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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hapter 11
Chapter 12
Chapter 13
Chapter 14
Chapter 15
Chapter 11
바네사는 시민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짐짓 무겁고 나직한 음성을 자아냈다.
“그대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도록 하겠네.”
“왕녀 저하……!”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대번 화색을 띠었지만, 가르시아는 아연실색해 탄식을 터뜨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가르시아를 잠시 돌아본 바네사가 입가에 미소를 덧그렸다.
그 미소는 괜찮다는 말 대신이었다.
“단, 그대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네.”
평소와 달리 묵직하게 힘이 실린 바네사의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 기백에 압도당한 듯이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집중했다.
“활력의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전염병을 피해 갈 수 있는 게 아닐세.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을 낮춰 주는 것뿐이지.”
바네사의 태도가 워낙 단호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그렇지만’으로 시작하는 반론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 사실을 명심하고 신언의 힘을 맹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내 기꺼이 신언을 사용해 주겠네.”
그 말을 끝으로 사람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번져 나갔다. 망설임이 섞인 웅성거림 속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바네사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손을 든 남자가 결연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왕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신언의 힘을 맹신하지 않을 테니, 모쪼록 제 어머니께 신언을 베풀어 주십시오……!”
남자를 시작으로 결심이 선 수많은 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약속하겠다고 외쳐 댔다. 그야말로 혼잡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바네사는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사람들을 저지했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한 사람씩, 질서를 지켜 내 앞에 서도록 하게.”
군중을 통제하는 것은 왕족으로 교육받고 자라온 바네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실려 있었고, 사람들은 홀린 듯 멍하니 줄을 섰다.
그렇게 바네사는 맨 앞에 선 이부터 신언을 사용해 주었다.
“그래, 자네 이름이 뭐지?”
“피, 필립입니다, 왕녀 저하.”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게 자네의 노모였던가?”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
바네사는 어머니와 아들 모두에게 활력의 신언을 사용해 주었다. 모자는 그녀의 너그러움에 크게 감명한 듯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떠나갔다.
이어서 다음 사람의 차례가 되었다. 이번에는 갓난아이를 안고 온 젊은 여자였다. 바네사는 한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래, 자네의 이름은?”
그날 하루 동안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네사에게 활력의 축복을 받아 갔다. 바네사는 그들 모두의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해 두었다.
숙소로 돌아와 그 많은 이의 이름, 사는 곳, 신언을 요구한 사유를 양피지에 꼼꼼히 기록해 두는 바네사를 보며 가르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그 사람들의 얼굴까지 다 외우진 못하셨겠지요.”
“아니? 얼굴까지 다 기억하네만.”
“……정말 경이로운 기억력의 소유자시네요…….”
그랬다. 바네사는 쓸데없거나 흥미롭지 않은 것들을 잊어버리는 데 선수였지만, 필요하다면 확실히 기억해 두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바네사가 여태 살면서 잊어버린 것들은 스스로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니…….
‘라우디에 관한 건…… 정말 나 스스로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요즈음 자신을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의문을 곱씹으며 비네사가 깃펜 끝으로 코를 간질였다.
촛불 세 개로 아득히 밝히고 있을 뿐인 어둑한 공간. 뽀얗게 서리가 낀 창문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흘러들어 왔다. 바네사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문제의 이름을 적어 내렸다.
[RauÐi]
이 이름을 읊조려 보면 가슴 한편에 뻐근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바네사는 위르겐이 꿈결을 헤맸을 때 보여 주었던 다정한 미소를 문득 떠올렸다. 어김없이 밀려오는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분명 자기 자신의 것인데도 이해할 수 없는, 영문 모를 감정…….
‘……이 관계의 해답은 내 잃어버린 기억에 있겠지.’
위르겐, 혹은 라우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이제는, 너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 이상으로…….
* * *
다음 날도 바네사는 진료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신언을 베풀어 주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은 전날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아침부터 신언을 베풀기 시작해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벌써 여섯 시간째였다.
사람이 지칠 만도 하건만, 바네사는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묵묵히, 기계처럼 신언을 읊조릴 뿐이었다.
