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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hapter 1.
Chapter 2.
Chapter 3.
Chapter 4.
Chapter 5.
Chapter 6.
Chapter 7.
Chapter 8.
Chapter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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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분명 난 천덕꾸러기 최약체 바람의 정령일 뿐이었는데.’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응접실 안의 모두가 날 바라봤다.
각각의 화려하고 출중한 외양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드디어 왔군.”
“안녕하세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황태자가 말했다.
“결정은 한 건가?”
“아하하……. 이렇게 바로 물어본다고요?”
“닷새의 말미를 요구한 건 자네야.”
‘들어오자마자 본론부터 꺼낼 줄이야. 물론 이 사이에서 담소나 나눌 마음도 없었지만…….’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천천히 앞의 다섯 남자들을 돌아봤다.
여유로운 표정의 황태자, 랜슬롯.
“제국을 지배하는 자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아?”
내가 직접 선택한, 나와 같이 성장한 카이로스.
“왜냐니? 당연히 내 목숨은 네 거잖아.”
정령인 주제에 왜 기사를 선택하는 자리에 와 있는지 모를 상급 정령, 헤르휘스.
“나는 그냥 네가 좋아, 아셀라. 다른 건 몰라…….”
화려한 미모의 소유자, 제국의 바람둥이로 소문난, 에드워드.
“레이디, 저는 두 번째로도 만족합니다. 항상 당신을 만족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 라세즈는 어디 있지?’
보이지 않는 라세즈를 찾아 시선을 옮기는데 귓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셀라.”
“악! 깜짝이야! 라세즈…….”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말을 이은 라세즈가 천천히 내 앞에 무릎 꿇으며 말했다.
“제게 속죄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셀라.”
신이 맺어 준 인연.
애써 무표정한 척 긴장을 숨기고 있지만…… 다 티가 나는 나의 프리모 나이츠, 라세즈.
“이봐! 아셀라에게 꼬리 치는 건 반칙이잖아!”
“……느끼해.”
“거리를 두게, 시에르텐샤.”
처음 보는 모습에 나머지 남자들이 라세즈를 경계했지만 라세즈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가만히 날 올려다봤다.
라세즈가 물었다.
“……아셀라, 누굴 선택하셨습니까.”
“라세즈, 그건…….”
서로 떠들며 비난하던 남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내게 집중했다.
정적 속에서 라세즈가 다시 한번 물었다.
“당신이 선택한 기사가 누구입니까?”
불안과 희망, 기대와 초조함이 섞인 다섯 쌍의 시선에 숨이 막혔다.
“난, 나는…….”
‘에라, 모르겠다!’
충동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문으로 뛰어갔다.
“아셀라!!”
남자들이 놀라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손을 뻗는 남자들을 뒤로한 채로 눈을 질끈 감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몸이 쑥 꺼지며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손짓하자 곧바로 불어온 바람이 무엇보다 단단하게 추락하던 내 몸을 받쳐 줬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데 등 뒤로 다급히 날 부르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셀라-!!”
아래를 바라보며 질린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저기, 왜들 이러세요. 저 같은 정령에게 집착하지 마세요!!”
* * *
온몸을 감싸는 거센 바람과 끝까지 뻗은 손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져 가던 전망대를 기억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고로 죽게 된 내가 다시 눈을 뜨자마자 처음 본 건 청명한 푸른 색이었다.
“어…. 깼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뜰수록 선명해지는 시야로 푸르른 곱슬 머리칼과 좀 더 진한 색채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보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미성숙한 소년의 얼굴은 무척이나 고왔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뭐지 얘는?’
소년의 몸 전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투명했다.
사람의 투명도를 살짝 낮추면 이럴까? 마음 같아선 볼을 한번 쿡 찔러 보고 싶었다.
멍하니 내 머리를 바라보던 소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모양 좋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짧은 감탄이 나왔다.
