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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의 사회성이 죽었습니다 1
지은이｜아칼라
펴낸곳｜루시노블
투고 및 문의 | lucy@sybook.kr
ⓒ아칼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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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리바이
“따라오지 마세요, 대공님. 무릎도 꿇지 마시고요.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대공은 여전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 바네사를 따라오고 있었다.
장원의 밤은 고요했다. 긴 복도에는 달빛만이 어스름했다.
“이해가 잘 안되네요, 바네사 양. 저의 어느 부분이 당신을 그렇게 불편하게 만듭니까?”
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치수도 물어본 적 없는 주제에 매번 꼭 맞는 드레스를 보내오는 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모든 곳에 한발 먼저 가 있는 거?
……집에 불까지 질러 놓고 이유도 말해 주지 않는 거?
바네사는 돌아섰다. 그리고 눈앞의 덩치 큰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례한 짓이란 건 알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황족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도 그럴 게 이 남자의 구애 방식은 뭐랄까, 거의 집착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이 남자. 언제나처럼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린 남자. 온갖 달콤한 말을 속삭이면서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은 남자.
바네사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 부근을 가리켰다.
“우선 그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요.”
대공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져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거기에 좋게 말해 비사교적인 성격까지 가세해, 사교계에선 그를 음침 대공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
그런 모호한 대답과 함께, 대공은 별안간 칼을 뽑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사냥용 칼이었다.
달이 구름에 덮여 사방이 어두워졌다. 움찔, 뒤로 물러서려던 순간.
사각, 사각.
“……?”
잘려 나간 것은 그의 머리카락이었다.
와, 잘못 걸렸다. 대리석 바닥 위로 쏟아지는 머리칼을 보며 바네사는 그만 생각했다.
“바네사 양?”
고개를 들었을 때, 달을 가렸던 구름이 걷혔다.
그를 거절할 이유를 수십 개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바네사는 다른 이유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얼음 호수 같은 눈동자. 다소 권태로워 보이는 눈매와 그린 듯한 콧대. 마지막으로 살짝 비틀린 채 웃고 있는 입술까지.
“……대공님.”
“필리어스라고 불러 주세요, 부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얼어붙을 듯한 눈동자인데 눈빛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움찔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눈이 좀 돌아 있는데…….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지금 막 생각났는데 말이에요. 우리 알고 지낸 지가 꽤 됐잖아요?”
“정확히 두 달 하고도 스무 날이 지났습니다, 바네사 양. 당신과 제가 무도회에서 만난 뒤로요.”
“……그래요. 대공님의 얼굴을 본 건 두 달 하고도 스무 날 만에 처음인 것 같네요.”
대공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유려한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제멋대로 잘린 머리카락이 부스스함에도 무척 우아해 보였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가 아니거든요. 대체 왜 그런 얼굴을 여태껏 가리고 다녔던 건데요?”
“마음에 드시나요?”
“네?”
“제 얼굴이, 바네사 양 마음에 드나요?”
“……그런 질문에 답했다간 어느 쪽이든 무례하게 들릴 것 같은데요.”
“제 바보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게 무례라면 전 당신의 무례함을 좋아하는 것 같네요.”
바네사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남자 앞에선 포커페이스도 소용이 없었다. 무슨 표정을 짓든 아랑곳하지 않고 부딪혀 오니.
“제가 들은 말 중에 제일 무례한 칭찬인데요.”
“그럼 정정하겠습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바네사 양. 당신의 무례함이 아니라.”
바네사는 결국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이미 한 번 끔찍하게 죽었다. 두 번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선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든 예측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정신 나간 대공은 존재 자체가 변수였다.
“죄송하지만 대공님, 그 마음은 혼자 간직해 주셔야 할 것 같네요. 대공님은 지금 저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바네사 양에게 필요한 건 어떤 사람입니까?”
역시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물었다.
“사람 죽여 본 적 있어요?”
“네, 바네사 양.”
즉답에 바네사는 눈을 굴렸다.
“그렇겠죠. 제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니까. 하지만 제가 지금 말하는 건 사사로운 살인이에요, 대공님. 한 사람을 위해서, 개인적인 복수를 한 적이 있으세요?”
대공은 조금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없는 것 같네요.”
“그것 보세요.”
바네사는 돌아서려 했다.
“더 물으실 게 있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말소리에 바네사는 발걸음을 멈췄다. 대공은 어느새 등 뒤에까지 다가서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죽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죠. 앞으로 죽일 거냐고는, 묻지 않으셨잖습니까.”
바네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물으신다면, 바네사 양. 저는 할 겁니다.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누구든지. 그러니…….”
“그러니?”
“이제 절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대공은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아름다운 얼굴로 웃었다.
긴 밤이 될 것 같다.
* * *
바네사 클로디아 랭은 사교계의 꽃이었다. 데뷔탕트 이후 8년간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부채 뒤에서 그녀가 얼마나 아등바등 발버둥을 쳤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바네사의 아버지인 랭 백작은 주정뱅이에 노름꾼이었다.
자산을 탕진하고 아내를 두들겨 패서 기어이 달아나게 만들었다.
아내가 집을 나가자 그의 표적은 바네사가 되었다. 툭하면 이유 없이 매를 맞았지만 아버지는 얼굴만은 손대지 않았다.
