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장소는 원래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결정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혈풍사자가 뚝딱뚝딱 짓지 않고 누굴 시켜야 하는데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집 짓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을 들은 세화가 자신 있게 말했다.
“스물다섯 어린애인 네가?”
스물다섯 살이면 혈풍사자에게 그저 핏덩이일 뿐이다.
“기루에 있다 보면 이런저런 손님들이 많이 오시거든요.”
서석산이 물었다.
“그런 사람들 만나려면 시내로 나가야겠구나?”
“그렇죠.”
서석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세화의 등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계약도 하고 그러려면 돈도 필요하겠네.”
서석산은 은자 사백 냥이 든 주머니를 던졌다.
“어서 그 사람들 만나 봐라.”
“네.”
찜찜한 기분으로 일어서려는데 서석산의 음산한 음성이 울렸다.
“집 짓는 일 한다고 네 부족한 연주 연습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시내 가서 사람 만나고 돌아오려면 세 시진은 걸릴 텐데 오늘 밤잠은 못 자겠구나.”
세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일을 맡으면 지옥 같은 연주 시간을 벗어날 줄 알았다.
“주, 주인님……. 그건 너무 가혹합니다.”
“그럼 도망치든가. 돈도 넉넉하잖아.”
“저, 절대 안 도망쳐요!”
세화는 시내로 가서 건축업자를 만났다.
자기 돈이 아니니 부르는 대로 계약을 했다. 그리고 정말 돌아오기 싫은 길을 저벅저벅 걷고 있었다.
이대로 도망칠까?
유혹이 그녀의 머리칼을 잡고 집 반대 방향으로 끄집어 당겼다.
“광동성행 마지막 마차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에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장거리 마차.
종착지가 광동성이다.
너무 멀어서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동네라는 건, 혈풍사자가 쫓아오기에도 먼 거리라는 뜻이다.
세화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저 마차만 타면 지옥 같은 혈풍사자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그쪽으로 옮겨졌고 자신도 모르게 가격을 물어보았다.
마차비가 동전 백이십 문밖에 되지 않는다. 비좁아 보이는 좌석도, 마차 안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도 꽃향기처럼 느껴졌다.
차비를 지불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오통수의 말이 생각났다.
―만리향이라는 게 있지. 몸에 뿌려 두면 한 달 동안 아무리 목욕을 해도 냄새가 지워지지 않아. 냄새가 얼마나 멀리까지 나냐고? 이름이 만리향인 거 보면 몰라? 혈풍사자가 틀림없이 우리 몸에 뿌려 놨을 거야. 넌 냄새 맡아 봐야 몰라. 뿌린 사람만 맡을 수 있거든. 혈풍사자가 왜 우릴 방목, 아니 방치하겠냐? 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야.
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았지만 역시나 그녀의 지분 냄새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리향? 그런 게 어디 있어!’
말 여섯 마리가 끄는 마차는 빨라 보였다.
물론 혈풍사자가 더 빠르기야 하겠지만 그녀가 이 마차에 탔다는 걸 알 리가 없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혈풍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자들은 그냥 방심하고 있는 것이다.
‘난 강서삼악처럼 겁쟁이가 아니야!’
세화는 만지작거리고 있던 은자를 꺼냈다.
“세화 소저!”
그 부름에 깜짝 놀라 주머니 속에서 잡았던 은자를 놓쳤다. 고개를 돌리자 가방을 멘 검우빈이 보였다.
“크…… 큰주인님!”
“여기서 뭐 하세요?”
장거리 마차 앞에서 들켰으니 이건 외통수다.
“아! 물건 흥정하고 계셨구나? 장거리 마차가 사람이 아닌 물건을 사서 팔러 오기도 하잖아요.”
“네? 네! 맞아요. 마음에 드는 향수가 있을까 하고요.”
“먼 데서 찾을 필요 없어요. 항주에 좋은 향수가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나중에 하나 사다 줄게요. 집에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요?”
세화는 검우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휴우! 꼬마가 그런 멍청한 오해를 해서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검우빈의 옆얼굴을 힐끔 본 세화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혈풍사자의 사형 검우빈이다.
비록 열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 중원을 통틀어 그 나이에서 가장 총명한 아이가 검우빈일 것이다.
‘설마…….’
검우빈이 그런 멍청한 오해를 했을 리가 없다.
‘내가 도망치는 걸 감싸 주려고…….’
그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녀는 강서삼악을 시켜서 혈풍사자와 검우빈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미워해야 당연하고 눈엣가시처럼 여겨야 현실적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검우빈은 한 번도 그들을 혼내거나 구박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꼬박꼬박 존대를 해서 오히려 그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세화 소저.”
“네?”
“힘들죠?”
짧은 한 마디일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건 검우빈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 때문이다.
“히…… 힘들긴요. 네 분 모두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검우빈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기에 세화는 말길을 돌렸다.
“큰주인님께서는 어쩌다가 혈풍사…… 아니, 항주사선의 사형이 되신 거예요?”
“그건 지금 말해 주기 곤란해요. 특별한 비밀은 아닌데 그래도 얘기를 하려면 사제들의 동의는 얻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사제들은 제 가족이에요. 고아인 내게 하늘이 내려 주신 유일한 축복 같은 거죠. 헤헤!”
