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나의 어둠에게 1부
-괴물을 사랑하는 완벽한 방법 2권-
지은이 | 홍유디
표지 일러스트 | 서나원
타이포 디자인 | 림재
발행처 | 다설
ISBN | 979-11-94220-87-2
ⓒ 2025, 홍유디
2025년 3월 6일 발행
정가 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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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트라우마(Trauma) (2)」
오르한이 제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문제아1이 문제아2의 문제에 나설 줄 알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하고 싶은 질문이야. 너희들이 모두 외출한 사이에 이놈이 훈련소에 남아 있던 동기 네 명을 트라우마 소드로 반 죽여 놨어. 의무실로 급하게 옮겼지만, 현재 네 명 다 의식불명 상태야.”
그 말에 제나를 포함한 동기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제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일룸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어요.”
“이유야 어찌 됐든 이놈은 사람을 죽이려고 한 놈이야.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반성의 기색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지. 이런 놈은 훈련소에서 그냥 퇴소시킬 수도 없어. 트라우마 소드도 있겠다, 완전히 잠재적 살인마야.”
그 말에 카일룸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는 것 같았다.
오르한은 말없이 그 모습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때, 멀리서 간호사가 급하게 달려왔다. 제나가 시험장에서 만났던 그 남자 간호사였다.
“훈련생 한 명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데즈민이 물었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인가.”
“예.”
“이리로 데려오게.”
곧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훈련생이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나왔다. 카일룸과 다른 숙소를 쓰는 훈련생이었다.
그는 카일룸과 교관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시선이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데즈민이 말했다.
“훈련생이 대신 말해 봐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그게…… 저놈이 갑자기 숙소에서 다짜고짜 트라우마 소드를 들고 저희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구라 치지 마라?”
오르한의 말에 훈련생이 움찔했다.
“대가리 멀쩡하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홱 돌아서 미치는 건 많이 봤지만, 이유 없이 미치는 놈은 아직 못 봤거든.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그 팔, 다시는 못 쓰게 되는 수가 있다?”
그의 협박에 훈련생은 눈이 커지더니, 벌벌 떨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1호 숙소에서…… 혼자 낮잠을 자고 있길래…… 장난삼아…….”
그가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오르한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장난삼아 뭐.”
그가 대답하지 않자, 오르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난삼아 뭐!”
훈련생은 이제 공포에 질려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장난삼아…… 옷을 벗기려다 그만…….”
교관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옷을 벗겨? 남자 넷이서 자고 있는 녀석의 옷을 벗기려고 달려들었다는 얘기야?”
훈련생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거 완전 개썅 호로새끼들이네?”
오르한의 눈이 무섭게 희번덕거렸다.
제나는 충격에 입을 가리고 카일룸을 바라보았다. 접힌 옷소매 아래로 밧줄이 묶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카일룸은 이제 제자리에 주저앉아 팔을 감싸 안고 부르르 떨었다. 목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수치심에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눈치였다.
오르한이 악마 같은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오자, 훈련생이 다급하게 말했다.
“자, 장난이었습니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겼길래 그냥 한번 장난을 쳐 본 건데…… 그렇게 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장난이라……. 일부러 모두가 훈련소를 비우는 날을 골라서 그런 장난을 쳤다? 우리가 우습게 보이냐?”
그가 입을 다물었다. 오르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당장 옷 벗어. 팬티만 남기고 싹 다.”
“네?”
“아니다. 내가 벗겨 줄게. 너 같은 짐승 새끼가 옷이란 걸 스스로 벗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오르한은 그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단검으로 트레이닝복을 죽 찢고는 강제로 잡아당겼다. 훈련생은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오르한이 눈을 번뜩였다.
“손 치워. 잘라 버리기 전에.”
“제, 제가 벗겠습니다……!”
그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전부 벗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오르한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 그럼 네가 가장 먼저 깼으니까 너부터 시작이다. 저 녀석의 트라우마 소드를 들고 다음 놈이 깨어날 때까지 버티면 용서해 주마.”
훈련생은 덜덜 떨며 카일룸의 트라우마 소드로 손을 가져갔지만, 검을 들자마자 비명을 내질렀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온갖 인상이란 인상을 다 쓰며 틱 장애처럼 몸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기괴해 보일 정도였다.
다친 팔이 눈에 띄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오르한이 냉정하게 말했다.
“떨어뜨리면 그걸로 끝이다. 제대로 들고 있어.”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훈련생은 검을 내던지며 구역질을 했다. 오르한은 그 앞에서 그늘이 진 살벌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훈련생은 후다닥 일어나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오르한은 카일룸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심란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데즈민이 말했다.
“카일룸 셰이드. 교관 휴게실에 가서 치료받아라.”
그가 혼자 걷지 못하자, 간호사가 재빨리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카일룸은 고개를 푹 숙이고 풀린 다리로 힘겹게 절뚝절뚝 걸었다.
“나머지 훈련생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간다.”
한바탕 벌어진 충격적인 소동에 훈련생들은 싱숭생숭한 얼굴로 숙소에 돌아왔다. 오늘 있었던 면회가 한순간에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제나는 카일룸이 왜 면회를 나가지 않고 혼자 숙소에 남아 있었는지 클라우스에게 들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카일룸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색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어쩌면 그가 옆에서 자신을 은근히 챙겨 준 것도 고아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제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숙소를 빠져나왔다.
