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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hapter 21
Chapter 22
Chapter 23
Chapter 24
외전 : His Side of The Story & 그리고 낭만에 관하여
Chapter 21
시퍼런 검광이 시야를 스쳤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글레나는 데클란의 목을 단검으로 찌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영겁처럼 느리게 흐르는 시간. 마주친 파란 눈에 서서히 번지는 경악.
“……컥, 쿨럭…….”
이윽고 데클란이 입으로 피를 쏟았다. 글레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놓쳐 버렸다. 손이,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녀는 침대 위를 벌벌 기어 그에게서 도망쳤다.
우당탕, 실수로 밀친 협탁이 바닥에 쓰러지고 글레나는 카펫 위를 굴렀다. 그녀가 데클란 쪽을 돌아보면서 앉은 채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데클란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다,
“죽어서도…… 너…… 안 놔……. 글레나…….”
피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집념 어린 저주를 퍼붓고는,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아……. 아…….”
글레나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경기 일어난 사람처럼 떨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바로 그 순간, 독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뛰쳐 들어온 사람은 바네사와 위르겐, 그리고 에반우드 공작이었다.
바네사는 글레나가 거의 속옷 차림인 것을 보고 다른 두 사람에게 얼른 눈을 감으라고 신호했다.
그리고 황급히 글레나에게 다가가 동생을 힘껏 끌어안았다.
“글레나, 괜찮아. 이제 괜찮아.”
“아……. 아으윽……. 흐윽……!”
글레나는 바네사의 품속에서 온몸의 수분을 다 쏟을 듯이 울다가 끝내 혼절해 버렸다.
의식을 잃은 동생을 감싸 안은 바네사의 시선이 침대 위로 옮겨 갔다.
데클란이 조용히 피를 쏟으며 죽어 가고 있었다. 즉사는 면한 모양이었지만 곧 과다 출혈로 죽을 터였다.
‘내가 에스칼한테 딱 저렇게 죽을 뻔했는데.’
얼굴을 찡그린 바네사가 글레나를 바로 눕히고 데클란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를 알아본 듯, 새파란 눈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번득거렸다.
“우리 집안 참 막장이야.”
바네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죽음의 문턱에 선 친오빠를 마주한 채로.
“안 그래? 데클란?”
그녀가 손을 뻗어 단검의 손잡이를 그러잡았다.
이대로 검을 뽑으면 데클란은 완전히 끝날 것이다.
바네사는 단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망설였다. 데클란은 반항할 힘조차 없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불규칙한 숨이 까닥까닥 넘어가려 했다.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형형하다. 자신을 사냥한 사냥꾼을 최후의 저주를 담아 노려보는 맹수와도 같았다.
물론, 사냥꾼은 제가 아니었지만. 바네사는 쓰게 웃었다.
“결국 글레나의 손에 죽다니, 촌극이 따로 없네.”
“…….”
“집착하던 상대에게 죽는 기분이 어때? 데클란.”
데클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말을 못 하는 지경인 건지,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 그저 찢어 죽일 듯이 바네사를 노려보기만 했다.
저를 향한 증오로 가득한 눈을 마주하는 바네사의 눈동자가 차분히 침잠했다.
생명의 권능을 써서 데클란을 살릴까. 아니면 죽게 내버려 둘까.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바네사는 점점 창백해져 가는 친오빠를 응시하며 고민에 잠겼다.
지난 과거가 잔상처럼 스친다. 데클란이 저를 아껴 주는 이상적인 오빠였던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냉정하게 돌변한 그가 갑작스레 자신의 혼사를 진행시켰던 때…….
[나더러 테레브론의 폭군과 결혼하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 농담이지? 어떻게 오라버니가 나한테 이래…….]
[……생각이 짧구나, 바네사.]
[내가 뭘―]
[이 국혼은 로엔그린을 위한 일이야. 왕녀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니. 언제까지고 너 좋을 대로만 살 순 없는 법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저를 타박하는 데클란의 쌀쌀맞은 목소리와 한심히 여기는 눈빛.
