많은 간식을 손수 포장해 가져왔다.
집행부는 경비가 삼엄해 일반인이 방문하려면 미리 면회 신청을 해야 했고 절차가 까다로운 편이라 이렇게 감사 인사를 하러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집행관들은 껄껄 웃으며 검은색 전투 장갑을 낀 손으로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한 번씩 잡아 주었다.
방금 임무를 끝내고 돌아와 위협적인 전투복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순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때, 불꽃놀이 때 만났던 소년이 기드온에게로 걸어갔다.
기드온은 눈을 깜박였지만, 소년은 그에게도 거대한 사탕을 내밀며 꾸벅 인사했다.
“그날,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드온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소년은 제나와 자신이 위험해졌을 때, 샬리아인 그가 구하러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소년 역시 카일룸과 이사벨라에게로 가서 각각 초콜릿을 건넸다. 두 사람의 얼굴도 상기되었다.
카일룸은 자상한 얼굴로 무릎을 굽히며 아이의 어깨를 두드렸고, 이사벨라는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물었다.
“뭐, 원하면 나도 사인해 줄까?”
“아니요!”
너무나 단호하고 해맑은 소년의 대답에 주변에 있던 동기들이 킥킥 웃었다. 이사벨라는 똥 씹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   *   *
한차례 일반인 방문이 끝나고, 기드온은 제나와 함께 본부를 나섰다.
제나는 사복 차림으로 기드온과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지만,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할로우와 싸우기 위해 전투복으로 무장을 하는 조건으로 외출을 허락받았다.
기드온은 먼저 준비를 끝내고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 멀리 제나가 걸어오자 반가운 얼굴로 맞아 주었다.
하지만 곧 그 뒤로 함께 뒤뚱뒤뚱 걸어오는 세나를 보며 살짝 표정이 미묘해졌다.
자기도 함께 외출을 하고 싶었는지 세나는 뻔뻔한 표정을 하고서 제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제나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세나도 데려가도 될까요?”
“데려가도 되긴 하는데 영안을 가진 사람들이 보면 사념체로 오해할 수도 있어. 그래서 밖에 있을 땐 나도 웬만해선 이온을 안 부르는 편이고.”
그의 말대로 누군가가 영안으로 세나를 발견하고 ‘사념체다!’라고 소리치는 순간, 거리는 아비규환이 될 것이었다.
불쌍한 세나가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사념체로 오해받고 콧물을 질질 짜며 거대한 덩치로 제나의 등 뒤에 숨는 광경이 절로 상상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했지요!”
제나는 세나의 몸에 곰돌이 인형 옷을 입혔다. 사이즈가 무척 컸지만 얼핏 보면 곰 인형 탈을 쓴 사람 같아 보였다.
세나는 외출을 한다는 것이 그저 기쁜지, 답답한 인형 옷을 입고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시내에 도착하자 세나는 몇 걸음 걸었다가 멈춰 서고, 또 몇 걸음 걸었다가 멈춰 서며 무언가를 구경하기 바빴다. 잠깐 한눈을 팔았다 싶으면 어느새 거리를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고 재밌는지, 세나는 솜사탕 기계 앞에서 아저씨가 솜사탕을 빙빙 돌리며 만드는 것을 보며 ‘이힝힝힝!’, ‘푸힝힝힝!’ 하고 웃어 댔다.
그 웃음에 제나와 기드온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깔깔 웃을 세나였다.
제나는 세나의 손에 거대한 솜사탕 하나를 들려 주었다. 먹을 것을 손에 들려 주면 얌전해지는 아이처럼 세나는 솜사탕을 인형 탈 입에 구겨 넣으며 그제야 얌전히 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제나는 마침내 기드온과 함께 어느 고급 양복점에 들렸다.
저번 감사의 날에는 처음으로 번 돈으로 구두를 사 드렸는데, 최근에 기드온의 수행관이 되고 특별반에 들어와 봉급이 더 늘어난 제나는 아버지께 정식으로 양복 한 벌을 사 드리고 싶었다.
기드온은 양복을 자신의 몸에 대 보며 자이드에게 가장 어울릴 디자인과 색을 같이 골라 주었다.
같은 남자로서 자이드의 취향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그는 쇼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자이드 얘기를 하며 단순히 옷만 몸에 대 보는데도 두 사람의 입가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세나는 양복점 입구 옆에 퉁, 앉아 빨간 풍선을 가지고 조용히 놀고 있었다. 기다리다가 지루해할까 봐 제나는 얼른 풍선을 세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