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퀸
언더 퀸
[3권]
06.
07.
08.
언더 퀸
06.
“아리엘, 식사가 입에 맞지 않니?”
“아, 아니에요. 어머니. 맛있어요.”
같은 날 저녁, 사만사 백작 가문의 저택.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사만사 백작부인과 그녀의 딸 아리엘 사만사였다.
올해로 열두 살이 되는 아리엘은 사만사 가문의 장녀로 아래로는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인 로베르가 있었다.
몇 년 전 아버지인 사만사 백작을 병으로 잃었으나, 세 사람은 남부러울 것 없는 단란한 가족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갑자기 쓰러진 동생이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어머니인 사만사 백작 부인이 어딘가 이상했다.
“……어머니.”
조용한 식당 안. 무거운 분위기 속 시중을 드는 하인들은 모두 숨소리도 죽인 채였다.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씹어 삼킨 아리엘이 조심스럽게 사만사 백작 부인을 불렀다.
“왜 그러니 아리엘?”
“로벨도 식사를 못 했는데 포션이라도…….”
“로벨? 아, 누워 있는 애가 있었지.”
마치 전혀 상관없는 타인을 말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오싹한 기분에 식탁 아래, 치마를 그러쥔 아리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만사 백작 부인의 시선이 아리엘을 향했다.
“그 애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니?”
“그, 그게. 로벨의 담당 시녀인 세라가 어제부터 갑자기 보이질 않아서요.”
“아아, 그 시녀.”
사만사 백작 부인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녀는 다신 보지 못할 거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개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뒀단다.”
“그만뒀다고요? 이렇게 갑자기요?”
세라는 로벨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리엘과 줄곧 함께 지내왔던 시녀였다.
비록 신분이 달랐으나 어린 아리엘과 로벨은 그녀를 친언니나 누나처럼 따랐다.
다정한 성품의 세라 역시 아리엘과 로베르 남매를 가족처럼 아끼고 돌봐주었다.
얼마 전 갑자기 저택을 떠났다는 유모만큼이나 그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누구보다 세라를 잘 아는 아리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만둔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세라가 이렇게 갑자기 그만둘 리가 없는데…….”
“아리엘.”
사만사 백작 부인이 들고 있던 식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탁! 하고 테이블을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아리엘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 어미가 말했잖니. 그 시녀는 개인 사정으로 그만뒀다고. 다신 볼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니?”
“하지만 어머니 세라는―.”
“아리엘.”
사만사 백작 부인이 조용히 아리엘을 부르며 손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기울어진 물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급히 달려온 하인들이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고 백작 부인에게 새로운 물잔을 건넸다.
백작 부인이 아리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세라는 죽은 네 아버지처럼 영원히 볼 수 없을 거란다.”
그 말을 듣는 아리엘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분명 어머니인데. 어머니의 모습인데.
어머니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게 진짜 어머니일 리가 없었다.
마주한 녹색 눈동자는 일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빛깔 좋은 보석을 박아 놓은 것 같은 인형 같은 시선.
눈앞의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면 저건 대체 뭘까? 두려운 생각에 아리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예, 알겠어요. 어머니.”
간신히 차분하게 대답한 아리엘이 음식 접시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계속해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녀는 애써 모른 척 식사를 마쳤다.
“아가씨, 마님께서 도련님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부탁이야. 세라도 없는데 로벨을 계속 혼자 둘 수는 없어. 포션만 주고 바로 나올게. 응?”
로베르의 방 앞. 아리엘이 자신을 가로막는 시녀의 팔을 잡으며 애처롭게 부탁했다.
계속되는 간청에 복도를 살피던 시녀가 방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나오셔야 해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사샤.”
방안으로 달려 들어간 아리엘이 허겁지겁 품 안에 숨겨 두었던 포션을 꺼냈다.
“로벨, 로벨 일어나 봐. 누나야. 응? 이거라도 먹어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녀가 서둘러 누워 있는 동생의 몸을 흔들었다.
“로벨?”
손끝에 닿는 촉감이 이상했다. 마치 단단한 나무같이. 깨달음은 순식간에 아리엘의 전신을 덮쳤다.
“죽었어…….”
온기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로베르의 몸은 지독히도 차가웠다. 마치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처럼.
“히익!”
겁에 질린 그녀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복도를 지키고 있던 시녀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사샤! 로벨이! 로벨이……!”
바닥을 기다시피 시녀에게 다가간 아리엘이 침대 위를 가리켰다. 죽은 로베르의 모습을 확인한 시녀 사샤의 얼굴이 아리엘과 마찬가지로 창백하게 질렸다.
전날 세라가 사라진 이후 로베르에 방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사만사 백작 부인이 유일했다.
“사샤, 어머니. 어머니께도 알려야―!”
“안됩니다!”
사샤가 급히 아리엘을 붙잡았다.
