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 끝장나는 이혼
[2] 끝내주는 재혼
에필로그
[1] 끝장나는 이혼
#1
입국장에는 진안만 있었다. 성결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겼다가 곧 후회했다. 아무리 성질이 불같아도 그는 지각 있는 성인이었다.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다짜고짜 화부터 내나, 늘 나오던 사람이 안 보이면 걱정부터 하는 게 상식이지, 따위의 생각으로 점화될 뻔했던 불을 빠르게 진화했다.
감정부터 앞세운 데 대한 핑곗거리는 있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아내와 통화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9시간의 시차는 참으로 애매해서 새벽과 한밤중을 피해 전화하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차 하면 놓치는 거였다. 하지만 난관을 뚫고 시간 맞춰 전화를 걸었음에도 아내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집에 좀 가 보라는 그의 성화에 진안이 아무 일도 없다고 했기 망정이지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
애초에 아내 지형은 먼저 전화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휴대전화를 거의 수신용으로만 사용했다. 문제는 수신마저도 원활하지 않다는 건데, 그 일로 여러 번 다퉜다. ‘전화 좀 따박따박 받을 수 없어?’와 ‘내가 있을 데야 집 아니면 보리수길인데, 뭐가 궁금해서 그래?’의 무한 반복이었다.
성결이 일그러졌던 얼굴 근육을 재배치하는 동안 진안이 다가와 그의 손에서 캐리어를 넘겨받았다.
“오셨어요?”
“왜 혼자야?”
“차에 타서 말씀드리죠.”
성결이 진안의 팔을 덥석 잡았다.
“뭔데!”
“차가 바로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래 못 기다려요.”
“뭐냐니까!”
진안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차부터 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곤 팔을 휙 잡아 빼고는 부지런히 앞서갔다. 깡마른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성결은 곧 발짝을 뗐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성질을 죽여야 했다.
출입문을 통과하자 진안이 주차대행업체 기사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단골 중에서도 단골이다 보니 그를 알아본 기사가 정중히 인사했다. 성결은 가볍게 묵례하고는 조수석에 올라 진안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는 동안 슈트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지형의 번호를 눌렀다.
결론은 역시나 통화 실패였다. 노기를 참지 못한 성결은 진안이 운전석에 엉덩이를 내리기가 무섭게 재촉했다.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해.”
하지만 진안은 출발하고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봉 지배인님.”
“제가 분명히 경고 드렸습니다. 그건 아니라고, 나중에 큰일 난다고 누차에 걸쳐 주의를 드렸어요.”
성결이 와락 인상을 썼다. 도대체가 얼굴 근육을 펼 새가 없었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사모님이 아셨습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골골이 잡혔다.
“지형이가 뭘 알아?”
“캡틴에 대해서요.”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허리까지 틀어 진안을 쳐다보았다.
“뭘 어떻게 알아!”
“뭐겠습니까, 전부지.”
성결이 눈을 부릅뜨며 “당신이 털었어?” 하자 진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제 입만 막으면 될 일이었던가요?”
“그럼 누구야! 어떤 새끼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중요해. 그러니까 말해. 어떤 새끼가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는지 말하라고.”
“저 운전 중입니다. 머리 울리지 마세요.”
성결은 눈을 질끈 감고 거칠어진 호흡을 다독였다. 진안의 말이 옳았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흥분해 봤자 이득 될 건 없었다.
“좋아. 자중하도록 노력할 테니까 말해.”
“노력하지 말고 시행하세요.”
“알았어, 자중해. 자중한다고. 그러니까 말해.”
진안이 한숨을 흘렸다.
“사장님이 출국하신 그날 저녁에 사모님이 ‘노 빅 딜’에 오셨습니다.”
<노 빅 딜>은 성결이 운영하는 위스키 하우스였다. ‘노 빅 딜(No big deal)’을 해석하면 ‘별일 아닙니다!’라고 할 수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든 될 거다!’, ‘될 대로 돼라!’라며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를 외칠 때 그는 한결같이 ‘노 빅 딜’을 읊조리다가 상호로까지 삼았다.
