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너로 채워봐도
밤을 너로 채워봐도
-1권-
#1화 내가 너 찾기로 맘먹은 이상 못 찾을 것 같아?
#2화 키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아 버렸으니까
#3화 누가 그래? 우리가 연인이 될 수 없다고
#4화 살려 줘, 서유주
#5화 너인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면 네 체취도 감췄어야지
#6화 널 내 곁에 둘 수 있는 관계라면 뭐든 돼야겠지
#7화 결심했어, 24시간 너와 붙어 있기로
#8화 키스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9화 미안한데, 난 너한테서 서유주 뺏을 거다
#10화 너랑 다시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도 버텼는데 이쯤이야
#11화 이젠 네가 싫다고 해도 너 놓아줄 생각 없으니까
밤을 너로 채워봐도
#1화 내가 너 찾기로 맘먹은 이상 못 찾을 것 같아?
태국의 밤거리는 화려하면서도 시끄러웠다.
유주는 술집 밖까지 떠나가라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휴가를 맞아 진희와 태국 여행을 왔다. 오랜 친구이자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진희는 저녁을 급히 먹었는지 체기가 좀 있다고 했다.
비상약으로 가져온 소화제를 주긴 했지만, 진희는 미안한 얼굴로 탄산음료를 찾았다.
‘시원한 사이다 한잔 먹으면 답답함이 쑥 내려갈 것 같은데…….’
마침 물도 더 사야 할 것 같아 편의점으로 가는 길이다.
“술을 왜 길거리까지 나와서 먹지?”
양쪽으로 술집이 즐비한 거리엔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며 밤을 즐기고 있었다.
유주는 인파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게 몸을 웅크리고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과 자유로운 몸짓으로 춤추며 밀집된 사람들. 낮보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훨씬 더 활기와 열기를 띠는 거리가 유주에겐 낯설기만 했다.
편의점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어쩐 일인지 몇 블록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Excuse me.”
(실례합니다.)
유주는 여럿이서 무리 지어 춤추는 사람과 닿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지만 자꾸만 제 쪽으로 뒷걸음질하는 남자 때문에 멈칫했다.
“왜 이래, 이 사람? 왜 자꾸 다가오는 건데?”
일부러 제 진로를 방해한다는 느낌이 너무나 확연했다.
유주는 다시 피해 가려다가 남자가 노골적으로 막아서자 헛웃음이 나왔다.
술김에 하는 희롱이든, 원래 그런 성격이든 유주는 호락호락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Excuse me! Could I get through, Please!”
(실례합니다! 지나가도 될까요!)
유주는 쌀쌀맞게 눈을 부릅뜨곤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큰 소리로 외쳤다.
네가 그래 봤자 전혀 무섭지 않다는 걸 남자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Hey! Play with me!”
(헤이! 나랑 놀자!)
금발에 파란 눈을 한 남자가 맥주병째로 술을 꿀떡꿀떡 마시며 다가왔다.
“미안한데, 난 지금 그쪽이랑 놀 시간 없거든요?”
술에 취해 치근덕대는 남자의 행태가 전혀 반갑지 않은 유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친구들이랑 재밌게 노세요. 알았죠?”
괜히 빌미를 만들어 시비가 붙지 않게, 어색한 웃음이나마 지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I’m busy. Sorry.”
(나 바빠. 미안.)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의사를 표현한 뒤 돌아서던 유주는 제 팔을 휘어잡는 남자의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유주가 불쾌함에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치며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거 안 놔?”
유주는 다시 한번 손목을 비틀며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시끄러운 음악에 목소리가 묻히고 말았다.
남자가 번들번들 웃으면서 뭐라고 지껄였지만 유주의 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라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있어! 놀러 왔음 곱게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희롱을!”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유주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켰다.
한 손으로 조작하려니 힘들긴 했지만 겨우 카메라 앱을 켜곤 남자의 얼굴을 향해 들이밀었다.
“I’m filming a video!”
(나 동영상 촬영 중이야!)
유주가 자신을 찍고 있단 말을 듣자 남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남자가 유주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으려고 손을 휘저었다.
“어머! 이젠 남의 전화까지 빼앗으려고 해? 경찰 부른다? I’ll call the police!”
남자에게 스마트폰을 뺏기지 않으려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리치던 유주는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위로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본 직후다.
투박한 손이 얼굴로 날아올 것을 직감한 유주는 잔뜩 위축돼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몇 초가 흐를 때까지 제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화난 남자가 폭력을 쓰려고 손을 올리긴 했지만 마음이 바뀐 걸까?
유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
제 앞을 막아선 낯선 남자의 등이 보였다.