마지막 그 웃음이 왠지 슬퍼 보였다.
“세화 소저는 가족이 어떻게 되세요?”
“양친 모두 돌아가셨어요.”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서.”
“아니에요. 그다지 가족 같지도 않았는걸요.”
“세화 소저는 예뻐서 사랑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사랑이라…….’
옛일의 단편을 떠올리는 세화의 눈이 아련해졌다.
“사랑보다는 미움을 많이 받았죠. 부잣집에서 태어난 서녀의 어쩔 수 없는 굴레 같은 거예요.”
누구에게도 한 적 없고 할 생각도 없었던 과거가 이상할 정도로 술술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셨지만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부잣집 주인의 첩으로 들어간 여인네의 흔한 얘기죠. 본처와 그 자식들의 구박 속에서 살다가 제 나이 열여섯 살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구박이 고스란히 제게 이어졌고 보다 못한 아버지가 절 분가시키셨죠. 그래도 부잣집이라 재물은 제법 많이 들고 나왔어요. 어렸을 때부터 시금서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쩌다 예기에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고 결국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거죠.”
술 한 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른 예기에 비하면 전 꽃길만 걸은 거죠. 가진 돈이 많아서 싫은 손님은 안 받아도 되었고, 얼굴 반반해서 찾는 손님은 많았으니까요. 몇 년 지나니 강서제일기라는 이름이 떡하니 붙어 있더라고요.”
“웃음 파는 길에 꽃길이 어디 있겠어요. 세화 소저의 발은 아마 상처투성이일 텐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위로라는 걸 받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조차 참으라는 말만 구관조처럼 뱉어 냈을 뿐이다.
난생처음 받는 위로는, 그래서 그녀의 감정을 목까지 끌어 올려 끝내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세화가 눈물을 펑펑 흘리는 사이 검우빈은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켜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세화는 열 살 검우빈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    *    *
“거참, 공사 시작한 지 한 달이나 되었는데 이제 겨우 지붕 올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도평수의 투덜거림에 연금홍이 핀잔을 줬다.
“규모를 봐라, 규모를. 저 넓은 정원에 연못도 있고 방이 쉰 칸이나 되는데 한 달 만에 지어지겠냐?”
“그러게 왜 쓸데없는 공간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 방이 쉰 개나 돼서 뭐하게?”
“사형께서 고금제일인이 되실 텐데 그 정도 규모는 되어야지.”
“흐음…… 하긴 그러네.”
도평수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래, 기왕 이렇게 크게 짓는 김에 문파나 하나 만들까?”
“좋지. 관리는 네가 해라.”
“관리? 무슨 관리?”
“문주는 사형께서 하신다고 치고 아래로 어린놈들 줄줄이 들어올 텐데, 그냥 놔두리?”
도평수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누군가 하겠지. 내가 그런 귀찮은 걸 어떻게 하냐?”
“무대책이 대책인 것 같으니라고. 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술이나 만들어. 뭐만 했다 하면 사고고 입만 열었다 하면 실수니까.”
도평수가 버럭 하려는데 서석산이 그들을 불렀다.
“사형께서 찾으신다!”
검우빈이 찾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서 반각이 지나기 전에 검우빈 앞에 앉았다.
“사형, 무슨 일이에요?”
“강서삼악과 세화 소저에 관해서 의논할 게 있어서요.”
“항주사변에 대해서요?”
개똥, 소똥, 말똥에 새똥까지 있으니 항주사변이라는 별호는 지극히 적절했다.
도평수가 물었다.
“그놈들이 사형께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내 이것들 다리몽둥이를 그냥!”
검우빈이 지레 흥분하는 도평수를 진정시켰다.
“아니에요. 그분들께 일을 좀 가르쳐 주는 게 어떨까 해서요.”
“일을 가르치다니요?”
“새로운 곳으로 이사 가면 사기주 생산량도 늘려야 하니 사제들이 바빠지잖아요.”
도평수가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그놈들 제대로 굴릴 테니까요.”
‘반드시 도망치게!’라는 말은 속으로만 했다.
“그들에게 사기주 만드는 법을 가르치면 사제들도 좀 편하지 않을까 해서요.”
그건 검우빈 말이 맞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의 손을 거쳐야 하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연금홍이 말했다.
“알겠어요. 이제부터 제대로 된 일꾼을 만들어 볼게요.”
*    *    *
장원이 완성되었다.
검우빈과 혈풍사자는 장원의 이름을 오선장원으로 지었다. 항주사선과 소주선으로 불리니 적당한 이름이었다.
그들이 서석산이 쓴 현판을 올리며 기뻐하는 사이 강서삼악과 세화는 장원을 둘러보며 깊은 절망에 빠졌다.
“너…… 무슨 마음으로 장원을 이리 크게 지은 것이냐?”
오통수의 그런 물음이 세화에게 향한 건 당연했다.
그녀가 설계에서부터 시공까지 할 사람을 골랐고, 전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이다.
“혈풍사자 돈이나 펑펑 쓰게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