위스키 하우스 <노 빅 딜>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유명했다. 위스키 정보를 다룬 영문 전문잡지에 꾸준히 기사가 올라갈 정도여서 해외의 위스키 애호가들이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다. 아울러 고풍스러운 도서관 형태의 독특한 외관과 실내 디자인으로 건축업계 종사자들도 종종 들렀다.
성결이라고 앉아서 손님만 받는 건 아니었다. 그만한 규모의 위스키 하우스를 차질 없이 운영하려면 그 누구보다 바빠야 하는 건 인지상정이어서, 느긋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만 해도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증류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형이가? 왜?”
“선물하신다더군요.”
“누구한테?”
“모릅니다.”
성결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다음.”
“가슈타인 문샤인을 말씀하셔서 꺼내고 있는데, 손님이 오셨습니다.”
성결은 그 손님이 문제적 인물임을 눈치챘다.
“예전 단골이었습니다. 사장님도 얼굴 보면 기억이 나실 거예요. 한동안 안 보여서 금주라도 한 줄 알았는데 외국에 나가 있었다더군요.”
“서론이 너무 길다는 생각 안 드나?”
“필요한 내용이에요. 급하다고 다 떼어 내 봐야 어차피 물으시게 돼 있습니다.”
“좋아, 그다음.”
“캡틴이 상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사장님하고 캡틴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귀에서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충격이 너무 커서 말을 하고 싶어도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캡틴더러 사장님과 결혼했느냐고, 아기는 있느냐고 묻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3년도 지난 일이라 간과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갑자기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너무 뛰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저도 캡틴도 그냥 얼어붙었습니다.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신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얼마간의 침묵 후에 진안이 말을 이었다.
“사모님만 아무렇지 않으셨습니다. 차분하게 계산까지 하고 가셨습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거기서 잠깐 멈췄던 진안은 “무서웠습니다. 제가 아는 사모님이 아니었거든요. 그동안 봐 왔던 사모님과 결이 완전히 달랐습니다.”라고 나직하게 덧붙였다.
진안이 아는 사모님이라면, 무얼까. 어떤 모습을 말하는 걸까.
쿨하다 못해 시크한 여자?
태연하다 못해 초연한 여자?
그랬다, 남들이 보는 지형은 꽁하거나 삐지는 법이 없고, 꾸물거리거나 질척거리는 법이 없으며, 의뭉스럽게 굴거나 내숭 떠는 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깔끔했다. 그런데 진안이 무서움을 느꼈을 정도로 쿨과 시크, 태연과 초연이 과했다는 뜻이다.
물론 남편이 보는 지형은 많이 달랐다. 그녀는 전체적으로 강렬했다. 정열과 격정이 넘쳤다. 대책 없이 뜨겁기만 하지 않은 데다 웬만해선 드러나지 않아서 남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할 뿐이었다. 성결 역시 관계가 깊어지고서야 깨닫고 당황했다. 그도 불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불이 만났을 때 어찌 될지는 굳이 안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어서 겁도 났었다.
평화를 위해 헤어지려 한 적도 있었다. 안 그래도 스물네 시간이 부족하게 바쁜데, 기껏 꾸린 가정이 불안해지면 버티기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이겼다. 포기하기에는 그녀를 너무도 간절히 원했다.
염려가 무색하게도 결혼생활은 무탈하게 굴러왔다. 지형의 내면에서 활활 타는 불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덕분이었다. 불을 어찌나 꽁꽁 잘 숨기는지 오히려 차갑게 보일 정도였다.
어쨌거나 우려했던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찌나 감사한지 결혼 1주년이 되던 날에는 손님들에게 아이리시 위스키를 한 잔씩 돌렸다. 기분 좀 낸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고작 석 달이 채 안 돼 위기에 빠졌다.
“그래서 캡틴은?”
“차질 없이 출근하고 있습니다. 사모님이 따로 연락하시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안이 바로 덧붙였다.
