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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생
5권
낯선잠 장편소설
동창생 5권
동거인
이사하는 날,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아주 이른 봄비였다. 주인 할머니는 이사하는 날 비가 오면 이사 가는 곳에서 잘 살 징조라면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몇 달도 아니고 몇 년을 지냈던 옥탑방을 떠나려니 마음이 영 싱숭생숭했다. 진구는 아랫집 창가에 붙어 할머니네 고양이와 나름의 작별 인사를 나누는 듯 보였다.
얼마 안 되는 단출한 살림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소형트럭 짐칸이 가득 찰 정도는 되었다. 옥상 아래로 트럭 운전기사가 옮긴 짐들을 체크하고 짐칸 문을 걸어 닫는 게 보였다. 이제는 정말 떠날 때였다.
텅 빈 옥탑방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날씨가 춥진 않았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려 어린애가 감기라도 걸릴까 더욱 꽁꽁 싸매 놨더니 점퍼 후드 위로 동그란 얼굴만 내놓은 진구의 모습이 꼭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같았다.
“우리 트럭 타고 가능 거야? 이사?”
“응. 우리 이제 가는 거야.”
진구가 그제야 살림살이들이 빠져나간 집을 신기한 듯이 둘러보았다.
“옥탑방 안녀엉, 해.”
진구가 쑥스러운지 내 등 뒤로 돌아갔다. 그 작은 손을 다시 앞으로 당겨 아이의 몸을 끌어안고 내가 먼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옥탑방, 안녕. 그동안 재밌었어.”
그리고 진구를 돌아보자, 진구가 혀를 살짝 내밀며 웃었다. 너무 싸매 놔서 조금 더운지 볼이 발그레한 것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진구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눈을 반짝이며 방을 쳐다봤다.
“옥타… 어, 옥탁빵아, 안녀엉. 어어, 우리 재밌게 해 조서 고마어. 다음에 다시 놀러 오 꺼야.”
“잘 있어.”
“잘 이써어.”
나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 바짓자락을 잡고 안겨 오는 진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비를 맞은 축축한 패딩의 촉감이 손바닥에 미끄럽게 스몄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진구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게 개어 있었다.
결코 좋았던 추억들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가장 힘들 때가 아니라 힘든 일을 극복해 내고 그 뒤에 즐거운 추억까지 더 만들고 나서 떠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무엇보다 진구에게 이곳에서의 생활이 재밌었던 기억으로 남았단 것이 내 마음을 벅차게 했다. 사실 그것만이 내가 이 집에서 이루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했었다.
나는 오늘 처음 본 이삿짐 트럭 아저씨의 옆자리에 앉아 서울로 향했다. 업체 직원은 아니고 주인 할머니가 소개해 준 아저씨였다. 업체를 쓰면 비싸고 짐도 적으니 큰 차도 필요 없을 거라며 연결해 준 것이었다.
말이 없는 아저씨와 나 그리고 그 사이에 진구가 앉았다. 진구는 일반 승용차와는 다른 높이의 차에, 그것도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은 상황이 새롭고 재밌는지 또 발을 동동 구르며 정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행히 긴 이동시간도 잘 견뎌 줄 듯했다.
-어, 그래. 이제 가나?
“네. 짐 다 실었고요. 가는 중이에요.”
-그래, 뭐. 알아서 다 잘 챙겼겠지.
기분 탓인지 늘 무미건조했던 지물포 사장님의 목소리에 드물게도 쓸쓸함이 배어 있는 듯했다. 철없게도 그게 왠지 행복했다. 사장님은 짧은 통화 마지막에 가면 언제 오냐고 물었고, 나는 다음 주에 한 번 내려오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장님의 목소리도 다시 평소 때로 돌아갔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잠시 뜸을 들였다. 오히려 지물포 사장님에게 전화할 때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마침내 전화를 받는 기척이 났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엄마, 전데요. 저희 지금 서울로 출발해요.”
-……어, 그래.
방금 전 통화와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에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전보다 어느 정도 엄마라는 사람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에 올 건데, 그때 집에 있으라고요. 딴 데 가지 말고.”
-알았어.
