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랜만이네요, 선배

“한은재의 빛나는 인생을 위하여, 건배!”

챙!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선창을 외친 세라는 잔에 든 맥주를 벌컥벌컥 목구멍으로 넘겼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은재 역시 동시에 잔을 비웠고 두 여자는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는 타이밍까지 똑같았다.

“크, 술맛 좋다.”

“그러게. 오늘따라 술이 다네.”

은재는 세라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곧바로 은재의 손에서 맥주병을 가져간 세라는 친구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원래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더라.”

“누가 그래?”

“우리 아빠.”

세라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덩달아 은재도 피식 웃게 되었다. 오징어 하나를 집어 질겅질겅 씹던 세라는 갑자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너희 회사 진짜 웃긴다. 경영난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해고? 웃기시네. 인건비 줄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속은 모르지. 회사가 어려워진 건 사실이야. 최근에 계약 불발된 것도 많고, 대금도 밀리고, 이래저래 힘들긴 했거든.”

“그래도 넌 화도 안 나냐? 나 같으면 확 엎고 나왔을 거다. 하루아침에 실직자 만든 회사가 뭐가 좋다고 편을 들어?”

“사실은 사실이니까. 나 말고도 해고된 사람 몇 명 더 있어. 갑작스럽긴 하지만, 별수 있나. 어쩔 수 없지 뭐.”

“아주 성인군자 납셨네. 은재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너 같은 고급 인력을 제 발로 걷어찬 회산데 화도 안 내고. 참…… 내 친구지만 순딩이도 이런 순딩이가 없다.”

세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은재의 해고 소식을 들은 건 오늘 낮.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하려고 전화했더니 한은재는 해고 소식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메뉴가 밥에서 술로 바뀌었고 술집에 앉아있는 이유였다.

“나 바로 새 직장 구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나긋한 어조로 은재는 세라를 안심시켰다. 이깟 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은재가 답답하긴 해도 세라는 뱉은 말은 꼭 실천하는 사람이 한은재라는 걸 알기에 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자, 마셔! 오늘은 이 언니가 쏜다.”

다시 한번 두 개의 잔이 청명한 소리를 냈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어 갔다.

* * *

“나 왔어.”

세라와 헤어지고 곧장 집으로 온 은재의 시선이 현관 바닥으로 향했다. 오래되어 낡고 때 묻은 운동화 한 켤레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운동화를 가지런히 놓은 그녀는 신발을 벗고 방바닥에 발을 디뎠다.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인혁은 씻고 있는 듯했다.

“빨래통에 좀 넣어놓으라니까.”

메고 있던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은 은재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인혁의 옷가지들을 주워 빨래통에 집어넣었다. 그리 넓지 않은 투룸이라 조금만 지저분해도 집안이 더러워 보였기에 거의 매일 청소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왔어?”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허리춤에 수건을 두른 인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혁이 먹은 것을 치우던 은재는 얼른 화장실 쪽을 쳐다보았다.

“또 라면 먹었어? 밥 좀 먹으라니까.”

“자기가 없는데 나 혼자 밥 먹어봤자 뭐 해. 맛도 없는데.”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

“아니. 진짠데?”

인혁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냐는 얼굴로 은재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볼에 쪽, 뽀뽀했다.

“나 자기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알잖아. 근데…… 술 마셨어?”

인혁이 은재의 가까이에서 코를 킁킁거렸다. 약하긴 하지만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세라랑 조금 마셨어. 냄새 많이 나?”

“조금. 취한 건 아니지?”

“안 취했어. 딱 보면 몰라? 실망이다, 서인혁.”

“아니, 자기가 술 마신 건 오랜만이라서. 평소에 술 잘 안 마시잖아.”

“…….”

은재는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한 인혁은 은재의 어깨를 잡아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자, 말해봐. 무슨 일인데?”

“…….”

“무슨 일이냐니까?”

은재는 빨리 말해보라고 재촉하는 인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회사에서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인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옷부터 입고 와. 그러다 감기 걸려.”

“알았어. 얼른 입고 올게.”

후다닥 방으로 들어간 인혁은 금세 옷을 입고 나왔다. 그는 소파에 앉은 은재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은재는 작게 숨을 내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해고당했어.”

“뭐……?”