교관 휴게실로 가는 도중, 복도에서 다리아를 만났다.
“제나 리. 무슨 일이냐.”
“카일룸이 걱정돼서요……. 카일룸은 어때요? 몸 상태는 좀 괜찮나요?”
다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괜찮지 않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을 거야. 그놈들이 녀석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건드렸으니까…….”
“트라우마요?”
제나가 놀라서 되물었다. 다리아는 말실수를 했다 싶어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런 얘기, 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라면 그 녀석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특별히 알려 주마. 미리 알고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카일룸 셰이드는 어렸을 적, 억지로 당한 트라우마가 있어. 아주 끔찍해. 어두운 창고에서 쇠사슬에 묶여서, 그것도 한 놈이 그런 게 아닌 거 같아.”
제나는 충격에 눈이 커져서 입을 가렸다.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문득 연병장에서 달리기를 할 때 카일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내가 가진 트라우마가 끔찍하게 혐오스러워. 기억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그 말을 할 때 카일룸의 표정은 너무나 씁쓸했다. 말을 하면서도 불안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을 정도였다.
제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교관님들은…… 그 장면을 시험장에서 전부 보신 거예요?”
“그래. 전부 지켜봤어. 처음부터 끝까지.”
제나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다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매년 시험을 보러 오는 지원자 중엔 그런 트라우마를 가진 자들도 없지 않아 있어. 하지만 열에 아홉은 시험 시작 전에 규칙을 듣고 기권하지. 누구도 자신이 당하는 장면을 타인에게 보여 주길 원치 않을 테니까. 그건 2차 트라우마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런데 녀석은 그걸 알고도 시험을 치렀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한 거지. 그리고 그건 정말…… 우리로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어.”
제나는 문득 날카로운 가시를 닮고 손잡이에 쇠사슬이 달려 있던 카일룸의 투명한 검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 당시 트라우마와 카일룸의 방어본능,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트라우마를 들키고 싶지 않은, 차라리 투명 인간이 되고 싶은 그의 마음이 형상화된 모습이었다.
제나는 그제야 오르한이 왜 가해 훈련생에게 카일룸의 검을 들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그런 짓을 저지른 놈들에게 카일룸이 겪었던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보라는 가장 적절한 징벌이었다.
“다른 놈들에게도 진술서를 쓰게 했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카일룸에게 했던 사소한 말 하나까지도 전부. 서로 진술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맞아떨어질 때까지 갈구면서 서로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을 세세하게 쓰도록 했지. ‘예쁜이’부터 시작해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역겨운 말들을 내뱉었더군…….”
다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건 분명 장난이 아니었어. 밧줄 같은 도구까지 사용한 거로 보아 단순히 옷을 벗기려던 것도 아니었고. 그 녀석이 규칙을 어기고 검을 들 만큼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만해.”
제나는 카일룸이 왜 훈련소 입소 첫날 대련을 자처했는지, 그 마음이 이제는 뼈저리게 이해가 갔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자신이 나약하지 않다는 걸 자신의 트라우마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증명해 내야만 이곳에서 얼굴을 들고 떳떳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제나는 자기도 모르게 커진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리아가 힐끗 쳐다보았다.
“다리아 교관님…… 전 그것도 모르고…… 그 애를 볼 때마다 속으로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말에 다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입 밖으로만 안 냈으면 됐지. 그 녀석이 예쁘장하게 생긴 건 사실이니까. 아름다운 건 좋은 거야. 물론 남자, 그것도 집행관에게 예쁜 외모가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제나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간절하게 물었다.
“카일룸은 이제 어떻게 되죠? 계속 훈련소에 남을 수 있나요?”
“녀석이 그러길 원한다면. 솔직히 말해서 대단한 녀석이야. 그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트라우마 소드로 놈들을 상대했으니까. 이게 무얼 뜻하는지 알아? 녀석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낸 거야. 그건 집행관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자질이지.”
제나의 눈이 커졌다.
트라우마 소드를 만들어 내는 것과 제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갓 입소한 훈련생들이 검을 제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교관들은 검을 들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하기 전까진 결코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할 텐데, 마음대로 해. 네 동기니까. 동기의 아픔을 이해하고 좋은 동료가 되어 줘라. 그게 집행관이 가져야 할 두 번째 자질이다.”
다리아가 말을 끝내고 복도를 걸어갔다. 제나는 마음을 다잡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카일룸은 피멍이 검게 들다 못해 터진 엉덩이를 치료받고 소파에 엎드려 있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제나는 조용히 그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앉았다. 카일룸은 살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 제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다가 딱딱한 각목처럼 다시 앞으로 엎어졌다.
“그냥 누워 있어.”
카일룸은 제나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꼴을 보여서 죽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제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내가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었는데…… 엉덩이 쪽이라 조금 그렇다…… 그치?”
카일룸은 눈이 커져서 쳐다보았다가, 농담 같은 말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눈꼬리가 풀어지며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그는 웃는 모습조차도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제나는 고개를 휙 돌리고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예쁘다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카일룸이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아까는 왜 나섰어. 안 그래도 맨날 교관님들한테 혼나면서. 너까지 몽둥이 맞았으면 어쩌려고…….”
“그럼 내 친구가 억울하게 맞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그 말에 카일룸이 살짝 눈이 커져서 귓불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