“예쁘다…. 솜털 같아.”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머리를 비비는 손을 잡아 내리며 물었다.
“넌 누구야?”
“나는 세 번째. 얼음의 정령이야. 너는 솜털.”
“정령? 그게 무슨…….”
“솜털을 깨워 달라고 했는데 아헤로스는 대답이 없었어. 매일 보러 왔는데…….”
본인을 세 번째라 칭하는 소년의 느릿한 목소리를 멍하니 듣는데 어느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뭔가 익숙한데…… 뭐지?
“아헤로스의 뜻에 따라 프리모 나이츠에게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솜털이 안 일어나서 걱정했어.”
‘아헤로스’, ‘프리모 나이츠’, ‘정령’.
“……아!”
머릿속에 죽기 며칠 전 읽었던 소설이 떠올랐다.
이성이 본능적으로 예감을 부정했다.
‘설마……. 에이, 설마.’
나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소년이 잡고 있는 내 두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옮겨 역시 반투명한 팔목, 팔뚝을 훑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몸에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얼빠진 신음을 감출 수 없었다.
“미친…….”
나도 투명도 70%였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볼을 세게 꼬집었지만 아파서 눈에 눈물만 고였다.
“아야!”
“솜털아, 괜찮아?”
‘아픈데? 아프잖아!! 뭐야, 이거. 꿈이면 안 아파야 하는데…….’
걱정스레 내 볼을 쓰다듬는 세 번째의 뒤로 무형의 것들이 존재를 주장하듯 일렁였다.
‘저건…… 바람?’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존재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힘을 다루는 방법들까지.
뭔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하듯 제자리에서 살짝 뛰어오른 순간 중력을 거스른 몸이 땅 위로 둥실하고 떠올랐다.
설마설마했지만 진짜 몸이 떠 버리자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놀란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내가 날고 있잖아!!’
놀람도 잠시, 어설픈 실력에 몸이 휘청였다.
“아앗!”
넘어지려는 순간 단단한 팔이 안듯이 뒤에서 허리를 감싸 왔다.
수월히 나를 받아 낸 세 번째가 내 몸을 고쳐 안았다.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품에 안겨 얼떨떨하게 위를 올려다보자 푸른 속눈썹을 내리깐 세 번째과 눈이 마주쳤다. 다정한 푸른 두 눈을 바라보다 멍하니 물었다.
“너……. 얼음의 정령이라고 했지?”
“응.”
“……나는 누구야?”
나를 빤히 바라보던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아헤로스의 숨결. 바람의 정령이야.”
이곳은 사후세계도, 환생도 아니었다.
나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 ‘정령과 함께 춤을’ 속의 엑스트라, 하급 바람의 정령으로 빙의했다.
* * *
‘정령과 함께 춤을’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정령 시온과 수많은 남자 주인공들이 힘을 합쳐 저주받은 군대를 막아 내는 내용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저주받은 땅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마수들과 타락한 존재를 막기에 역부족인 인간들을 위해 신 아헤로스는 자신의 힘을 담은 정령을 창조해 인간들에게 선사한다.
그리고 정령과 인간은 함께 악과 맞서게 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정령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세대의 정령들이 인간계로 내려가는 의식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늦지 않게 오라는 고위 정령의 말에 궁 앞에는 정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눈앞에 가득한 투명도 70%의 정령들을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봤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를 않네.’
마찬가지로 반투명한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처음 내 모습을 제대로 봤을 땐 어찌나 놀랐던지.
예전 얼굴과 비슷한 듯 전혀 달라진 미형의 얼굴과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 얼핏 뒤가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팔다리는 정령이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멍하니 이곳에서 눈을 뜬 첫날을 회상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날 세게 치고 지나갔다.
“앗!”
“뭐야? 길 막지 말고 비켜.”
넘어질 뻔한 몸을 가누고 뒤를 돌아보자 파란빛을 가진 물의 정령들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