“저하고는 오늘 아침에 통화하셨습니다. 사모님께서 먼저 전화하셔서 공항에 혼자 가라고 하신 게 전부입니다.”
“집이래?”
“모르죠, 저도.”
“물어보지.”
“무서워서요.”
성결이 헤드레스트에 고개를 툭 얹는데 진안이 “사장님.” 하고 불렀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진안이 머리 울리지 말라며 타박하더니, 지금은 그의 머리가 광광 울렸다.
“제가 나이를 엄청 먹은 건 아니지만 사장님보다 2년이나마 더 산 인생 선배로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무조건 비세요. 자존심 부리면서 뻗댈 일이 아닙니다. 납작 엎어지셔야 해요. 아니면 끝장입니다.”
성결이 알기로 ‘끝장’은 ‘파탄’ 혹은 ‘파국’의 다른 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망한다는 의미였다. 얼마나 섬뜩한지 살갗에 소름이 오스스 일었다.
‘어째야 하지?’
그러게 말이다. 도대체 이를 어째야 하나.
그가 아내 지형을 만난 건 약 3년 전, 인설과 헤어진 직후였다. 그것도 인설이 매개되어 인연을 맺었다. 그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성결과 인설은 6년이나 사귄 장수 커플이었다. 특히나 인설은 진안과 함께 <노 빅 딜>의 창업공신이기도 했다. 연장자에 경력이 더 깊은 진안이 바 매니저, 지배인이 되었고 인설은 시간이 흘러 바텐더의 우두머리, 캡틴이 되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매력적인 그녀는 <노 빅 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여느 커플이었다면 공적으로도 결별했겠으나 성결과 인설은 <노 빅 딜>을 선택했다. 서로의 의사를 타진하는 과정도 생략했다. 정식으로 헤어진 다음 날 평소와 똑같이 출근한 인설을 보고 성결이 어깨를 으쓱한 게 전부였다. 주변에서 어찌 보든 성결은 해고를 입에 올리지 않았고 인설은 사표를 내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지형이라는 존재는 어느 지점에서 튀어나온 걸까. 성결과 인설이 연인으로서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 바로 인설의 집이었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선 성결의 시선이 바닥에 비스듬히 세워진 액자로 쏠렸다. 그를 힐긋한 인설이 커피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거 나예요.”
그랬다, 초상화였다. 그것도 꽤 독특한 초상화였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분위기를 옮겼다고 해야 하나. 인설의 핵심적인 특징인 외유내강이 기가 막히게 살아 있었다.
감탄을 거듭하며 뚫어져라 쳐다보자 인설이 머그잔을 내밀었고, 그는 대꾸 없이 받아 한 모금을 넘긴 후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못 보던 건데.”
“보리수길에서 그렸어요.”
보리수길은 한강 이북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예술가의 거리였다. 공방과 편집숍이 밀집해 있고 거리공연이 수시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화랑?”
“길거리 화가요.”
“그런 것도 있는 줄은 몰랐군. 파스텔화인가?”
“네.”
성결은 “멋지군.” 하며 초상화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인설이 “오빠.” 하고 불렀다. 둘만 있을 때 나오는 호칭이었다.
“우리, 끝이죠?”
그제야 성결이 초상화에 붙박여 있던 시선을 인설에게 옮겼다.
“네 생각은 어떻지?”
“끝이죠.”
인설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
“원망하고 싶지 않아요.”
“그 역시 마찬가지.”
말끝에 성결은 다시 초상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석에 이끌리듯 온 신경이 그림으로 향했다. 인설은 그냥 조용히 자기 몫의 잔을 입에 댔다. 그가 보는 초상화 속의 인물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인데 딱히 기분 나쁠 일이 아니기도 했다. 연인관계를 청산한다고는 하나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다만 초상화에 홀린 듯한 성결이 희한해 보일 뿐이었다.
