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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음
1. 자요, 우리.



“그동안 수고했어. 내일이면 해방이네.”

남편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어투로 말했다.

그 말에 재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해방.

그 두 글자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내일이면 남편과 정말 이혼이었다.

숙려 기간이 끝나고 내일 마지막으로 법원에 함께 출석만 하면 정말 이 계약 결혼도 끝이다.

이혼과 해방이란 단어가 한 문장에 올 수가 있는 걸까.

재희는 사뭇 가라앉은 눈빛으로 테이블만 응시했다.

“이혼 후엔 뭘 할 생각이야?”

남편이 담백하게 입술을 떼며 턱 끝을 추어올렸다.

그러곤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움켜쥐었다.

“……유학 갈 생각이에요.”

사실상 말이 유학이지, 유배와 다름없었지만.

이혼 후에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런 그녀의 말을 집에서는 선뜻, 들어주기로 했고.

아무래도 이젠 집안에서 쓸모가 없어진 저를, 집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쫓아낼 요량인 듯싶었다.

“공부?”

남편이 물었다.

“네, 뭐…….”
“그래. 하고 싶었던 공부 해야지. 이제 자유를 얻었는데.”
“…….”
“네 또래처럼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야지.”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와인을 삼켰다.

그런 남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재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유롭게…….”

남편의 그 말을 곱씹는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그래. 자유롭게.”
“…….”
“송안 그룹 공주님으로 다시 살아. 이재희.”

그러나 그런 재희와 달리 남편은 덤덤하기만 했다.

송안 그룹 공주님.

한땐, 사람들이 재희를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

재희는 텅 빈 눈으로 제 앞에 놓인 빈 잔을 응시했다.

송안 그룹 공주님이라는 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옛 생각에 잠겼다.

갓 스무 살이 되던 해, 재희는 지금의 남편과 정략결혼을 했다.

물론 그럴싸하게 이야기해 정략결혼이지, 사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회사 합병으로 인해서 해야만 했던.

원치 않은, 그리고 원한 적도 없는 결혼이었다.

‘밥값을 해야지, 이재희.’

겉보기에는 금지옥엽으로 자란 송안 그룹의 재벌 2세 공주님처럼 보였지만.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이 모든 걸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재희야?’

사실 재희는, 어느 날 느닷없이 저의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온 계모와 이복동생에게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빼앗긴 콩쥐 신세였다.

‘스무 살 되면 너도 네 아버지 도와서 그룹 명예를 위해 애써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 혼자서 힘드실 것 같은데.’

그리고 자연스레 계모의 종용으로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 준비를 하게 됐다.

‘저 그림 공부 좀 더 하고…… 결혼은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결혼은 저 아니고도 태주가 하면 되니까.’

나름대로 반항 아닌 반항을 해보았지만,

‘얘. 태주는 공부해야 하잖니. 이제 고등학교 입학한 어린 동생한테, 누나란 애가 어떻게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수가 있어?’
‘어머니, 하지만.’
‘그리고 태주는 이 집의 대를 이을 후계자잖니.’
‘……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미국 대학 입학하고 유학도 다녀오면서 차차 회사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 하잖아.’
‘…….’
‘그리고 그에 걸맞은 결혼 상대도 꼼꼼하게 재고 골라서…… 아. 물론 그렇다고 네 결혼 상대를 대충 고르겠다는 뜻은 아니고.’
‘어머니……. 그럼 아버지랑 이야기 좀 해보고.’
‘네 아버지는 벌써 허락하셨는걸?’
‘네……?’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내게 맡기셨어, 네 결혼. 올해는 넘기지 말라고 하시더라.’

잠깐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콩쥐가 더욱 불쌍한 이유는 하나뿐인 핏줄인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엄마가 죽자마자 아버지의 내연녀였던 그 여자는 엄마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곳이 제집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주인 행색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재희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한 학기 만에 휴학신청을 내고선 결혼 생활에 몰두해야만 했다.

자신의 결혼 상대는 저와 9살 차이가 나는, 정연 그룹의 차남 지석현이었다.

‘3년 후에 이혼하는 거로 하지.’
‘……이혼이요?’
‘대충 알아 네 사정. 스무 살 되자마자 팔려오듯 나와 결혼한 너 역시 나와는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거.’
‘아.’
‘피차 지금의 우리 둘에겐 결혼이, 그나마 선택지 중에 최선이잖아. 적당히 살다가 적당한 때에 더 최선의 삶을 살자고. 우리 둘 다.’
‘석현 씨.’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인 건.

그가 먼저 저에게 ‘끝이 정해진’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석현 씨, 하고 부르는 그 호칭조차 어색한. 젖비린내 나는 너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아.’
‘네가 제대로 된 아내 역할이나 해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