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딸이 되어버렸다 1권
지은이 : 율지
펴낸곳 : 필연매니지먼트
E-mail : feelyeon2015@gmail.com
정가 : 3,200원
ISBN : 979-11-7294-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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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딸이 되어버렸다
1권
율지
목차
01
02
03
04
05
0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 세이르나.
그녀는 황제 앞에 섰다.
뒤로는 화려하고 위엄 가득한 갑옷의 기사들을 거느린 채.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왕국은 점령했고 후속대가 남은 수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하. 역시 패배를 모르는구나. 이번에도 그대가 나선 덕분에 수월했다. 대마법사가 일노드 제국을 수호하니 두려울 것이 없어!”
일노드 제국에서 그녀는 곧 승리의 상징이었다.
“전력 차이에서 이미 승패가 정해진 전쟁이었습니다.”
“그 또한 대마법사가 있어 준 덕분이지. 원하는 것을 말해보거라. 무엇이든 상으로 내려주겠다.”
숱한 전쟁터를 누볐다.
자연스레 수많은 전공과 영광도 쌓았다.
길거리를 떠돌던 고아가 일노드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모두에게 칭송받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모든 게 시시했다.
이대로라면 평생 보장된 부귀영화를 누릴 일만 남아있었다.
그럴 줄 알았는데…….
전쟁에 승리했지만 이전과 같은 위풍당당한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패잔병처럼 허름한 몰골을 한 채로 그녀는 황제 앞에 섰다.
“이번 전쟁은 왜 해야 했던 겁니까.”
“웬일이지. 대마법사 세이르나가 이유를 다 묻고. 그대는 내 명령에 따라 출정하면 되는 거야.”
“…….”
“말해보게나. 이번엔 뭘 원하는가. 그대가 원한다면 대공의 작위와 함께 자치령을 인정해줄 수도 있어.”
황제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하지만 세이르나는 솔깃하기는커녕 참을 수 없는 거북함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뇨. 다른 걸 주십시오.”
“이보다 더 원하는 게 있나? 뭐든 해줄 테니 말해보게.”
“일노드 제국의 대마법사 세이르나를 그만두겠습니다.”
세이르나는 이미 단순한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영광스러운 칭호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이름마저도 내려놓고 일노드 제국을 향해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 길로 사람은 찾아볼 수도 없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일노드 제국이 있는 곳은 꿈속에서라도 돌아보지 않으리라.
그게 그녀의 마지막 결심이었다.
‘그걸로 오히려 질긴 악연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전쟁이 지긋지긋해 영원히 떠났더니, 일노드 제국의 일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전쟁의 대상은 바로 나, 세이르나였다.
수많은 전쟁에 출정하면서 일노드 제국에 대해 너무 많은 기밀을 알고 있는 게 문제였던 거지.
게다가.
대마법사로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내 삶은 남들보다 더 길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 전쟁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끝나지 않는구나.’
그럼 내가 죽으면 되겠구나.
내가 내린 결론은 깔끔했다. 단,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이제 다 컸으니 썩 꺼져라.”
“진짜 망할 스승님이 또 시작이네!”
제자는 매일같이 부리던 변덕이라고 여겼지만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그렇게 일노드 제국과의 마지막 전쟁을 맞이하기 위해 산에서 은둔하며 지내는 동안 거뒀던 제자를 쫓아냈다.
“망할 제자가 없으니 이제야 겨우 훌훌 가벼워졌네.”
유일한 제자도 없으니 이제 죽기 전에 정리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노드 제국이 이끄는 군대가 나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커헉-.
입 안에서 피가 나오는 걸 보니.
‘이제 죽는 건가.’
솔직히 살 만큼 오래 살았으니 죽는 게 아쉽지는 않았다.
일노드 제국을 향한 억울함이나 복수심도 들지 않았다.
그동안 함께해서 더러웠고 이제는 더 이상 얽힐 일이 없어서 오히려 후련할 지경이었다.
다만, 딱 하나.
“저랑 약속하시는 겁니다. 스승님께서 시킨 걸 전부 끝내면 다시 돌아올 겁니다.”