“커피랑 과자 그거 단 거 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 담배도 너무 많이 피우지 말고요. 그리고 잠도 웬만하면 낮에 말고 밤에 제때 자요. 햇빛을 봐야지, 사람이.”
-으유, 잔소리할 거면 끊어.
왠지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한 무의식중의 방어기제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잘 지내라는 말 대신에 다음 주에 엄마 집으로 가겠단 말을 다시 강조해 남기고 통화를 끝냈다.
꼭 사춘기 딸처럼 느껴졌다. 기분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이고 눈치는 보이지만 잔소리하고 참견은 또 하고 싶은.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고는 싶은데 위험한 건 미리 막아 주고 싶은, 그런 기분.
정말 엄마와 아들이 아니라 아빠와 딸로 태어났어야 하는 그런 관계인 모양이었다. 옆에서 ‘함머니, 함머니’ 하던 진구는 자기를 안 바꿔 줬다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미안, 가서 도착해서는 그럼 진구가 전화해.”
그러면서 애가 볼이 원래 이렇게까지 빵빵했나 쳐다보다가 그때까지 계속 조여 있던 후드 매듭을 그제야 발견하고 풀어 주었다. 그러자 진구의 얼굴 상태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진구는 금세 삐졌던 것도 잊고 나를 보고 웃어 줬다. 그리고 옆에 아저씨도 한 번 올려다보고 눈앞에 펼쳐진 낯선 도로의 광경들에 이내 시선을 빼앗겼다.
고속도로로 진입하니 실감이 났다. 우리가 정말로 여태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실감이.

* * *
“예?”
“아니, 어떻게 오셨냐고요? 우리는 이사 들어올 집이 없는데?”
“저희 저번 주에 와서 이미 계약이랑 다 했는…….”
순간 나는 이 건물의 주인인 것처럼 나를 의심스레 쳐다보고 있는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안경 쓴 여인이 처음 보는 얼굴임을 상기했다. 그날 이모와 함께 만났던 주인은 칠십은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 노인이었다.
“누구랑요? 누구랑 계약을 하셨었는데요?”
“그때 여기 주인 할아버지분이랑…….”
“네? 할아버지요? 여기는 저 혼자 관리하는 건물인데?”
진구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서 나와 낯선 여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삿짐 아저씨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난처한 듯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 곁에 막 안으로 들이려던 우리 집 이사 박스가 우두커니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때 계단을 울리며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대뜸 이사 아저씨에게 먼저 말을 거는 그 들뜬 목소리는 이모가 분명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 오는 집 거 맞죠?”
아저씨는 난처한 듯이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리며 인사를 받았다. 곧 모습을 드러낸 이모가 나와 진구를 발견하고 화색을 보이려다 순간 멈칫했다. 그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고 이모의 눈이 다시 부드럽게 휘었다. 그 여자가 이모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하는 게 그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아는 사이는 맞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네. 아이구, 이뻐졌다.”
“네.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지. 근데 오늘은 아버지는 안 계시나 봐? 딸내미가 나와 있네? 저기 무슨 아파트에 나가 산다더니, 얼굴 보니 반갑다.”
“네, 뭐 여기 관리하러 그래도 주에 한 번씩은 오니까요. 근데, 아버지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말을 마친 여자의 안경 속 눈이 순간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고는 이내 구겨진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허공에 한숨을 뱉어 냈다. 냉철해 보이던 얼굴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녀가 진구를 향해 손을 뻗는 이모와 나를 얼른 번갈아 보고는 뭔가를 파악한 듯했다.
“설마 저희 아버지랑 계약하신 거예요?”
“그랬지. 아버지가 그날 여기 집 앞에 먼저 나와 계시더만.”
“근데 저희는 여기 집 내놓은 적이 없는데. 부동산에도 말씀드렸고, 앞에 전화번호도 옛날에 다 뗐고요.”