어떻게 사람이 그토록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데클란은 변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을.
그는 가족과 친구, 최측근들마저 속이며 자신의 본성을 감쪽같이 감춰 왔던 것이다. 언젠가 왕위에 올라 제 야망을 실현할 수 있기만을 꿈꾸며.
잔인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고대로 드러냈더라면, 아버지가 결코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을 테니.
“……오라버니, 나 테레브론에서 너무 힘들었어.”
“…….”
“내가 너였더라면…… 내 동생을 리로이 같은 쓰레기와 강제로 혼인시키는 짓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야.”
“…….”
“이 지경이 되어서도 넌 내게 사과 한마디 건네지 않겠지.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을 테고. 제발 살려 달라고 내게 매달리지도 않을 거야. 그렇지? 데클란. 넌 그런 인간이니까.”
데클란의 파란 눈에 언뜻 조소가 스친 것 같다고, 바네사는 생각했다.
“바깥은 이미 다 정리됐어. 이제 네 편은 없어. 여기서 너만 죽으면 모든 게 깔끔하게 마무리되겠지.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네가 너무 쉽게, 편하게 죽는 게 아닌가 하는.”
“…….”
“심지어 글레나의 손에 죽다니. 너에겐 호상 아닌가? 나나 다른 사람 손에 죽거나 참수형을 당하는 것보단 행복한 결말이잖아. 마음 여린 글레나는 당분간 악몽에 시달릴 테고, 저가 너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고 살 테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클란의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만족스러움이 어린 미소였다.
미친 새끼. 바네사가 신랄하게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꼴을 보니 도리 없이 심사가 뒤틀린다. 역시, 데클란을 이대로 죽게 놔둘 순 없었다.
감옥에서 썩으며, 하루하루 피 말라 가는 고통을― 너도 겪어 봐야 하지 않겠나.
두 눈을 시퍼렇게 빛낸 바네사가 생명의 권능을 끌어올리며 단검을 뽑아내려던 순간이었다.
“……!”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은색 나비가 데클란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멈칫한 바네사가 눈을 크게 떴다.
죽음의 낙인.
데클란이 죽을 운명으로 결정지어진 것이었다.
잠시 굳은 채 있던 바네사가 이내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 명줄도 참 짧네. 살려 놓으려 해도 불가능하겠어.”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단검을 뽑았다. 그 즉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
마침내 끝이 당도했음을 직감한 듯, 데클란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래도 비참한 최후이기는 하네, 오라버니.”
바네사를 응시하는 그의 파란 눈에서 최후의 발악처럼 불꽃이 튀었다. 그 독기를 마주하고도 바네사는 그저 조소할 따름이었다.
“이거 하나는 인정하고 가.”
“…….”
“결국엔 내 승리라는 거.”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데클란이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핏발이 선 눈으로 바네사를 매섭게 노려보던 그는 이내 서서히 죽음에 이르렀다.
어마어마한 양의 선혈로 흠뻑 젖은 침대 위에 엎어진 그의 시선은, 최후에 글레나를 향해 있었다.
* * *
데클란이 숨을 거두자, 죽음의 나비는 그의 이마에서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르시나는 망자를 인도하는 신이기도 하니, 그의 영혼을 거두어 간 것이리라.
마침내 데클란이 세상을 뜬 것에 바네사는 후련하면서도 허탈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하나의 목표를 이룬 후,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아 미래가 공허해진 느낌과 비슷했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제 불행의 원흉이 세상에서 사라지니 몹시도 통쾌한 기분이었다.
로엔그린의 왕위 승계 문제는 에반우드 공과 그를 지지하는 제후들의 몫이니 자신은 손을 뗄 생각이었다.
데클란은 표면상 위르겐에게 참수된 것으로 공표하였고, 글레나와 데클란 사이에 있었던 일은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혔다.