가르시아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저러다 쓰러지시는 거 아닌가 몰라…….’
제아무리 신의 은총을 받았다 한들 인간의 한계는 명확한 법이었고, 그릇이 버티지 못하면 깨지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바네사는 미묘하게 파리한 안색인 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은 버틸 만한 모양이지만, 이대로 밤까지 수백이 넘는 사람들에게 힘을 쏟아야 한다면 어떨까. 정말로 혼절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 다음…….”
목소리도 점점 힘을 잃는 것 같고.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 결심한 가르시아가 바네사와 군중들 사이를 가르며 멋대로 통보했다.
“자, 여기까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휴식할 테니 세 시쯤 다시 오십시오! 해산!”
“아니, 뭐라고?”
“여섯 시간을 기다렸는데…….”
“왕녀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신데, 왜 기사 양반이 멋대로…….”
당연히 사람들은 불만에 차 반발하거나 가르시아를 뾰족하게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두를 무시하며 바네사를 돌아본 가르시아가 “한 시간만이라도 쉬시지요.” 하고 권유했다.
이럴 필요 없다고 하려던 바네사는 그의 단호한 눈빛에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가르시아가 감싸 안듯 부축해 실내로 데리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군중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긴장이 턱 풀렸다. 동시에 허기가 밀려들었다. 그제야 바네사는 자신이 아주 배고픈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은 식당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숲에서 사냥해 온 토끼로 만든 스튜였다.
고기를 워낙 아꼈기 때문에 입 안에 씹히는 살점은 얼마 없었지만, 주린 배를 든든히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 가르시아, 르네와 함께 방으로 올라왔다. 남은 30분 동안이라도 푹 쉬기 위해서였다.
“나만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미안한데…… 그대들도 각자 방으로 가서 쉬는 게 어떤가?”
침대에 누운 채로 바네사가 가르시아와 르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말없이도 뜻이 통한 듯한 분위기였다. 이내 가르시아가 대표로 나섰다.
“저희가 불편하시다면 복도에 나가 있겠습니다. 성내에서 무슨 일이 생길 리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왕녀 저하를 제대로 호위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참 유난이라 생각하면서도 바네사는 미소를 머금었다. 저 둘이 자신을 호위한다는 게 이제는 말 그대로의 의미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바네사는 더 이상 감시 대상이 아니었다.
“복도에 계속 서 있으면 힘들지 않겠나? 그러지 말고 그대들도 여기 눕게.”
바네사가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권하자, 가르시아가 드물게 정색하며 물었다.
“……진심입니까?”
“농담이네.”
바네사가 킥킥 소리 내어 웃자 가르시아와 르네도 못내 어이없어하며 실소를 흘렸다.
두 사람은 침대에 눕는 대신 나무 의자와 스툴을 가져와 적당한 자리에 두고 앉았다.
바네사는 눈만 깜빡이며 둘을 쳐다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위르겐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예? 글쎄요…….”
반사적으로 대꾸한 가르시아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가 재차 입을 열기 전, 르네가 현답을 내놓았다.
“전염병 대책을 세우느라 바쁘실 겁니다. 만에 하나 전염병이 성외까지 크게 창궐하면 큰일이니까요. 또, 아침마다 군사 훈련을 지도하실 겁니다. 하필 지금이 서리괴물의 침공이 가장 잦을 때라서요.”
“서리괴물…….”
그 단어를 멍하니 중얼거리던 바네사는 불현듯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서리괴물들이 전염병 문제가 해결된 후 침공해 오면 차라리 나을 테지만, 과연 시기가 그렇게 딱 맞아떨어질까?
어쩌면 조만간 위르겐의 출정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왕녀 저하는 서리괴물을 본 적이 없으시겠네요?”
가르시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가볍게 물어 왔다. 바네사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 화가의 그림으로는 본 적이 있지. 실제로도 그렇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이요?”
가르시아는 별 웃기는 소리도 다 듣는다는 듯 목을 젖히며 크게 웃었다. 큭큭, 잔웃음을 흘리며 그가 말했다.
“얼마나 잘 그린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다를 겁니다. 실제로 보실 일도…… 웬만해선 없겠지만요.”