“이그, 무슨 소리야? 내가 저번에 집 보러 다닐 때 지나가다 아저씨 만나서 이제는 세 안 내놓냐고 물으니까 아저씨가 아, 남는 방 하나 있다고, 3층에 있다고 하면서 당장 보여 줬는데. 그래서 내가 그날에도 집 보고, 또 그다음에 여기 조카랑도 같이 와서 또 보고 한 다음에 계약한 건데. 아버지한테 전화해 봐. ……바빠서 몰랐구나? 그때 계약금도 걸었고, 또 아침에 좀 전에 내가 여기 오면서 벌써 보증금 잔금 다 치렀어.”
“네? 돈을요? 저희 아버지한테 돈 보내셨어요?”
그때쯤 이모의 얼굴이 얼어붙더니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이삿짐 아저씨부터 돌아봤다.
“정말 죄송한데, 짐 옮기지 마시고 잠깐 쉬고 계시면 안 될까요? 제가 여기 얘기 좀 알아본 다음에 금방 연락드릴게요.”
아저씨가 진구를 한번 내려다봤다. 뭔가 상황이 꼬인 것 같은데 어린애가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니 마음이 쓰인 모양이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아저씨는 곧 들고 왔던 짐을 다시 들고 트럭으로 갔다.
나는 좀 전부터 진구가 불안한 듯이 자꾸 손을 잡아당기던 걸 떠올리고 진구를 안아 들었다.
“아빠, 우리 왜 이사 안 해?”
“어? 아니야. 할 거야. 할 건데, 잠깐 얘기 좀 하고 하려고. 괜찮아. 괜찮아.”
분위기가 얼어붙은 걸 알고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아이의 등을 반복해 쓸어내렸다. 오는 동안 비는 그쳤지만 하늘이 온통 흐린 하루는 여전히 지속 중이었다.
“아아, 아줌마아…… 저희 아빠 저희랑 안 산다고요. 그 사람 이제 아빠 아니라고요. 아, 하아아, 미치겠네. 진짜.”
내내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던 여자가 갑자기 아이처럼 계단에 주저앉아 버렸다. 안경을 밀어 올리고 눈을 비비는 그 손길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녀에게 다가서는 이모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날 분명히…… 엄마는, 엄마는 어디 계셔? 안 되겠다. 아줌마가 엄마랑 얘기할 테니까…….”
“엄마 지금 동생 집 가 있어요. 아빠랑 분리시켜 놓는다고 언니랑 저랑 지금 안 알려 주고 이혼 통보만 보내서 아빠가 그거 때문에 따지려고 여기 왔다 갔다 했던 건데…….”
“대체 그게 무슨… 아니, 아버지가 그날 분명히…….”
“아버지 아니라고요, 처자식 놔두고 평생 딴집살림 해 온 게 그게 아버지냐고요. 오죽했으면 엄마 대신해서 자식들이 나서서 부모를 이혼시키겠어요. 평생 돈 한 푼 벌어 온 적도 없고 우리 외갓집 돈 빼 쓰면서 밖으로만 돌아 놓고 이제는 엄마 재산 때문에 이혼 못 한다고 버티고 있고…… 그거 아빠 아니에요, 저희한테는. 지금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요.”
“어머… 어머……. 아니… 나는, 어머 세상에…….”
허망한 얼굴로 내 쪽을 향해 선 이모는 차마 얼굴을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답답한 듯 자기 가슴에 얹은 손을 움켜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모, 이모. 괜찮아요. 괜찮아요. 집은 다시 구하면 되고, 그거 그 아저씨한테 돈 보낸 거 그거 기록이랑 우리 계약서랑 다 있잖아요. 그걸로 일단 신고부터 하고…….”
이모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다시 그 여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집은, 여기 방은 있는 거지? 그럼 우선 여기 짐부터 옮기고…… 아줌마가 다시 돈 줄게. 돈 다시 아줌마가 낼 테니까…….”
“이모! 아니에요, 그러지 마요. 이모.”
처음에 말했던 할머니와 이모가 함께 모은 적금은 이미 가게 자리를 얻는 비용으로 몽땅 사용한 뒤였다. 그리고 이 집의 보증금은 이모가 꼭 해 주고 싶다며 무리를 해서 또 보증금의 절반을 보태 준 것이었다. 안 그래도 빠듯한 형편에 나를 도와주고 싶어 최대한으로 보태 준 것이 눈에 훤한데 다시 그 돈을 구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여기 지금 비어 있는 데도 없어요. 3층이면 투룸 거긴데 거기 이미 한참 전에 계약해서 저번 주부터는 사람들 들어와서 아예 살고 있어요. 아 왜, 왜 전화를 안 하셨어요. 저 아시잖아요. 제가 여기 관리해 온 거. 그리고 저랑 저번 주에도 보고 그 전부터 많이 봤잖아요.”
