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나의 어둠에게 1부
-괴물을 사랑하는 완벽한 방법 5권-
지은이 | 홍유디
표지 일러스트 | 서나원
타이포 디자인 | 림재
발행처 | 다설
ISBN | 979-11-94229-90-2
ⓒ 2025, 홍유디
2025년 3월 6일 발행
정가 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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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루퍼 가문 (2)」
기드온은 피 묻은 입으로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제나, 정신이 좀 들어?”
제나는 흐린 눈을 깜박이며 눈앞에 안개처럼 번져 있는 하얀 빛무리를 쳐다보았다.
곧 초점이 맞춰지며 카일룸의 얼굴이 나타났다. 은발만큼이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는 눈가만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카일룸은 시선을 내리며 제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마워서 제나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카일룸.”
“뭐가. 뭐가 고마운데.”
그렇게 묻는 카일룸의 얼굴엔 고통의 빛이 어려 있었다. 제나는 그런 그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카일룸은 입을 다물었다.
훈련소 시절부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옆에 있어 줬던 그였다. 죽을 만큼 아플 때마다 그는 한 번도 빠짐없이 옆에서 손을 잡아 줬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병실로 들어왔다.
“아부지…….”
자이드는 안으로 걸어와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더니 슬픈 눈으로 제나를 바라보았다.
카일룸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가 병실을 나가자, 자이드는 말없이 까슬한 손을 들어 제나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제나가 그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부지, 기드온이 살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이드는 울컥해 제나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눈을 감고 제나의 작은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래……. 정말로 큰일을 했구나…….”
카일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제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사실 영혼 소생술은 아무나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전하는 순간 서로의 피와 타액이 공유되어야 하고, 심장박동이 거의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죽어 가는 상대의 맥박을 그만큼 끌어 올려야 하며, 목숨을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일말의 불안이나 의심 없이 열리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만 상대방에게 혼광이 무사히 전해졌다.
심지어 시전자에겐 영혼을 뜯어내는 듯한 고통과 극심한 체력 소모가 따르며, 양 조절에 실패할 경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정말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자이드는 제나에게 기드온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결코 나무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겐 기드온 역시 아들처럼 소중한 존재였다.
제나는 그에게 안긴 채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저 큰일을 해냈다고만 말하는 자이드의 말 한마디가 너무 따스해서, 그가 자신의 아버지가 된 것이 무척이나 축복받은 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다 문득 기드온에게도 이런 존재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제나는 눈을 뜨고 조용히 물었다.
“아부지, 기드온의 양아버지는…… 좋은 분이셨어요?”
자이드가 멈칫했다.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정말 좋은 놈이었다. 좋다 뿐이냐, 아주 훌륭한 놈이었지. 내 친구나 샬리아여서가 아니라 그놈은 정말로 대단한 놈이었어.”
제나는 그 말에 문득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눈이 커졌다.
“나랑 가장 친했던 집행관 동기가 사고로 죽었거든……. 그 녀석 유언을 들어 주기 위해 집행관에서 은퇴하고, 훈련소 교관이 되었지.”
제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물었다.
“혹시…… 그분의 유언이…… 기드온을 집행관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제나를 보며 자이드가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래. 내게 기드온 그 녀석을 훌륭한 집행관으로 키워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그놈은…… 내게 그 유언을 남긴 그날, 기드온을 구하고 순직했다.”
*   *   *
한 무리의 집행관들이 눈발이 휘날리는 험한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런 깊은 산중에 사념체라니……. 아니, 그전에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 줄은 또 몰랐군.”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리는 탓에, 그들은 제복이 홀딱 젖고 표정이 절로 일그러져 있었다.
방어 대형을 이루며 달리고 있지만,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언제 어디서 사념체의 공격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금발을 가진 한 남자가 달리면서 착잡하게 말했다.
“아마 노마드들일 테지. 갈 곳이 없어서 이런 산속에 숨어 살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들이 도착했을 때, 산중 마을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온 사방에 차갑게 식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눈과 피, 진흙이 뒤섞여 있는 참혹한 풍경을 보며 집행관들은 입을 다물었다.
금발의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젠장…… 조금만 더 일찍 신고가 들어왔더라면…….”
옆에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바로 젊은 시절의 자이드였다.
“자책하지 마, 크레시온. 불행히도 이 마을에 영안을 가진 이가 없었던 모양이지.”
마을 사람들은 사념체가 나타나도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크레시온은 심안을 발동시켜 마을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때, 그의 보라색 심안에 초록색 혼광이 잡혔다.
“자이드, 저쪽에 생존자가 있는 것 같아!”
“어서 가 보지!”
