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나요?”
검우빈이 눈을 끔뻑이며 서석산을 향해 눈길을 줬다.
서석산도 당황했는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금홍아, 내가 정말 감이 떨어진 거냐, 아니면 쟤가 잔망스러운 거냐?
―나도 지금 그게 의심스러워. 내가 늙어서 요즘 애들의 연애 방식을 못 따라가는 걸까?
서석산과 연금홍이 전음을 주고받았다.
“저…… 열세 살인 거 아시죠?”
“응, 나도 열여덟이야. 혼인하기 딱 좋은 나이지.”
문득 검우빈은 제갈훈의 전서구를 떠올렸다. 명화탕 제조법을 왜 보냈나 했더니…… 그 이유가 정말 제갈종려였던 모양이다.
“아우! 먼 길 왔더니 피곤하네. 내 방이 있을까? 네 방 옆이어도 되고. 아직 같은 방을 쓰긴 좀 그렇잖아.”
“…….”
검우빈은 자신의 방과 가장 먼 방으로 줘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여기예요.”
검우빈은 서둘러 준비했던 방을 무시하고, 정말 가장 먼 곳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 탓에 달랑 침대에 탁자, 그리고 작은 서고가 있는 단출한 방이 되었다.
하지만 제갈종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좋네. 밥 먹을 때는 꼭 깨워 줄래? 안 일어나면 입에 쑤셔 넣기라도 해. 끼니는 절대 거르지 않는다는 게 내 철칙이거든.”
정말 피곤했던지 제갈종려는 이틀을 내리 잤다.
식사하라고 깨우면 잠꼬대처럼 가져다 달라고 했고, 가져다 놓으면 어느새 밥을 깨끗이 비우고 빈 그릇만 밖으로 내놨다.
시중을 드는 오다래는 이렇게 편한 상전은 처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빈 그릇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는데 지나가던 검우빈이 물었다.
“제갈 소저는 어때요? 지내기 불편하지 않대요?”
“종일 주무셔서 목소리도 들어 보지 못했어요.”
“식사는요?”
오다래는 빈 그릇을 검우빈에게 보여 주었다.
“꼬박꼬박 하고 계십니다.”
“아픈 건 아닌 것 같으니 됐네요.”
검우빈은 돌아서서 한숨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이 받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꽤 귀찮은 손님이었다. 그녀 때문에 장원의 모든 인물들이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다.
“돌려보낼 방법을 생각해야겠는데…….”
어째 명화탕 제조법이 절대 비싼 금액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    *
제갈종려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냈다.
조용할 수밖에 없는 게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 먹고 장원을 한 바퀴 휘둘러본 후 검우빈과 잠시 얘기하다가 자고, 점심에 깨서 밥 먹고 혈풍사자와 만나면 잡담이나 나누다가 자고, 저녁 식사를 하고는 한 시진도 안 돼서 침대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사흘을 보내니 오선장원에 손님이 왔다는 것조차 모르는 일꾼도 있었다.
오다래는 점심 식사 후 후식으로 과일과 차를 들고 제갈종려의 방으로 갔다.
“아가씨, 후식 드세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한 지 반 시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자다니. 잠 많이 자는 병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다래가 탁자에 쟁반을 올려놓는데 제갈종려가 깼다.
“어? 먹을 거 가져왔어요?”
“네. 차와 여지를 조금 준비했어요.”
하품과 함께 눈을 비빈 제갈종려가 침대에서 빠져나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오다래는 제갈종려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만 자고 딱히 뭘 하지도 않고 끼니는 저렇게나 다 챙겨 먹는데…… 놀랍게도 제갈종려는 조금의 군살도 없었다.
거기다 무림세가 여식답지 않게 예의도 바르다.
“지내시기 불편한 건 없으세요?”
“불편한 게 뭐가 있겠어요. 너무 좋아서 평생 여기서 살까도 생각하는데.”
검우빈이 들으면 기겁했을 이야기를 제갈종려는 스스럼없이 뱉어 냈다. 사실 오다래도 이렇게 편한 상전이라면 평생 모시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제갈종려가 빨간 여지의 껍질을 까는데 오다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눈곱이 좀 끼었는데요.”
“눈곱?”
눈을 비비는 제갈종려의 눈에서, 거짓말 조금 보태면 그녀가 먹는 여지만 한 눈곱이 떨어졌다.
“와! 왕건이네! 또 있어요?”
“네. 왼쪽 눈 안쪽하고 가에도 조금…….”
그제야 오다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목욕물 데워 드릴까요?”
