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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생
2권
낯선잠 장편소설
동창생 2권
폭우
경찰은 문을 부수거나 창문을 이용한 흔적도 없다면서 아무래도 비밀키를 직접 누르고 침입한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 골목에 비친 낯선 그림자를 떠올렸다. 설마 이 동네에 계속 왔었던 건가. 칠구칠구. 평범하게 우리끼리 흘린 대화를 같은 시간 근거리에서 엿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섬��했다.
그 일 직후 하루에도 몇 번씩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던 베테랑 도배사의 연락이 잠시 끊겼다. 그 끔찍한 부정을 가진 부친이 불리한 상황에서 몸을 사리는 것이 느껴져 역겨웠다.
경찰은 이튿날에도 와서 면식범 같다고 주인집에 그리고 나에게 재차 아는 사람이었는지 혹시 비슷한 누구 떠오르는 사람 없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웃의 다른 집도 탐문하는 듯했다.
나는 그제야 모르쇠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얼핏 봐서 정확하진 않은데 닮은 사람이 있다고 그 덩치에 관해 털어놓았다. 이미 내가 서에 접수했던 폭행 사건에 대해서도 다 알아보고 왔는지 경찰은 곧바로 덩치의 이름을 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자도 보여 줬다.
그러는 사이 진구는 엄마 집에서 이틀, 그리고 윤하 형의 집에서 하루를 재우기로 했다. 안전하지 않은 집에 애를 재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집이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집을 계속 드나들었다. 혼자 빈집으로 돌아와 집 안을 정리하고 버릴 것들을 내놓고 하며 일도 빠지지 않고 계속 다녔다. 졸지에 도배사 두 명이 빠지고 나니 작업량은 늘었지만 내가 더 작업한 양만큼 받을 월급도 느는 셈이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아이를 언제까지 남의 집에만 맡기는 것도 민폐였다. 무엇보다 그 이후로 진구는 나랑 붙어 있고 싶어 했다. 전화하는 횟수도 늘어 툭하면 전화를 걸어 아빠를 찾았다.
“정 맡길 데 없으면 우리 집에라도 맡겨.”
지물포 사장님이 넌지시 말을 꺼냈지만 아픈 아내와 고령의 장모님이 함께 있는 그의 집에 그런 부담을 떠안길 수는 없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제가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러자 더 말하진 않았지만 나를 보는 그 조용한 눈 속에 짠함이 느껴져 나는 괜히 더 의연한 척 웃었다.
주인집 할머니도 잠금장치가 허술했던 것에 책임을 느꼈는지 퇴근해서 보니 집에 잠금장치가 새로 달려 있었다. 그리고 아들이 업체를 불러 감시카메라까지 집 구석구석에 달아 놨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날 바닥에 쏟아져나와 널브러져 있던 것들은 전부 버렸다.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오리 풀장도 다음날 자세히 보니 칼로 북북 찢어 놔서 결국 하는 수 없이 버려야 했다. 자주 사용도 하지 않았던 침대까지 빼 버리니 안 그래도 얼마 없던 집안 살림이 휑해졌다.
나는 마음을 새로 먹고 일 끝나고 진구를 재우고 나서 다시 돌아온 집에 벽지를 전부 뜯어냈다. 살림이 줄어 그나마 손이 덜 갔다. 그리고 혼자 밤을 새워 가며 청소하고 새집처럼 꾸미기 시작했다. 진구에게 이 일이 그냥 무서운 일로 기억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 무서운 일이 한 번 있었지만 우리는 잘 극복하고 거기서 계속 재밌게 살았었어. 이런 식으로 진구와 나중에 다른 집으로 이사 간 뒤에라도 가볍게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몸은 고단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버틸 만했다. 나는 미래의 진구를 생각하며 피곤한 줄도 모르게 그렇게 며칠을 일과 진구, 집을 오가며 옥탑방을 새로 단장했다.
* * *
-뭐…라고?
“거기 호텔에 우리 좀 재워 주면 안 되냐고.”
나는 좀 뻔뻔해지기로 했다. 자식 가진 부모들이 때론 욕을 감수하는 이유를 이제는 좀 알 것도 같았다.
엄마 집은 거기를 드나드는 골초들이며 건달 같은 놈들 때문에 오래 맡기기엔 맘이 불안했고, 윤하 형네는 아무리 형이 괜찮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남이라 내가 미안해서 더 부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윤하 형은 혼자서 호정이 하나도 돌보기 벅차 보였다.
그런 와중에 주말을 앞두고 한지운에게서 연락이 왔던 것이다.
“내가 실은 집에 도배를 새로 했는데, 말리려면 며칠 걸릴 거 같아서. 요새 날씨가 그렇잖아.”