“아가씨, 잘 들으세요. 아가씨와 제가 이 방에 들어왔다는 것도, 로베르 도련님께서 돌아가신 사실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셔야 합니다. 마님께 절대 들켜서는 안 돼요. 아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엘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사샤는 자신의 어린 주인을 꽉 끌어안았다.
“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밖에 도움을 청해서라도. 어떻게든 아가씨만은…….”
“사샤. 나 무서워. 어머니가 이상해. 그렇지? 사샤 너도 알고 있지?”
“그건 마님이 아니에요. 아가씨. 그게 마님일 리 없어요.”
사샤는 이틀 전 저택의 지하의 와인 창고에서 발견한 끔찍한 공간을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피로 물든 그 공간 한가운데 사만사 백작 부인의 모습을 한 그것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도.
지하에서 급히 도망친 사샤는 계단 위에 있던 세라와 마주쳤다.
겁에 질린 그녀를 보며 세라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사샤는 세라를 놔둔 채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런 세라를 지하에서 올라온 사만사 백작 부인이 발견했다.
사샤는 2층 기둥 뒤에 숨어 이 모습을 지켜봤다. 세라가 실종된 것은 그 직후였다.
다른 사용인들에게서 세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샤는 사만사 백작 부인의 정체를 직감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마물. 며칠 전 황후 폐하와 황태녀 전하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그 괴물과 같은 것이 분명하다고.
그러나 겁에 질린 그녀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떨어 놓을 수 없었다.
저택 안의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로베르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녀는 자신의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어린 아가씨를 보듬었다.
“아가씨, 우선 방으로 올라가세요. 절대 방 밖으로 나오시면 안 돼요. 마님께는 아가씨가 감기에 걸려 방에서 쉬어야 한다고 말씀드릴게요. 그러면 며칠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사샤는? 너는 어쩌려고?”
“그 사이 제가 도움을 청할게요. 만찬회 준비로 다들 바쁘니 제가 잠깐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들켜도 잘 둘러댈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사샤에게 건넸다.
사만사 백작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목걸이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었다.
“이거면 신분 증명이 될 거야. 조심해야 해.”
“예, 아가씨.”
* * *
“살롱에서 실종된 귀족들이 돌아왔다라―.”
“예, 전하. 실종된 다섯 명 모두 돌아온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키리에의 보고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돌아온 사람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세스의 물음에 키리에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 저었다.
“더는 사람이 아닐 거다.”
“그럼 모두……?”
“돌아온 다섯 모두 실종 당시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병동 진찰 기록을 살폈지만 상처하나 없이 깨끗해. 그들을 진찰한 의원의 진단한 병명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뿐이다.”
“기억 이상이겠지.”
“예, 전하. 죽은 기사단장의 증세와 같습니다.”
“놈들을 살려 둬선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을 해치기 전에 죽여야 해.”
하지만 마물이 빼앗은 몸은 제국에서도 이름난 고위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
접근이 쉽지도 않을뿐더러 무턱대고 덤볐다간 오히려 이쪽의 전력이 드러날 수 있었다.
“자칫하다간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놈들이 원하는 거겠죠.”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알기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물을 처리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놈들이 마물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죽는다면 살인이 된다.
황제에게 향했던 여론을 어렵게 돌려놓았는데 그 손에 내전의 빌미를 쥐여 줄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건 놈들이 사람들 앞에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만든 후 기회를 노려 처리하는 겁니다.”
마물의 몸으로 되살아난 글로리아는 다른 마물의 요력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가 인간의 모습을 한 마물을 지목하는 것과 해당 마물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전투 중 사람들이 어떻게 흩어질지도 알 수 없는 마당에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건 무리였다.
‘탐지 마도구가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인간의 모습으로 정체를 숨긴 마물들을 탐지, 추적하기 위해 게롤트와 키리에의 가신들이 힘을 합쳐 마도구 개발에 힘을 쏟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글로리아는 문득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확실한 방법 하나를 떠올렸다.
“놈들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할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피다. 놈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피와 살이지. 식욕에 치우친 놈들의 본능을 자극하면 모습을 드러낼 거다.”
세스가 뒤늦게 사실을 깨닫고 긍정했다.
“확실히, 인간의 모습이 되면 주변의 시선이 있으니 강제로 식욕을 억제해야겠죠.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들어서 식욕을 자극하면 분명 반응이 있을 겁니다.”
“그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치료소에 혈액 팩이 있으니 그걸 사용하면 됩니다.”
게롤트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이제 놈들을 적절한 무대에 끌어들이기만 하면 되겠군요.”
“사만사 백작 저택을 치면서 백작 부인의 살롱도 함께 치는 게 낫겠군. 퇴로는 확실하게 끊어 두는 게 좋다.”
그레이와 크레도의 말에 파렐도 동의했다.
“제 생각에도 놈들을 살롱으로 유인한 후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살롱의 회원인 다른 귀족들이 목격자가 될 테니까요.”
“양쪽을 함께 칠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져선 안 된다. 놈들이 뭉쳐 있으면 위험할 수 있으니 적당히 떨어뜨려 놓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