바네사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오래전 보았던 서리괴물의 그림을 떠올렸다.
푸른빛이 감도는 창백한 피부, 흰자위 없이 온통 새빨간 눈의 동공은 세로로 찢어져 있고, 귀는 뾰족하며, 바위도 뚫는 날카롭고 단단한 손톱을 지녔다.
‘그리고…… 키가 2미터나 된다고 했지.’
자신이 서리괴물을 실제로 보게 될 일은 ‘웬만해선’ 없을 테지만, 만일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하고 얼어붙을 것 같았다.
짧은 휴식 시간이 지나고 바네사는 다시 사람들 앞에 섰다.
흡사 피를 뽑히는 도축장의 짐승이 된 기분이었으나 그녀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으므로 묵묵히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바네사에게 축복을 받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의 행렬은 그날 밤늦게까지 길게 이어졌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줄은 밤 열한 시에 가까운 시각이 되어서야 차츰 줄어들었다.
마지막 사람에게 신언을 내려 주고 나니 어느덧 자정이었다. 바네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끝났다, 하고 생각하자마자 긴장이 턱 풀리며 짙은 피로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기운 없이 비틀거리는 바네사를 황급히 다가온 가르시아가 부축해 주었다.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네. 그보다…… 그대들도 계속 곁에 있느라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저희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종일 신언을 쓰시느라 고생하신 왕녀 저하가 더 걱정이지요. 지금 얼굴이 백지장 같으십니다.”
낮게 혀를 찬 가르시아는 “잠시 실례.” 하고 중얼거리더니 바네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녀를 훌쩍 안아 올렸다.
놀란 바네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보자 가르시아가 씩 웃었다.
“이대로 방까지 옮겨 드리겠습니다. 피곤하시겠지만 뜨거운 물에 목욕하시고, 식사도 하고 주무시지요.”
“아니…….”
가르시아의 말에 숨은 의미를 재빠르게 알아챈 르네가 냉큼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식사를 가지러 간 사이, 바네사는 가르시아의 품에 안겨 방까지 올라왔다.
가르시아와 르네가 자신을 잘 챙겨 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극진하게 보살피려 할 줄은 몰랐기에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목욕까지 하느라 새벽 한 시 넘어 잠들었기 때문인지, 다음 날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오늘은 다행히 바네사에게 축복을 받겠답시고 몰려든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총 열여섯 명의 사람에게 신언을 사용해 주고 나서 진료소로 돌아온 바네사는 때마침 희소식을 들었다.
“공작 부인! 제가 드디어 치료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바네사를 보자마자 반색한 제넬리가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바네사는 활짝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치료제가 있다면 전염병이 크게 번져도 걱정할 것 없으니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 후, 제넬리를 비롯한 의료진들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치료제가 듣는 사람이 있고 안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래서는…… 모든 사람이 완치하기는 어렵겠는데요.”
의원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한숨을 쉬었다. 몇 날 며칠을 고생한 그의 얼굴에도 짙은 피로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설마 그사이 전염병이 변이하기라도 한 걸까요? 그럼…… 치료제를 다시 개량하는 수밖에 없는데…….”
거무죽죽한 얼굴인 것은 제넬리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넘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약초 연구와 연금술에 매진하여 치료제를 만들어 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제넬리가 손으로 얼굴을 쓸며 말을 이었다.
“일단, 완치 환자 중에서 재감염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바로 귀가시키지 말아요. 저는 일단 치료제를 좀 더…….”
그때였다. 오른편 복도에서 간호인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일인지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간호인은 제넬리와 의료진 앞에 다다라 다급한 기색으로 말을 쏟아 냈다.
“크, 큰일 났어요! 중증 환자인 로베르 씨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은 일동이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중증 환자실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고통스럽게 기침하며 피를 뱉어 내고 있었다. 의원이 서둘러 노인을 진찰하며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노인을 간병하던 간호인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요, 3분 전부터 기침하는 횟수가 늘어서 기침약과 물을 조금씩 드렸는데, 1분 전부터 갑자기 피까지 토하기 시작하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