제갈종려는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아요. 어디 나가지도 않는데 뭐.”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혼자 남은 제갈종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정원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공간 같았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차와 여지를 모두 먹은 제갈종려가 빈 접시를 한쪽으로 밀고 일어났다.
“아함! 졸리네.”
그러곤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    *    *
도평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연금홍에게 물었다.
“제갈종려 그 아이는 정말 여길 왜 온 거야? 갈 곳이 없어서 왔다는 건 너무 이상하고. 정말 사형이 목적인 걸까?”
처음에 왔을 때는 대사형을 노리는 게 분명하다 싶었는데, 와서 생활하는 걸 보니 그냥 공짜로 먹고 잘 생각으로 온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알아볼게.”
연금홍의 말에 세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잡아다 고문하고 물어보지 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방법이네.”
연금홍이 한숨을 쉬었다.
“좋은 방법은 무슨 좋은 방법이야? 어쩜 너희들은 이렇게 생각이 없냐.”
나가는 연금홍을 보며 도평수가 중얼거렸다.
“자기가 하겠다고 해 놓고 왜 화를 내?”
연금홍은 셋의 반발을 무시하고 제갈종려의 방으로 갔다. 그녀를 보고 놀라서 인사를 하는 오다래에게 물었다.
“종려는?”
“아마 주무시고 계실걸요?”
“또?”
달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편하기는 한데…….
“알았다.”
오다래를 보낸 연금홍은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잠이 가득한 제갈종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아니면 그냥 잘래요.”
연금홍이 문을 열고 고개만 안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좋은 구경 시켜 주려고 하는데?”
“숙모님.”
연금홍이 오자 제갈종려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몇 년 동안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슨 구경인데요?”
“따라와 보면 알아.”
연금홍이 제갈종려를 데려간 곳은 대장간이 내려다보이는 지붕 위였다.
“이 시간에만 볼 수 있는 멋진 장면이지.”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웃통을 벗은 채 담금질을 하고 있는 공성탁이 있었다.
“와! 저 근육 봐요! 우리 세가에도 외문무공을 익힌 사람은 많지만, 저렇게 우람하면서 섬세한 근육은 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 곰 털을 다 벗겨 놓은 것 같다니까.”
“오선장원이 천당이네요, 천당.”
“여기가?”
“간섭하는 사람도 없죠. 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려도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죠. 손님도 안 오니 씻을 필요도 없고, 자고 일어나면 이런 구경도 할 수 있고. 어떻게 이보다 완벽할 수 있겠어요?”
연금홍은 품에서 휴대용 차통을 꺼내 뚜껑 겸 잔에 차를 따랐다.
“거기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까지 있지.”
은비연이 헤어질 때 챙겨 줬던 차였다.
제갈세가에 있으니 차는 자연 많이 마실 수밖에 없는 제갈종려가 맛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차예요? 세상에! 어떻게 차가 이런 맛을 낼 수 있는 거죠?”
“내가 말했잖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라고.”
공성탁이 커다란 망치로 바꿔서 담금질을 하자 근육이 금방이라도 살갗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제갈종려가 말했다.
“저 그냥 여기서 계속 살아도 돼요?”
“이미 계속 살 기세인데?”
“에이, 저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계속 무위도식을 해요? 그것도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죠.”
“마땅한 핑계?”
“음…….”
제갈종려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원래는 우빈이한테 저에게 장가오라고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지내보니 제가 시집오는 게 훨씬 낫겠다 싶어요.”
표정만으로는 진심인지 농담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진심이야?”
“당연하죠. 이렇게 예쁜 숙모님도 계시는데. 숙모님, 어떻게 그렇게 예뻐요? 화장도 거의 안 하시는데. 원래 동안이신 건가?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언니는 무슨. 남들이 보면 흉본다. 호호호!”
“아참! 오늘 일어난 김에 시장 좀 가야겠어요.”
“시장은 왜?”
“항주까지 왔는데 시내 구경은 해야죠.”
제갈종려는 팔을 들어서 자기 냄새를 맡았다.
“냄새는 안 나는 것 같은데. 안 나죠?”
“응.”
“그럼 그냥 나가도 되겠네요. 씻기 귀찮아서. 헤헤!”
“시장은 그냥 구경하러 가는 거야?”
“간 김에 책도 몇 권 사려고요.”
“책은 왜?”
“우빈이가 책을 좋아하더라고요. 서방님이 될지 모르는데 할 수 있을 때 잘 보여야죠. 이거 제가 치울게요.”
마침 공성탁의 담금질도 끝나서 제갈종려는 미련 없이 지붕을 내려갔다.
씻지는 않았어도 오다래가 빨아다 준 옷은 깨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