그들은 마을의 공터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모두 눈이 커져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곳에는 산발 머리를 한 소년이 손에 검 한 자루를 든 채 눈발을 맞으며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사념체에게서 떨어진 잔류사념석들이 마치 유리 조각처럼 널브러져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마치 흥분한 야생마처럼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길고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은회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저건 영안……!”
자이드가 놀라서 소리치는 순간, 소년은 다짜고짜 검을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크레시온이 소년의 트라우마 소드를 가볍게 막으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 우린 너와 같은 사람들이다.”
소년은 눈이 커져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정말로 보라색 눈을 가진 크레시온을 제외하고는 모두 은회색의 눈에, 손에는 제각각 다른 크기와 형태의 검을 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소년은 그제야 스르르 검을 내렸다. 그 검은 추운 겨울을 연상시키듯 차가운 검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손잡이 부분이 마치 오래된 신성한 고목처럼 돌돌 말려 올라간 나무 형태였다.
옆에서 자이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영안 개방에, 트라우마 소드 구현까지 스스로 해내다니…… 대체 이 아이는 뭐지?”
주변에 남아 있는 사념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소년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혼자서 사념체들을 전부 베어 버린 듯했다.
날씨가 끔찍하게 추웠지만, 크레시온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소년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나는 크레시온 루퍼라고 한다. 네 이름은 뭐지?”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자크 카터.”
“좋아, 자크.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련? 넌 지금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해.”
크레시온이 무릎을 굽히고 널찍한 등을 내밀었다.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그의 등에 넙죽 업혔다.
그들은 다 같이 산에서 내려왔다. 눈발이 휘날리고 모두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찬 입김이 새어 나왔다.
크레시온은 묵묵히 앞만 보며 걸었지만, 가끔 힐끗 뒤를 보며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소년은 이런 추운 겨울날에도 허름한 무명옷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었다. 가는 팔다리와 지저분한 머리 상태를 보아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것 같았다.
어느새 지친 얼굴로 크레시온의 넓은 등에서 새근새근 잠든 소년을 보며 자이드가 말했다.
“정말 엄청난 녀석이로군……. 이런 아이는 살면서 처음 봐. 마치 집행관이 되기 위해서 태어난 아이라고 해도 믿겠어.”
“그러게. 잘만 키우면 훌륭한 집행관으로 자라날 수 있겠지.”
크레시온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에이스 총장에게 찾아가 산속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호아킨은 그의 얘기를 경청하며 연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레시온이 말했다.
“제가 그 아이를 입양해 집행관으로 키우겠습니다. 잘만 하면 제 뒤를 이어 샬리아가 될 수 있을 만큼 재능이 있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니, 집행부나 훈련소가 아닌 저의 집에서 보살피게 해 주시지요.”
“자네 뜻대로 하게, 크레시온.”
*   *   *
잠이 깬 자크는 영문도 모르고 거대한 저택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크레시온이 커다란 수건으로 부스스한 머리와 몸에 묻은 물기를 손수 닦아 주며 말했다.
“넌 이제부터 이 집에서 지내게 될 거란다. 이왕이면 과거의 이름은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갖는 게 좋겠지.”
그는 이름을 뭐로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이를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기드온……. 그래, 기드온이 좋겠구나. 히브리어로 ‘베는 자’라는 뜻이다. ‘굳센 전사’라는 의미도 있지. 너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느냐.”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화려한 대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집사와 수많은 하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그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그들의 앞에는 연한 금발을 가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기드온을 발견하고 조금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겉모습에서부터 귀티가 줄줄 흐르는 귀공자 같은 소년이 물었다.
“아버지, 옆에 있는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크레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가족이 되어 이 집에서 함께 지낼 아이란다. 이름은 기드온 카터.”
“기드온……?”
인형처럼 예쁜 여자아이가 초록색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기드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기드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 위로 긴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크레시온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 녀석이 여자애 앞이라고 낯을 가리는구나.”
여자아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기드온 주위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얼굴을 살폈다.
꼬질꼬질한 옷차림과 말갈기처럼 지저분한 장발, 그리고 흙이 잔뜩 묻어 있는 맨발은 순백의 여자아이와 너무나도 대비되었다.
기드온은 창피했는지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런데 그때, 여자아이가 대뜸 추위에 꽁꽁 언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난 엘리사 루퍼. 8살이야. 넌?”
기드온은 살짝 눈이 커져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은회색인 것을 보며 엘리사의 눈도 살짝 커졌다.
“아버지, 이 아이도 집행관이에요?”
“그래. 예비 집행관이라 할 수 있지. 앞으로 아주 훌륭한 집행관이 될 거란다.”
그 말에 엘리야가 살짝 흠칫했다. 크레시온이 웃으며 자상하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기드온은 몇 살이지?”
“……8살.”
“나랑 동갑이네? 앞으로 잘 지내 보자, 기드온.”
엘리사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기드온이 입을 달싹이다가 작게 대답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