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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네 입술에 닿은 내 이름
2. 나의, 너의 지난 밤
3. 그저 어제처럼, 오늘처럼
4. 그의 말이 맞았다
5. 한 사람밖에, 오직 그밖에
6. 태건아, 위태건
7. 지겹지, 않아
8. 여기까지만
9. 너와 함께한 모든 밤의 의미
10. 나를 좀 내버려 둬
1. 네 입술에 닿은 내 이름
도로 길이 4.2km, 왕복 10차로 위 빽빽하게 선 차들이 멈춘 듯 늘어서 있다.
그 양옆으로 초고층 빌딩들이 우뚝 서 있고, 빌딩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주홍빛 석양으로 물들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느라 바쁜 시간, 하루가 곧 저무는 것도 모르고 WI인베스트먼트 사옥 21층 회의실엔 괜스레 숨이 막히는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와이엔테크 누가 투자 후보 리스트에 올렸습니까? 이런 것도 스타트업이라고.”
WI인베스트먼트 직원들은 시종일관 나른하면서도 서늘한 어조로 회의를 이끄는 한 사람, 위태건을 응시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웨이브 진 머리 사이로 보이는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피로감이 짙은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사람을 끄는 얼굴이었다.
한 번 보면 계속 보게 되는 얼굴이었고.
통창으로 흘러들어 온 노을빛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치는 그를 그윽하게 비췄다.
“……일정 급하게 잡혔다고, 다들 이러깁니까?”
직원들은 누구 하나 대답하지 못하고 애꿎은 서류들만 뒤척이며 안절부절못했다.
갑작스레 당겨 잡게 된 스타트업 투자 대회 참가 업체들 리스트를 검토하는 회의였다.
WI인베스트먼트가 주최하는 투자 대회의 결과를 떠나, 이 대회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타트업에겐 거물급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태건은 참여 업체 선정에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
기존 플랫폼을 은근히 카피하고, 안에는 흔해 빠진 것들만 넣어 두고 새것인 양 구는 허접한 기술에 투자를 하자고?
다들 초심을 잃었지.
우리 WI인베스트먼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들 살 만하다고 일 대충 하는 건가.
태건은 돌연 PPT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직원들은 그의 칼날 같은 눈빛에 지레 겁을 먹고 슬금슬금 몸을 움츠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 대표님, 제가 보니까 나름 신선한 부분…….”
기획팀 차 팀장이 손을 들고 일어나다 태건의 가만히 앉으라는 손시늉에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어느 지점이 신선할까. 얘가 갓 잡아 올린 생선도 아니고. 아니, 그런 거라면 회 쳐 먹기라도 하지, 어디 맛볼 데가 한 군데도 없던데.”
그의 섬뜩하고도 나른한 음성이 회의실에 번졌다.
“대표님, 그게.”
또다시 차 팀장이 제 자리에서 들썩거렸다.
“누구 작품입니까, 차 팀장님? 뭐 이쪽이랑 오간 얘기가 있었나.”
“그게 아니라…….”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 온 우리 회사 이미지 바닥 치는 거 보고 싶어서 이러나 본데, 다들.”
“아닙니다, 대표님.”
“아니야? 그럼 뭔데요. 누구라도 제대로 얘기해 보시든가요. 이미 뒤에 대기업이 떡하니 받쳐 주고 있고, 이미지만 가져가려는 게 빤히 보이는 스타트업에 우리가 왜 투자를 해야 하는지.”
차 팀장을 비롯해 회의에 참석한 직원 모두 우물쭈물하고 있자 태건은 눈썹을 비뚜름하게 떴다.
“이 리스트는 없던 걸로 하고, 내일 다시 회의하죠.”
여기저기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오는 것을 뒤로하고, 태건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자태였다.
게다가 눈빛은 어찌나 형형한지.
앉아 있는 사람들이 그를 올려다보다 쉬쉬하며 그의 차가운 시선을 피했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회의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이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채 비서, 테크니온 이 대표한테 연락해. 좀 보자고.”
태건은 서이를 보지도 앉은 채 가지고 있는 서류를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
“네, 대표님.”
서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시하는 태건의 곁에 서서 간결하게 대답했다.
집무실로 향하는 태건의 걸음이 무거웠다.
서이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요 며칠 태건은 꽤나 예민했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
태건이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본 서이는 제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을 들었다.
테크니온 이 대표의 비서 번호를 찾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휴대폰 액정 화면이 바뀌고 ‘이 여사님’이라는 글자가 떴다. 태건의 모친이었다.
서이는 목을 큼 가다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사모님, 접니다.”
-채 비서.
“네, 말씀하십시오.”
-태건이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다짜고짜 태건이 만나는 여자가 있냐니 서이는 좀 당황스러워 살짝 미간을 좁혔다 폈다.
“아, ……제가 아는 바로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채 비서가 모르면 말 다 했지, 뭐. 아니 걔는 대체 왜 그러고 살아? 창창한 나이에 일에만 파묻혀서 살아서 어쩌려고 그런대? 내가 정말 속이 터져서.
