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것(2)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된 아니타의 황금빛 눈이 초점을 잃고 흐릿해졌다. 왠지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짓말 좀 작작 해. 쟌 로비아네스가 어떻게 네 남편이지? 지금, 이 순간도 그 녀석은 널 데려가지도 못하는데. 네 말 한마디에 꼼짝을 못 하잖나.”
“흣… 그건.”
“부부는 그런 게 아니야. 가끔은 아닌 줄 알면서도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고 선을 넘지.”

다시 아니타의 곁으로 바싹 다가선 클리벤투스는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나였다면 너를 이곳에 잠재우는 건 결코 용납 못 했어. 아니, 여길 제 발로 찾아 들어가는 일부터 막았을 거야.”
“…….”

클리벤투스는 굳어 버린 아니타에게서 진주 목걸이를 낚아채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뽀얀 빛을 내는 진주에 닿은 붉은 입술이 제 피부에 닿은 것처럼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아니타는 흠칫하며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뭐, 뭐 하는…!”
“…글쎄.”

클리벤투스는 멍하니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는 아니타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흔들리는 걸 기쁘게 바라봤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는 수억 개의 별을 모아 둔 보석함처럼 빛이 났다. 그리운, 사실은 너무나 보고 싶었던 눈동자였다.

“여전히 아름다워서.”
“……?”

당황한 채 산란하던 눈동자에 차츰 분노가 서렸다.

“당신은 저를, 대체 저를 뭐라 생각하시는 거죠?”
“아니타, 정말로 쟌 로비아네스에게 몸을 주었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질문을 했고, 아무도 서로에게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팔을 더듬고 내려간 그가 아니타의 손끝을 감싸 쥐었다. 아니타는 순간 그의 손을 뿌리치고 뺨을 올려붙였다.
짝!
기다란 복도의 벽을 치고 돌아온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파, 파렴치해.”

아니타는 색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나머지 손도 그에게서 비틀어 빼내었다.
그가 혀로 뺨을 쓸며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쟌 로비아네스 곁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내 생각이 나진 않았다고 맹세할 수는 있나?”
“어, 어떻게 그런 소리를!”
“진정해, 리베르타가 스칼렛과 잠들었잖아.”

이 태풍을 거스르고 잠든 이들을 방해하진 말아, 아니타. 하고 낮게 깔린 음성으로 위협하듯 그가 속삭였다.
이제 그는 아니타의 팔목을 거머쥐고 멋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타는 무자비한 힘에 이끌려 그를 따라 걸어야 했다. 숨죽인 비명이 비와 바람 소리에 파묻혔고, 두 사람은 그가 집무실로 이용하고 있는 서재에 들어섰다.

“흐윽, 흐윽.”
“아니타, 이제 마음껏 비명을 질러도 좋아.”

문을 잠그고 뒤돌아선 그가 팔짱을 끼고 웃었다.
아니타는 시커멓게 어둠이 내린 서재 한가운데에서, 담요를 잃어버린 채로 바들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만이 금빛으로 노랗게 빛을 냈다.
이윽고, 아니타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보란 듯이 목걸이를 뜯어내 거머쥐었다.
가느다란 체인이 손 틈 사이로 늘어져 덜렁거렸다.

‘당신도 다른 남자들하고 다를 게 없어요.’

아직도 자신은 도련님에 대해 멍청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멋대로 저를 탐하려 드는 사내들과 다르다며, 아직도, 아직도.
그럴 리가. 오히려 더 파렴치한 사람인 것을.

‘이까짓 목걸이!’

아니타는 발코니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태풍이 이는 바깥으로 목걸이를 집어 던졌다.

“뭐 하는 짓…!”

뒤늦게 그녀의 행동을 깨달은 클리벤투스가 아니타에게 팔을 뻗었다.
그러나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거센 바람 속에서 진주 목걸이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아니타가 손을 털어 내며 돌아섰다. 단정했던 흰 원피스와 붉은 머리가 또 흠씬 빗물에 적셔졌다.
아니타는 뒤돌아서 그에게 휑해진 목 주변을 드러내 보이며 소리쳤다.

“도련님, 이제 우리 사이에 어떤 여지가 남아 있을까요?”
“…….”

그는 아니타의 어깨 너머로 진주 목걸이가 사라진 방향을 허망한 눈으로 좇다 시선을 내렸다.
함께 비를 맞으며 선 그의 목에서 거칠게 갈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친 거로군.”
“아주 멀쩡해요.”

아니타가 이를 드러낸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는 계속해서 비를 맞고 선 아니타를 강제로 실내에 들였다. 검붉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카펫을 적셨다.

“…네 뜻이 뭔진 알겠어, 아니타.”

왜 이렇게 이를 드러내고 그를 경계하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왜 자신을 미워하는지 이유라도 알면 속이 시원할까.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는 아니타의 얼굴에 흐른 물을 닦으려 했다. 제 얼굴에 흐르는 빗물 따윈 생각지도 않는 사람처럼 무감하게.

“만지지 마세요!”

역시나 아니타는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녀로서는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는 그의 모든 행동이 거북했다. 의문과 분노, 그리고 이유 모를 슬픔이 뒤섞인 눈을 마주 보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아니타는 차라리 그가 완벽하게 나쁜 사람으로 남길 바랐다.

“그만, 답이 되었다면 저는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니타.”
“…….”
“아니타.”

클리벤투스는 돌아서는 아니타의 이름을 여러 차례 불렀다.
그래도 돌아서는 그녀는 매정하기만 했다.
막 그녀의 손이 문고리를 붙잡는 걸 본 순간, 클리벤투스는 아니타의 손을 낚아채 벽으로 몰아붙였다.
시간이 지나 수분을 한껏 머금은 광목천이 여린 몸 선을 따라 달라붙었다. 얇은 천 위로 아니타의 피부색이 훤히 드러났다.

“이 꼴을 하고 어딜 가.”
“읏.”

클리벤투스는 시선을 피하는 아니타의 턱을 손에 쥐었다. 빗물에 젖은 손의 온기가 축축하고 서느렇게 파고들었다.

“너, 매번 이런 식으로 사람을 긁어 놓고, 스칼렛을 데리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그…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아니타는 빤히 그를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전에도 말했지. 스칼렛은 네 곁을 원하지 않아. 네 행동은 다 작위를 얻기 위한 핑계야.”

순간 아니타의 눈에 억울함이 가득 차올랐다. 여전히 열려 있던 발코니의 창문이 불어온 바람에 큰 소리를 내고 흔들리며 깨질 듯 덜컹거렸다.
클리벤투스는 엄지로 턱을 쓸어 내며 입맛을 다시는 짐승처럼 입술을 축였다.
불안해진 아니타가 바르작거리며 소리쳤다.

“다… 다 가져 놓고, 아직도 욕심을 부리고 싶으신 건가요? 저는 한 번도 제대로 가져 보지 못한 것들뿐이에요! 그러니 이제라도 편찮으신 어머니가 제 곁에 남아 있게 해 달란 말씀이고요!”

이렇게 외치는 순간에도 아니타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도련님의 말대로 어머니는 그녀의 곁을 원하지 않는다.
부질없는 몸부림, 누구도 원치 않는 저 혼자의 욕심이라는 걸 다시 확인받기가 괴로웠다.

“설마 네가 갖지 못한 것들이 모두 내 탓이란 소리인가?”

아니타의 반응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빤히 감상하며 클리벤투스가 물었다.

“물론… 물론, 처음부터 도련님과 엮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고 있진 않았겠죠! 그 정도는 확실하잖아요! 아르젠에서 제 인생은 전부 당신을 위주로 돌아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