나는 준비한 말을 대사처럼 내뱉었다. 저쪽에서는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공간을 내준다는 건 역시 좀 그런가.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꽤 민감한 영역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를 떠올려 보면 한지운은 그렇게 예민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말이면 하루를 넘겨서까지 나를 데리고 있던 적도 많았었으니까.
갑자기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렇게 억지로 끌려다니며 벗어나기만 바랐었는데 이렇게 내가 먼저 아이를 재워 달라고 부탁을 하는 순간이 오다니.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둘의 과거나 내가 그에게 세워 놓은 마음의 벽들과는 별개로 한지운 자체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이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진구에게 한지운만큼 잘해 준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불편하더라도 오래 알았고 또 진구의 맘이 놓일 수 있는 곳으로, 한지운의 옆을 떠올린 것이다.
“귀찮게 안 할게.”
뻔뻔해지려던 내 목소리는 어느새 간절해져 있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쥐어뜯는데 잠시 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데리러 가면 돼?
고저 없는 말투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순간에 소리 없이 웃었던 것 같다.
* * *
요 며칠 떼가 늘고 잘 웃지 않던 진구가 오랜만에 눈을 반짝였다. 한지운의 차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지운은 차창 너머로 정류장 벤치에 진구를 끌어안고 앉아 있던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왔어?”
“타.”
“응.”
나는 신나게 대답하고 진구를 얼른 차에 태웠다. 몸을 숙여 진구의 몸에 벨트를 채워 주는데 룸미러를 통해 내 얼굴로 한지운의 시선이 은근하게 계속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나도 곧 진구 옆자리에 타서 제대로 벨트를 하고 난 뒤에 얼굴을 한번 쓸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피로 때문에 입술이 또 터져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살이 내린 얼굴에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진했다. 나는 은연중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얼굴을 숨기려 하고 있었다.
“바로 호텔로 가는 거지?”
“뭐 좀 먹고.”
부탁하는 입장으로서 눈치가 보여 절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한지운은 다른 때보다 좀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나는 그냥 기분 탓이려니 했다. 퉁명스러우면 어쩔 거고 아니면 또 내가 뭘 어쩔 건데.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이 있나.
“나는 김밥 머겄는데에.”
“그랬어? 니네 아빠는?”
“어, 우리 아빠는 두우 개, 아니 이러케 세 개 남겨써요.”
오늘은 평소에 만나던 것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저녁 일곱 시를 겨우 넘어서는 중인 이 시간에, 더군다나 아직 금요일인데 한지운이 일은 어쩌고 이렇게 이르게 온 건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걸 물어보기가 그래서 부담이라도 좀 덜자 싶어 나는 미리 진구를 데리고 밥을 해결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머 머거써요?”
“아저씨도 밥 먹었어.”
“근데 왜 또 머거요?”
“어, 누구 좀 먹이게.”
“……징구요?”
한지운이 소리 없이 웃자 진구가 무턱대고 같이 따라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얼굴도 얼마 만에 보는지 새삼 진구의 웃음이 반가웠다. 그러다 룸미러를 통해 넘어오는 시선에 괜히 흠칫해서 다시 차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빠.”
차가 움직이는 걸 느끼며 창밖을 보다가 돌아보니, 진구가 마치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나와 눈길을 주고받으며 배시시 웃었다. 같이 웃어 주자 다시 몸을 바로 해 앞을 향했다.
이번에는 몸을 기울여 목을 빼고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진구의 옆얼굴이, 그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운전하던 한지운이 룸미러로나마 눈을 맞춰 주자 나에게 그랬듯 아이는 손가락을 물고 또 배시시 웃었다.
진구는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리 안전하게 해 주려 다른 곳에 맡긴 거라고는 해도, 큰 소란을 겪은 뒤에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는 게 어린애 입장에서 안 불안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전처럼 주말에 한지운을 만나는 일상이 펼쳐지자 진구는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 안심한 것이다.
뭐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해져 가는 마음을 끌어안고 다시 차창 밖을 내다봤다. 푹푹 찌는 기온임을 절대 알아챌 수 없게, 가로수마다 우거진 녹음이 긴 시간을 버티고 있는 여름 햇빛 아래 그 어느 때보다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 때문에 여기로 잡은 거야?”
한지운이 차갑게 대꾸했다.
“원래 쓰던 데야.”
나란히 놓인 침대 두 개를 보며 의구심이 들었지만 곧 받아들였다. 진구는 크고 넓은 침대가 낯선지 처음에는 침실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TV 화면이 있는 거실로 나와 소파 위를 뛰어다녔다.
“진구야, 일단 씻고.”