이 여사의 말에 대꾸할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어 서이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채 비서도 그래. 일 좀 적당히 하라고 조언이라도 좀 해. 둘 다 일 못 해서 죽은 귀신 붙었어? 태건이 업무 좀 슬렁슬렁 잡아. 좀.
“네, 사모님.”
-그리고 태건이 오늘 퇴근하는 길에 집에 좀 들르라고 그래.
“그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사모님.”
-그게 무슨 소리야, 채 비서? 지금 내 얘기 듣고도 이렇게 깐깐하게 나올 거야?
“대표님 일정이 아직 남아 있어서요.”
-하, 취소해.
“사모님.”
-시간이 몇 신데 또 미팅이야? 무슨 일 있어도 오늘은 꼭 태건이 데려와. 내 말 알겠어?
서이는 곤란한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태건이 집에 안 오면 나 더는 채 비서 안 본다? 태건이 비서 하고 싶어서 줄 선 사람들 한둘 아닌 거 알지? 채 비서는 공채다 아니다 말 많은 것도 알고?
서이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든 채로 고개를 숙였다.
“압니다, 사모님.”
통화를 할 때마다 꺼내는데 어떻게 모를까.
이 여사의 이야기에 서이의 가슴은 영 답답해졌다.
-그거 다 알면서도 내가 가만히 있는 건, 위태건 대단한 성질 지금까지 다 받아 주고, 주제넘는 짓 안 하고 똑 부러지게 일해 온 채 비서의 노고도 있고, 뭐, 회장님이랑 채 비서 부친 채 실장님이 각별했으니까. 내가 그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 여사는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6년이면 많이 했지 뭐. 아무튼, 오늘 태건이 꼭 데리고 와. 채 비서 자른다는 내 말 빈말 아니니까? 어떻게든.
꽤나 위협적인 말과 함께 툭 통화가 끊겼다.
서이는 그간 이런 말을 안 했다는 이 여사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여사는 틈만 나면 공채 출신 이야기를 거들먹거렸다.
사실 그녀뿐 아니었다. WI그룹 직원 누구든 취준생들이 선호하는 1위 기업 WI인베스트먼트에 특채로 입사한 서이를 곱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서이는 그녀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그들에게 일일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꺼내 봤자 마음만 아픈 일이 될 거고, 그 일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는 건 더 싫었다.
어쨌든 입사 이래 공채 직원보다 훨씬 능력 있는 특채 직원이 되기 위해 애써 왔었다.
덕분에 낙하산이라며 색안경을 끼며 보던 사람들도 이제는 잠잠해졌고,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는데 이 여사는 여전히 그 이야기를 거들먹거렸다.
……속상하게.
“사모님?”
비서실장 최한은 서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
서이는 그를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대표님 본가에 오라시지?”
“그러시네요.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강하게 나오시네요.”
“가뜩이나 대표님 신경 쓸 일도 많으신데, 왜 자꾸 간섭 못 해서 안달이신지.”
“그러게요.”
서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뜩하냐. 후, 내가 말씀드려 봐?”
“아니에요, 실장님.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잘 말씀드려 봐. ……고생해, 채 비서.”
“네.”
서이는 뭐 어떻게 도와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최 실장을 향해 샐쭉 웃어 보인 후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 있는 위태건이 제 말을 순순히 들어줄까 정말로 걱정이 앞섰다.
위씨 집안에 이 여사의 입김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 않았다.
좀 전에 그녀가 한 말이 서이의 귓가에 어지럽게 떠돌았다.
[-오늘 태건이 집에 안 오면 나 더는 채 비서 안 본다?]
일을 그만두게 되면 뭐 어디든 취직하는 일이야 어렵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그렇게 되면 위태건을 볼 수 없으니까.
그건 아무래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 * *
WI인베스트먼트에 입사한 이래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6년을 꼬박 태건의 곁에서 일했다.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저 흐린 미소로 대답하는 일은 아주 일상적이고 익숙한 일이었다.
그만큼 위태건을 보좌하는 일은 참으로 혹독하고, 힘겨운 일이었으나, 6년을 하루같이 일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위태건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사실은 언제까지나 혼자 간직한 비밀이었다.
꽤나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 곁에 다른 비서가 서 있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태건을 데리고 본가에 가야 했다.
서이는 옷매무새를 살핀 뒤 큼큼 목을 가다듬고 대표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소리에 서이는 문을 살짝 열었다.
그녀는 6년간 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문을 열고 그를 향해 걸었다.
지겨울 만큼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매번 가슴이 뛰었다.
특히 저렇게 창 너머 해가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어스름한 시간 가만히 일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는 더욱.
단정한 머리, 깨끗한 피부에 짙은 눈썹과 크고 깊으며 생기가 도는 눈, 깎아지른 듯 날렵하고 오뚝한 콧날, 이 모든 것에 딱 맞는 근사한 입매.
무언가에 몰두하느라 찌푸린 이맛살, 이마를 톡톡 치는 손가락까지 어느 하나 그녀의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이 없었다.
수려한 외모뿐 아니라 그에게서 풍기는 차가우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그윽하게 느껴지는 분위기 또한 매일 보고, 겪어도 질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