‘이제 글레나를 챙겨 판테온으로 돌아가야지.’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되도록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찜찜한 하나는 사스키아에 대한 것이었다. 데클란이 죽임을 당했는데도 사스키아는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치지 않았다.
역시…… 처음부터 사스키아에게 데클란은 이용하는 패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필그림 궁전터 근처라고 했지…….’
글레나가 사스키아를 목격했다는 장소가…….
바네사는 문득 고개를 돌려 필그림 궁전터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늦기 전에 그곳을 확인해야 할 것만 같은…… 기이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 * *
같은 시각.
회색 인영이 궁전의 지붕 위에 숨어들어 있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사스키아였다. 그녀는 필그림 궁전터에 사람이 접근할 수 없도록 환술을 걸어 둔 후 밖으로 나왔다.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데클란 왕이 죽었군.’
예상한 바였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도주하려는 계획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차피 얼마 못 가 붙잡혔을 것이다.
사스키아의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마구 흩날렸다. 그녀는 드레이크 공작을 곁에 두고 반란 세력과 이야기를 나누는 바네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데클란 왕은 바네사를 제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에스칼 드레이크를 이용해 바네사를 죽이려 했었다.
[제가 당신에게 이 마법을 심어 드리는 대신, 로엔그린의 왕께서는 당신이 바네사 왕녀의 목숨을 끊어 놓길 원하십니다.]
데클란 왕과 약조한 것이 있으니 그 계획을 돕기는 하였으나, 사스키아는 애초에 에스칼이 바네사를 죽이는 데 성공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다만 궁금했을 뿐이다. 바네사가 지닌 비네아의 가호가 어느 정도인지.
‘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해.’
심지어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그릇이었다. ……바네사를 이대로 뒀다간 제 계획이 차질을 빚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리되겠지. 바네사 로엔그린은 나의 주인을 증오하니까…….
‘내가 리로이 님을 부활시키려 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어. 틀림없이 방해하려 할 테지. 그녀에게 들키지 않고 리로이 님을 무사히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다 해도…….’
바네사 로엔그린은 그를 다시 죽음으로 돌려보내려 할 것이었다.
그러니, 리로이 님을 위한다면…… 여기서 그녀를 죽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리로이 님은…….
‘그녀를…… 왕비 전하를 원하실 거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겠지. 내가 그녀를 죽인 것을 알면 크게 노하실 거야…….’
주인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도 않았다. 사스키아는 갈림길에 선 채로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녀의 손끝에 새까만 기운이 넘실거렸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저쪽에선 아직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죽이려면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들키고 나면 기습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으리라.
성가시기 짝이 없는 위르겐 드레이크가…… 광란의 신의 사랑을 받는 남자가 이번에는 절대 빈틈을 보이지 않을 테니까.
‘……왕비 전하를 죽일 수 없다면…… 대신…….’
사스키아의 검은 눈동자가 위르겐의 모습을 담았다. 지금, 저 남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그럼 리로이 님이 부활한 후에, 조금이라도…….
그녀가 모르시나의 권능을 한껏 끌어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웬 고양이 새끼가 지붕 위에 앉아 있나 했는데.”
냉소를 띤 목소리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왔다. 흠칫 놀란 사스키아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선명한 금발에 자수정색 눈. 드레이크 공작의 기사였다. 이름은…… 가르시아였던가.
기사는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와중에도 그의 오른손은 허리춤에 매단 검 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저번부터 계속 생각했는데 말이야, 너.”
사스키아는 그의 말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자부터 죽일지를 고민했다. 이자를 죽이려 힘을 쓰면 지붕 위의 소란을 아래쪽에서 눈치챌 터였다.
어떻게 할까.
죽일까, 아니면…….
“얼굴이 너무 낯이 익어. 자꾸 내가 아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계속 부정하려 해도…….”
자수정색 눈이 언뜻 연약함을 띠었다.
“……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