다른 때 같으면 실랑이가 좀 있을 법했는데 진구는 한지운을 의식했는지 곧바로 내 손을 잡고 따라왔다.
진구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어른의 관점이 아닌 아이의 관점에서, 진구는 한지운에게 꽤 괜찮은 아이로 보이고 싶어 했다.
짐가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 들고 욕실로 향했다. 처음 와 보는 호텔 욕실은 왠지 공간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겨우 찾아갔던 욕조 앞에서 다시 뒤돌아 나와 밖에 있던 한지운에게 물었다.
“있잖아. 저기에 있는 거, 샴푸 같은 거 써도 되는 거야?”
소파에 구부정하게 턱을 괴고 있던 한지운이 눈만 들어 그런 날 쳐다봤다. 어느새 풀어헤친 그의 소매 아래에서 손목시계가 테이블의 간접조명 빛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시선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조금 길어졌다.
“어. 써.”
그는 조금 피곤한 말투로 그렇게 내뱉고는 이내 눈을 거뒀다. 나는 그 옆모습에도 눈치가 보여 괜히 살금살금 다시 욕조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면서 생각하니, 여태 그와 같이 호텔에 왔던 상대 중 누구도 이런 걸 물어보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방금 전 정적이 뒤늦게 이해됐다.
자꾸만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내 쪽으로 끌어들여 불편하게 만드는 듯해 또 괜히 미안해졌다. 내가 시작한 건 아니라고 해도 결국 이런 관계가 이어짐으로써 손해를 보는 건 한지운인 것이다.
진구는 내가 집에서 하나 챙겨 온 고무 오리를 물에 띄워 주자 환하게 웃었다. 훈기로 발갛게 달아오른 양쪽 볼이 동그랗게 올라가는 걸 보며 나도 덩달아 피로가 싹 풀렸다.
“호텔이 좋긴 좋구나.”
“어, 조키는 조아.”
“니가 뭘 안다고.”
“다 알거등.”
또 힘으로 물속에서 내게 기댄 등을 뒤로 밀어붙이는 진구의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확 걷었다. 재밌다고 키득거리는 아이의 한쪽 볼에 희미하게 패는 인디언 보조개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러자 진구가 내 얼굴로 물을 확 끼얹었다. 까르르르 하고 퍼지는 웃음소리는 덤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소리가 너무 커져 나는 혹시나 밖에서 들릴까 봐 진구를 단속했다.
“조용, 조용. 떠드는 거 아니야.”
“아빠도 떠드능 거 아니야아.”
한숨이 나왔다. 아마 조금만 더 크면 나는 말로는 절대 진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집에서처럼 진구와 나의 머리를 오가며 바쁘게 드라이어를 움직였다. 진구는 그것도 재밌다고 계속 웃었다.
“진구야. 조용.”
“아빠야. 조요옹.”
“으이구, 진짜. 이런 데서는 조용히 하는 거야.”
“이런 데서느은, 어어, 조용하는 거야아.”
머리를 다 말린 뒤 거실을 지나가는데, 진구가 그제야 맨몸이 부끄러운지 내 옆으로 붙어 걸었다. 한지운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침실로 가서 바닥에 있는 가방을 열어 베이비로션과 진구 잠옷을 꺼냈다. 씻기고 로션까지 발라 향긋하고 뽀송해진 진구를 껴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러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나는 다시 거실 쪽으로 나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있잖아. 오른쪽 침대에…… 내가 진구랑 실수로 먼저 누워 버렸는데, 거기 써도 돼?”
탁.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내려놓는 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한지운이 소파 등에 팔을 걸치며 나를 돌아봤다. 쓸어넘겼던 건지 머리가 살짝 헝클어져 이마를 반쯤 가리며 내려왔다.
그의 눈은 내가 아니라 내 허리춤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서늘하던 얼굴에 이내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눕고 싶은 데에 누워.”
그 말을 들은 작은 손이 내 바짓자락을 힘주어 잡았다. 한지운은 나를 따라 몸을 내민 진구에게 대답한 것이다. 내려다보자 진구는 금세 다시 신이 나서 침대 위로 웃으며 달려갔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다가 문득 한지운이 기다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여 멈춰 섰다.
“어디 가게?”
몸을 완전히 내 쪽으로 돌려세운 그가 조금 전과 달리 다시 서늘해진 표정으로 느리게 대꾸했다.
“씻으러.”
주눅이 들어 나는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바쁜 사람처럼 먼저 몸을 돌렸다.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어른들이 절대 남한테 신세 질 일 만들지 말라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막상 휴대폰 본다고 정신없는 진구 옆에 누우니 푹신한 침대가 몸을 녹일 듯이 감싸 왔다. 탈탈대는 선풍기 없이 쾌적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는 넓은 방에서의 밤이 마치 꿈만 같았다. 무엇보다 여기가 진구와 나에게 안전한 장소라는 생각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했다.