전부 정리한 줄 알았는데 제자가 떠날 때 했던 약속이 남아있다는 게 죽기 직전에야 떠올랐다.
“……설마 진짜로 돌아오지는 않겠지.”
약속이라면 꼭 지켜야 한다며 사람을 들들 볶는 제자 놈인데. 나중에 욕 좀 실컷 듣겠어.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점점 사라지더니 온 세상이 암흑으로 가득 찼다.
“저 꼭 돌아올 거니 두고 보세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하지만 그마저도 점점 흐려졌다.
결국, 길고 지루했던 전쟁이 내 죽음으로 끝이 났다.
***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나는 분명 죽었을 텐데. 안 죽은 건가?
근데 어떻게 안 죽었지. 여기는 어디고?
“아…… 아바바……?”
뭐야. 이 정체불명의 헛소리는.
설마 방금 그 해괴한 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단 말이야?
“어브브브……!”
진짜 내가 내는 소리네.
‘여기가 어디야. 누구 없어?’
나는 분명 이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 결과물이 ‘어브브브’라니.
그것도 내 목소리가 아니라 아주 가늘고 앳된 소리 아닌가. 마치 아기가 우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내 몸을 살펴보는데…….
‘진짜 아기야?’
그것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갓난아기.
한계를 초월한 대마법사 세이르나.
그런 내가 최악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아기로 환생하고 말았다.
***
환생해 보니 내가 죽은 시점으로부터 20년이나 흘러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제국의 유일한 황녀가 되어 있었다.
그 제국이 나를 죽인 원수 일노드 제국이냐고?
그랬다면 참 흥미로운 상황이었겠지만.
그건 아니다. 내가 황녀로 태어난 나라의 이름은.
프로미안 제국.
내가 죽은 후 나타난 어느 괴물 같은 마법사가 새로이 건국한 제국이었다.
“지금은 일노드와 전쟁을 치르느라 안 계시지만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분명 아기님을 좋아하실 거예요.”
심지어 이 제국의 황제는 내가 죽을 때까지 대륙의 중심이었던 일노드를 상대로 비슷한 세력을 키워낸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노드를 꽤나 밀어붙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일노드라.
‘그건 좀 쌤통인데?’
일노드 제국에서 태어나는 것도 피했겠다. 심지어 그 적국의 유일한 황녀라니.
얼핏 운이 좋아 보이지만 애석하게도 그것도 전혀 아니었다.
“제가 그동안 아기님을 모셨으니 가장 잘 알아요. 한눈에 반할 만큼 사랑스러우신걸요.”
지금 내 옆에서 귀가 닳도록 나를 향해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는 사람은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돌봐주는 시녀 모니아.
그녀의 다정한 위로는 사실 간절한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 이야기만 들어도 내가 이곳에서 어떤 처지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황제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존재였다.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지만 황후는 나를 낳자마자 죽었다.
황제는 그런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전쟁에 출정해 3개월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와 황후는 동맹을 위해 정략혼을 올렸을 뿐, 황제는 오로지 전쟁에만 미쳐있고 서로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아이에게 애정이 없을 만한 배경이었다.
그러니 모니아의 희망적인 속삭임은 그녀의 바람이 현실이 되길 바라며 외우는 주문이었다.
“나중에 분명 예쁜 이름이 생길 거예요. 그때가 되면 실컷 불러드릴게요.”
심지어 나는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나를 부르는 호칭도 아기님, 황녀님이었다.
이름도 없는 황녀라니!
내가 거리를 떠도는 거지일 때도 이름은 있었는데!
아무리 원치 않은 자식이라도 태어나기 전에 이름 정도는 생각해두지 않나?
그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제 핏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방치당한 황녀.
그게 내 신세였다.
“푸흥!”
흥. 코웃음을 쳤다.
이름 따위 없는 게 뭐 별거라고.
누군가에게 환생은 새로운 기회일 것이다.
과거에 못다 한 미련을 풀거나 정반대의 인생을 살기 위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