누구……?
큰 키, 넓은 어깨, 강인해 보이는 등.
유주는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서 놀란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국 사람?
남자는 허공에서 외국 남자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반소매를 입은 남자의 팔뚝에 힘줄이 선 걸 보니 두 사람 사이에 힘겨루기가 있는 듯했다.
유주는 그 와중에도 남자의 팔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자다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섬세해 보이는 근육의 흐름이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괜찮아요?”
곱슬기가 있는 갈색 머리의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와 유주의 상태를 물었다.
안경을 낀 남자는 유주의 몸에 손대지 않은 채 뒤로 좀 물러나자는 몸짓을 취해 보였다.
유주는 누군가 도와주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순순히 남자가 시키는 대로 뒤로 물러났다.
강단 있게 소리는 쳤지만 외국인이 힘으로 제압하려고 할 땐 좀 무서웠다. 그래서인지 한국 남자들이 나타나 도와주자 다리의 힘이 스르르 풀려 버렸다.
“저 친구한테 맡겨요. 귀공자같이 생겼어도 주짓수다 뭐다, 못 하는 운동이 없으니까.”
“아…… 감사합니다.”
유주는 검은 머리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도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위압감이 깊었다.
거리가 멀어지고 음악 소리도 높아, 두 남자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검은 머리 남자가 외국 남자를 말로 완벽하게 제압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남자가 손목을 내팽개치듯 놓아주자 외국 남자가 바닥에 침을 뱉곤 자리를 옮겼다.
“다행이네요. 말로 잘 끝난 것 같죠?”
안경을 낀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
유주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돌아서는 순간 설레는 마음으로 얼굴을 확인하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태…… 강석?
설마, 아닐 거야. 태강석이 왜 여기 있어?
이런 우연도 다 있나?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얼굴 한번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았던 태강석을 외국에서 만난다고?
HK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HK 건설 전략기획부 본부장, 태강석.
오래전 부모님이 그의 집, 별채에 살면서 10년쯤 집안일을 봐줬었다. 덕분에 강석과는 친구처럼 자랐지만 20년 전쯤 그 집을 나오게 되면서 헤어지게 됐다.
그 뒤로 강석은 저를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유주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강석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의 기사란 기사는 다 찾아보았다. 그러니 강석의 얼굴을 단박에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강석이가 날…… 알아볼까?
HK 회장실 직속 비서실에서 일하는 유주는 미국 지사에서 일하던 강석이 귀국하면서 같은 건물에서 일하게 됐다.
그러나 HK 그룹 후계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이 올려다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올려다보려고 그를 좋아한 것도 아니다.
그저, 회사 내에서 오가다가 혹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얼굴이라도 한번 보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생각지도 못한 타국에서 강석을 만나게 되다니.
“괜찮습니까?”
다가온 강석이 남자에게 잡혔던 손목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강석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약간 넋을 놓은 듯한 유주의 얼굴을 살폈다.
민기와 가볍게 맥주 한잔하러 나왔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유주를 발견했다. 여자 혼자 밤거리에서 행패를 당하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저기요?”
민기는 강석의 질문에도 대답 없이 멍해 보이는 유주의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눈을 깜빡이는 유주가 강석과 민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했느냐는 듯.
“괜찮냐고요.”
민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아, 네. 괜찮아요. 덕분에…….”
유주는 저도 모르게 강석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수굿이 내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강석과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자를 대고 각도를 재면서 완벽하게 그린 듯한 눈썹과 흑요석을 박아 놓은 듯한 매력적인 눈동자.
의술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환상적인 코는 또 어떻고.
신 중에서도 가장 금손이 빚어 놓은 듯한 강석의 얼굴은 어느 것 하나 티끌만 한 흠집도 없었다.
강석의 얼굴이야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새삼 감탄이 절로 나왔다.
유주는 두근대는 제 심장 소리가 쿵쿵대는 음악 소리 때문이라고 치부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요.”
“뭐.”
강석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도 유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낯익지?
분명 최근에 얼굴을 인지할 만큼 가깝게 만난 적은 없는 사람이다.
오가다 스치듯이 본 얼굴이라 무의식중에 남아 있는 걸까?
그런 것치곤 유주에 대한 친숙함이랄까, 편안함이 남달랐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
“네?”
강석의 질문에 유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날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그럼 어쩌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저를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아니, 강석아. 너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어디서 쌍팔년도 작업 멘트를. 하, 하. 하하.”
민기가 어색하게 웃으며 강석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런 게 아니라.”
강석은 민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유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선하지만 강단이 느껴지는 동그란 눈매, 마음을 감추지 못할 것 같은 투명한 눈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