“아니, 나는…… 아는데… 아는데, 근데 그때 아저씨가 너무…… 너무 막 웃으면서, 다 해 준다고 하고…… 애기 있는 것도 편의 다 봐준다고, 또 우리 조카라고 하니까 자기가 그러면 앞으로 더 더 특별히 신경 써 준다고…….”
이모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번 주에 여자를 봤다는 건, 그저 확인 전화 한 통만 했어도 아니면 그때 계약에 관해 운이라도 뗐으면 오늘 거액의 잔금을 치르는 실수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위치도 그렇고 가격에 비해 유독 깔끔하고 넓고 좋아 보이던 집. 내가 아니었다면 이모가 그런 실수를 범했을까?
이모는 오직 나에게 너무 잘해 주고 싶은 마음에 정작 살펴봐야 할 것들을 못 살펴본 것이었다. 나는 그날 나에게 미리 봐 둔 집이라면서 여기로 안내해 주던 이모의 그 설레하던 눈빛을 기억한다. 이모가 바보라서 이런 일을 당한 게 아니라, 다른 마음이 너무 앞서 있었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이다. 그러니 이건 이모를 탓할 수 없었다.
“이모. 이모, 괜찮아요. 요새는 그런 거 금방 잡아요.”
나는 확실치도 않은 허세를 늘어놓으며 여자의 앞에 우두커니 고개 숙이고 서 있는 이모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모가 반을 보탰으니 날아간 돈의 또 다른 절반은 내 돈이었다. 하지만 돈으로 인한 손해보다 그저 일이 이렇게 된 데 대한 속상함이 더 컸다.
이렇게 사람이 작아질 수가 있을까. 예전에는 그래도 보기 좋을 정도의 체격에 화사한 미소로 그 시끄러운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마주하는 사람마다 밝게 비춰 주던 사람이었는데,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어깨가 너무 가냘프고 약해 보였다. 파마가 풀린 머리카락 한 가닥이 처량하게 그런 이모의 목덜미에 내려와 있었다.
“이모가, 너를 볼 면목이 없다. 정말.”
한참 뒤에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이모는 그 말을 겨우겨우 뱉어 냈다. 듣는 나도 동시에 목이 콱 막혀 버릴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경찰서에 신고를 접수하고 우리는 일단 이모의 만두가게로 향했다. 이사 아저씨도 함께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오늘 와서 시간 보내고 공 친 거 다 지불해 드리겠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어차피 날도 궂은 데다가 이거 하나밖에는 일 들어온 게 없었다며 사양했다. 친절하지는 않은데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사람이었다. 그 곁에서 이모가 그럼 식사라도 하자고 해서 다 함께 만두가게로 오게 된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원래 다 알면서도 당하는 게 사기야. 그리고 요새는 금방 다 잡아.”
만두가게 사장님이 축 처진 이모의 얼굴의 한 번 들여다보고 또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모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곁에 앉은 진구의 겉옷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아까 내가 옆집에다가 보쌈을 하나 주문해 놓은 게 있거든? 거기가 테레비에도 나오고 진짜 유명한 집이라. 잠깐만 있어 봐요, 금방 찾아올 테니까. 저기, 여기 애기 먹게 그 요구르트 좀 꺼내 줄래요?”
사장님은 나가면서도 우리 쪽을 챙겨 주고 자리를 떠났다. 이모는 사장님이 나가자마자 마치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종업원을 대신해 자기가 직접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한 줄 꺼내 왔다. 그리고 앞에 하나씩 놔 주고 마지막 한 개는 이모가 직접 빨대를 꽂아서 진구의 입에 대 주었다.
“진구 요구르트 좋아하니?”
“네!”
“대답도 잘하네. 아주 씩씩하구나?”