다른 건 중요치 않았다. 눈치가 보이면 어떻고, 뻔뻔하게 보이면 어떻고. 그저 진구와 마음 놓고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밤이 주어졌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일단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잠 자알 오겠다.”
요 며칠 제대로 푹 잔 게 언제였는지도 희미했다. 비로소 잠시라도 걱정 없이 눈을 감을 수 있게 됐다.
낯선 샴푸 향이 나는 진구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데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아이러니하다고. 예전의 난 한지운의 곁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웠는데, 지금은 여기가 내게 가장 안전한 공간이니 말이다.
무언가 들풀 같은 것이 턱 밑을 스치는 감각. 덩치에게 이끌려 숲으로 끌려갔던 이후로 깊게 잠드는 게 어려워졌다. 이번에도 또 그 악몽인가. 나는 다시 그 공기가 뜨겁고 잎사귀가 무성한 풀숲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걸까. 혹시라도 풀벌레 소리가 귓가로 달려들까 봐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그런데 턱 밑과 목을 스치는 건 그 가시덤불같이 억센 풀이 아니었다. 강아지풀처럼 살랑대는 감촉이었다. 갑자기 여기가 어딘지 의아해졌다. 꿈에서 어설프게 깨어날 때 느끼는 낯선 감각이 엄습한 것이다.
눈을 뜬 직후는 온통 깜깜했다. 서서히 눈이 어둠에 적응해 가는데 갑자기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아…….”
한지운이었다. 씻고 나온 모습이었다. 갑자기 경기하듯 벌떡 몸을 일으킨 내 모습을 보고도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가 잠옷을 입기 위해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는 모습을 보며 빠르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한지운이 씻으러 간다고 했던 걸 기억해 냈다. 지금 씻고 나왔다는 건 내가 얼마 잠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채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그 잠깐 동안 꽤 곯아떨어졌던 건지 몸이 젖은 솜처럼 나른하게 늘어졌다. 침대가 이렇게 편한 것임을 처음 깨달았다.
나는 내 목 언저리를 베고 자다 내가 일어나는 바람에 옆으로 구른 진구를 다시 제대로 뉘었다. 사라락, 손끝에 감기는 아이 머리카락의 감촉이 꼭 강아지풀 같았다. 꿈속에서 내 턱을 간지럽히던 건 진구의 머리카락이었다.
반대편 침대에 은근한 빛의 조명이 켜지자 방 안이 한층 아늑해졌다. 한지운은 침대 헤드에 기댄 채 패드를 들고 집중하는 듯이 보였다. 안경을 쓴 모습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오늘 휴대폰을 자주 보던 것도 그렇고, 아마 내 호출 때문에 급하게 내려오느라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업무들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때문에 불편하지?”
그는 날 잠깐 돌아보긴 했지만 대답은 그냥 넘겼다. 그러다가 내가 다시 잠들지 않고 자기 쪽을 계속 신경 쓰고 있단 걸 알아챘는지 잠시 후 내 쪽을 다시 돌아봤다.
냉랭하던 얼굴이 늦은 시각 탓인지 왠지 조금 누그러져 보였다.
“자. 피곤하잖아.”
“너는?”
“나도 잘 거야. 잠깐만 보고.”
그러다가 멈칫하더니 “꺼 줄까?” 하고 스탠드를 가리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빛은 아예 어두운 것보다 오히려 잠들기에는 더 적당했다.
조용한 방 안, 쾌적한 공기, 아늑한 잠자리. 그리고 먼저 잠이 든 아이의 규칙적인 숨소리. 진구와 있으니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두려웠던 한지운도 지금은 진구와 나의 아군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도 모르게 스르륵 감겼던 눈을 다시 뜬 것은 통화 소리 때문이었다. 어느새 한지운은 통화를 하고 있었고 방 안은 그 통화 너머의 소리마저 설핏 잠든 내 귓가에 들려올 만큼 고요했다.
-……아까 보낸…… 다 확인해 보셨나요? 전과마다 최대한 자세히. 그 아버지란 사람도 깨끗하진 않네요. 젊었을 때 절도로…… 아주 두 부자가…….
꿈결처럼 아리송한 가운데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전과라는 말이 문득 귀에 걸렸다. 잘못 들은 걸까. 최근 겪은 사건과 말들이 혼재하는 헐거워진 의식 속에서 불쑥 떠오른 말인지도 몰랐다.
눈을 뜨자 한지운은 나를 의식한 건지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것도 그럼 메일로 보내 주시겠습니까. 네, 기록들 전부요. 내일 오전 중으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