그날 이후 초상화는 성결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좀처럼 일손을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괴롭혔다는 표현이 옳았다. 구설수를 무릅쓰고 결혼 얘기까지 오가던 전 연인을 곁에 두었을 만큼 <노 빅 딜>이 우선인 그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성결은 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키워드를 ‘보리수길 길거리 화가’로 잡고 검색하기가 무섭게 포스트가 주르르 떴다. 이 많은 내용을 언제 다 확인하나 순간적으로 기겁했으나 의외로 인설의 초상화와 비슷한 스타일의 그림은 곧 나타났다. 그것도 한두 작품이 아닌 상당히 많은 수였다. ‘도깨비 매(魅)’의 매력과 ‘마귀 마(魔)’의 마력을 거듭 써도 부족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포스트마다 꼼꼼하게 확인한 끝에 화가가 보리수길의 유명인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나같이 ‘화가님의 실물을 영접해서’ 좋았다, 감동이었다, 신났다, 은혜로웠다고 간증했고, 자기 차례가 오기까지 기다리느라 힘들었다며 포털에 예약 창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애교스러운 불평도 있었다.
당연히 사진도 함께 올라와 있었다. 대체로 옆과 뒤에서 찍어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우나 헤어스타일이 눈에 띄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다갈색 머리카락이 얼마나 고불, 아니 뽀글거리는지 흡사 사자였다. 실제로 ‘라이언 걸’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성결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그는 호기심이 일면 일단은 부딪혀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 날을 잡아 보리수길로 향한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첫날은 실패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라이언 걸’은 보이지 않았다. 매사에 거침없는 그답게 공인중개사 사무소로 쳐들어가 화가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쉬는 날인가 보네요.’라는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고, 이어서 찾아간 음식점의 주인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다음을 기약했으나 두 번째, 세 번째 방문 때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정해 놓고 쉬는 게 아니어서 헛걸음하는 경우가 꽤 있다더니, 성결이 거기에 속한 것이다. 위스키 말고는 그 어떤 존재에도 집요하게 굴어 본 적이 없기에 오기가 치밀었다.
좋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걸음 한 네 번째 때, 드디어 사자머리를 발견했다. 왼쪽 어깨에는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오른손으로는 빨간색 캐리어를 끌고 빠르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그리고 그날, 성결은 한눈에 반한다는 게 무언지 깨달았다. 인설도 첫인상에서 받은 호감으로 관계를 시작했으나 지형을 보고 받은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영혼이 쫙 갈라지는 느낌이랄까. 굳이 비유하자면 고목이 벼락을 맞아 절반으로 쪼개진 형국이었다.
지형에게 오인설이라는 존재에 관해 입을 다문 건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결혼 얘기가 오갔을 정도로 진지했다고는 하나 결론적으로는 확실하게 헤어진 사이인데 굳이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양다리도 아니고 환승도 아니었기에 죄책감을 가질 이유 역시 없었다. 성결은 진심으로 당당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설을 잊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인설과 연인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 문득 ‘아, 내가 저 여자랑 사귀었었지.’ 하는 순간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성결에게 인설은 과거의 한 점, 그것도 아주 작은 점이었다.
인설 역시 거슬리게 굴지 않았다. 본인 삶이 바쁘기도 했고, 주변에 남자도 많았다.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친구와 지인의 성별을 따지면 거의 남성이었다. 와인 바나 칵테일 바라면 모를까, 위스키 하우스에 여자가 들락거릴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별의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마음이 식었을 뿐이었다. 한쪽만 달라졌다면 문제가 됐겠으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그렇게 됐다. 미련이든 앙금이든, 찌꺼기 감정이 전혀 남지 않은 관계였기에 조용하게 지내 올 수 있었고. 그런데 이제 와 갑자기 문제가 된 것이다.
“사장님.”
성결은 진안이 그를 왜 부르는지 알았다. 해원동이었다. 이제 3분 정도만 더 가면 그와 지형이 사는 빌라 단지가 나올 터였다.
“제발 일 크게 만들지 마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일을 크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성결은 그럴 일 없다고 단언하지 못했다. 지형이 어찌 나올지 가늠이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