진구는 씩씩한 걸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이 열심히 요구르트를 마셨다. 이모는 이 속상한 와중에도 진구에게는 한결같이 계속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 안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는 진구 역시 이모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
그리고 이모는 아직도 날 똑바로 보지 못했다. 괜히 일면식도 없었던 이사 아저씨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묻기만 했다.
사장님이 곧 푸짐한 봉투들을 한 짐 가득 들고 돌아와 우리가 앉아 있는 상 위에 올렸다. 보쌈만 가지러 간 줄 알았는데 이 시장 골목에 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다 쓸어 온 건지 금세 상 위로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가만히 남편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이모가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또 주방 쪽으로 향했다.
“먼저 먹고들 있어요.”
“그래, 어서 드세요. 이게 아주 금방 한 거라 맛이 죽여 줘요. 이거 닭강정은 아주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야. 아주 막 줄 서서 사 간다고.”
“애기한테는 매운 거 주지 마요!”
사장님 목소리가 거기까지 들린 건지 이모가 주방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사장님이 당장에 뜨끔한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괜찮아요. 매운 거 잘 먹어요.”
“매운 거 잘 머그는데.”
진구가 내가 주는 젓가락을 받아들며 나를 따라 혼잣말이라기엔 조금 크게 중얼거렸다. 사장님이 “그치?” 하고 웃으며 진구 앞접시에 닭강정을 덜어 주었다. 진구는 온통 낯선 상황에서 제게 낯익은 닭강정이 등장하니 반가운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하는 진구의 말에 금세 만면에 미소를 짓는 사장님의 얼굴이 이제 보니 이모와 닮은 듯도 했다. 여기서 계속 장사를 해 왔으니 나의 어린 시절에 한두 번쯤 마주친 적이 분명 있었을 텐데도 처음엔 영 어렵게만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가 좀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 애기 저거 매울 텐데 간장 양념으로 주지.”
“이 사람아, 매콤한 게 저게 젤루다가 잘나가는 건데.”
“괜찮아요. 진구 매운 거 좋아해요, 잘 먹어요. 닭강정도 원래 좋아하고요.”
“잘 머거요!”
습관처럼 내 말끝을 따라 하는 진구의 입이 벌써 강정 양념 범벅이었다. 이모는 얼른 원래 앉았던 진구의 옆자리로 가 앉으며 내 앞에 작은 뚝배기를 하나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구에게는 포크를 내밀다가 이미 그 손에 젓가락이 들린 것을 보고 웃었다.
“어머, 젓가락질하는구나? 아유, 기특해.”
진구는 그 말에 보란 듯이 이모를 올려다보다가 또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어른들의 칭찬 한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진구가 바빠졌다. 보쌈도 야무지게 쌈 싸 먹고, 사장님이 쥐여 주는 커다란 족발뼈도 옹골지게 뜯어먹었다.
여태까지의 성장 과정이 결코 평탄했다고만은 할 수 없는데도 진구는 마음에 그늘 하나 없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마음 자체가 열려 있는 아이였다. 정확히 그 반대로 닫히고 웅크린 채 자라난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마도 그건 타고나야만 하는 면모 같았다.
다른 건 다 해 준다고 쳐도 그것만큼은 결코 내가 줄 수 없는 부분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애기는 잘 먹는데, 왜 아빠가 이렇게 못 먹어.”
나는 이모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당겨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쉽사리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모가 내 앞에 놓아준 뚝배기 때문이었다.
“이모! 이거 머애요?”
“이거는 계란찜, 아빠가 좋아하던 거야. 진구도 먹어 봐. 이렇게 숟가락으로 살살 떠서 먹어 봐.”
나를 따라 멋대로 이모라고 부르는 진구의 호칭 때문에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이모도 내게서 걱정스러운 시선을 거두어 갔다.
진구는 한입 먹어 보긴 했지만 다른 게 더 맛있는지 금세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진구가 떠먹은 그 작은 한 숟갈만큼의 빈자리가 난 계란찜을 나도 곧 떠먹기 시작했다. 왠지 목이 메는 기분에 맛은 알 수 없었지만 그리운 어딘가로 잠시 돌아온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