〈네 엄말 닮아서 생긴 것 하난 반반하니까 말이야, 얼른 사교계든 어디든 가서 돈 많은 남자를 물어 오라고. 그게 네 유일한 쓸모니까.〉
‘뭐, 뻔한 거지.’
그러나 주정뱅이 랭 백작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바네사에게 물려줄 재산은커녕 빚이나 떠넘기지 않으면 다행인데다가, 있다 해도 딸에게는 상속권이 없었으니까.
시궁창 같은 집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인생을 살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결혼. 그것도 지체 높은 귀족이나 부호와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사교계는 반반한 얼굴 하나로 버틸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바네사는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었다.
십수 년을 얻어맞으며 큰 덕에 눈치 하나는 빌어먹게 빨랐으니까.
귀족들이 뭘 원하는지, 누구와 누구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지, 눈빛만 보고도 알아챌 수 있었다.
게다가 운까지 따랐다. 사교계에 오래도록 여왕으로 군림했던 레이디 에반젤린이 돌연 외국으로 떠나 버린 직후, 모두가 새로운 얼굴을 고대하고 있었다.
거기에 불쑥 나타난 백작 영애. 그것도 한때 미모로 수도를 술렁이게 했던 크리스탈 랭의 딸이라니.
일이 순탄하게 풀려 방심한 탓이었을까. 황자의 청혼을 바네사는 앞뒤 재지 않고 덥석 받아들이고 말았다.
철없는 도련님이라고만 생각했던 황자는 알고 보니 안하무인에 적을 만들기 쉬운 성격이었다.
물론 그게 결혼 생활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건강했던 황태자가 별안간 낙마 사고로 죽기 전까지는.
콘라드 황자는 황제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방에 도사린 암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황성에 붙어 있을 필요가 있었다.
숙부인 바스티안 대공에게 계승권을 넘기겠다는 콘라드를 막으려 설득하고 또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젠 황실의 모두가 날 노리고 있어. 애초에…… 애초에 네가 날 부추긴 탓이야, 바네사. 난 황태자 같은 건 되고 싶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마지막 날, 콘라드에게 들은 말이다. 결국 수도를 떠나는 마차 안에서 바네사는 그와 나란히 암살당하고 말았다.
“바네사……, 바네사, 살려 줘……. 나 아파, 바네사. 의사를……, 의사를 불러 줘.”
피투성이가 된 콘라드는 바네사의 발치에서 나뒹굴며 울었다. 바네사의 찢긴 목과 가슴에서도 피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바네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편안한 기분이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구나. 어쩌면 나는 평생 살아남으려고 발버둥만 쳐 온 것 같아.’
“……별거 아니네.”
죽는 것도.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바네사는 데뷔탕트 날 밤으로 돌아와 있었다.
* * *
‘여긴……, 여긴 황성의 홀인데……. 내가 수도로 돌아온 건가? 콘라드는?’
잠깐.
바네사는 재빨리 자신의 목을 더듬어 보았다. 거친 레이스의 촉감이 느껴진다.
‘이 드레스……, 이런 싸구려 드레스는 약혼식 이후로 입은 적이 없는데.’
건너편에 있던 귀부인의 부채가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화려하게 장식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포셀린 인형처럼 멍한 미소를 짓는 적갈색 머리칼의 여자. 턱 아래까지 빈틈없이 목을 조이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틀림없다. 때는 봄날. 다른 귀족 아가씨들은 모두 화사한 파스텔 톤으로 치장을 했었다.
오직 바네사만이 장례식이라도 참석한 꼴이었다. 목에 남은 멍 자국을 가리기 위해서였지만 덕분에 오히려 이목을 끌었었다.
“괜찮아, 바네사? 갑자기 멍해져서는…….”
그녀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메이슨……?”
메이슨 서리. 5년 전 남부 전선에서 전사한 바네사의 소꿉친구.
바네사는 달려들어 그를 덥석 껴안았다. 메이슨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곧 평소처럼 웃어 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너 역시 긴장했구나?”
바네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틀림없는 8년 전의 봄이었다.
“……란 제국의 적법한 황태자, 프리드리히 사이란 전하이십니다!”
생각을 제대로 정리할 새도 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화려하고 거대한 문이 열리고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젊은 남자가 웃는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프리드리히 사이란. 지금으로부터 8년 뒤 낙마 사고로 세상을 뜨게 될 비운의 황태자.
그는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는 후계자였다. 인망이 높고 타고난 외교관에다 귀족은 물론 제국민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그런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릴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뒤이어 문이 열렸을 때 바네사는 콘라드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기대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낯짝을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되다니.’
잠깐, 정말로 그랬었나?
다시 생각해 보면 데뷔탕트의 밤 콘라드는 가장 마지막으로 무도회장에 나타났었다. 황태자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은 콘라드가 아니라…….
“동쪽 해안과 사략 군도의 주인이신 필리어스 사이란 대공 각하이십니다!”
검은 인영이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홀 안의 모두가 대화를 멈췄다.
‘그랬었지, 기억나. 오늘 밤 나만큼 음침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저 사람이 나타났지.’
사실 대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모두 가십과 루머뿐.
“저분이 소문의 그분이셔? 황제 폐하의 이복동생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