인혁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해고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요즘 회사가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래. 나만 해고당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당했어. 좀 씁쓸하긴 한데 나 곧 새 직장 구할 거야. 금방 구할 테니까 너무 걱정…….”

“안 해.”

“……!”

인혁이 와락 끌어안은 탓에 은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저 놀란 눈을 깜빡이며 인혁의 품에 안겨있을 뿐이었다.

“한은재 같은 인재를 내팽개친 회사 따위 쳐다보지도 마. 다신 갈 생각도 하지 마. 자기 새 직장 구할 때까진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왕 쉬게 된 김에 며칠, 아니 몇 달 푹 쉬어도 돼.”

“…….”

가슴 속에서부터 울컥한 감정이 점점 올라왔다. 괜찮다고, 네 옆엔 내가 있다고 말해주는 남자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은재는 생각했다. 그녀의 두 팔이 살포시 인혁의 등을 끌어안았다. 주책맞게 눈물이 나오려 했다.

“고마워…… 근데 몇 달은 안 돼. 우리 결혼 자금도 모아야 하는데…….”

“지금 결혼 신경 쓸 때야? 나 나름 잘 버는 거 알지? 그러니까 몇 달쯤이야 괜찮다고. 우리 주말에 여행 갈까?”

인혁은 은재를 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마음을 다독여주려고 애썼다. 따스한 온기 때문일까. 결국 은재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흑…….”

“뭐야. 자기 울어?”

흐느끼는 소리에 인혁은 팔을 풀고 은재를 보았다. 또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는 인혁에게 은재는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사랑해.”

그녀의 촉촉이 젖은 목소리에 인혁은 살짝 미소 지었다.

“나도 사랑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그들의 주변에 퍼져나갔다.

* * *

지이잉. 지이잉.

며칠 뒤, 은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은재는 잠시 모르는 번호가 떠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한은재 씨 맞으십니까?]

“네. 맞는데요.”

[HS 건설에서 이력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신가요?]

“……!”

‘HS 건설’이라는 말에 은재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에서 연락이 올 줄이야.

HS 건설은 예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회사였다. 채용이 되든 안 되든 일단 이력서라도 넣어보자 생각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연락이 오다니.

“네. 괜찮아요.”

은재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재빨리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얘기를 듣는 그녀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밝아졌다.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통화가 끝이 났다. 은재의 만면엔 미소가 가득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면접…… 아, 옷. 옷부터 골라야지.”

책상 앞에서 벌떡 일어난 은재는 방으로 달려가 행거에 걸린 옷들을 보았다. 면접에 입고 갈 옷을 골라야 하는데 뭘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합격이 아닌 면접 보러 오라는 소식인데도 기뻤다. 마음이 붕 뜬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은재는 제가 가진 옷 중에서 제일 단정한 옷을 골라 갈아입었다. 화장도 하고 소지품도 챙긴 뒤, 오랜만에 안 신던 구두도 꺼내 신었다. 아직 면접 시간은 남았지만 왜인지 마음이 급했다.

‘늦는 것보다 빨리 가는 게 더 좋겠지.’

현관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중에도 떨림은 계속되었다. 빌라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면서 심호흡을 했다.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것만으로도 이렇게 떨리는데, 그곳에서의 면접이라니. 너무나 떨리는 일 아닌가.

‘침착해, 한은재. 떨지 말자.’

은재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이 이렇게 떨리고 설레기는 처음이었다.

30분이 채 안 돼서 HS 건설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서 올려다봐도 다 볼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높은 건물이었다. 은재는 한쪽 어깨에 멘 가방끈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로비로 들어갔다.

“와…….”

로비는 매우 넓었다. 학교 운동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부터 인테리어 전부가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전에 다니던 회사와는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꿀꺽, 절로 침이 삼켜졌다. 로비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우뚝 서 있으니 뭔가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10층으로 오라고 했는데.”

은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마침 1층으로 온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고 10층까지 올라가는 건 금방이었다.

“안녕하세요. 면접 보러 오셨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남자의 친절한 안내에 은재는 전무실 문 앞에 섰다.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고 똑똑,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재는 손잡이를 돌려 서서히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문을 다 열었을 때, 은재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은재 씨?”

제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어딘지 낯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순간, 은재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현…… 승하……?”

“오랜만이네요, 선배.”

* * *

톡, 톡.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전무실 안에 가득했다. 승하는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진 이력서 하나를 유심히 보았다. 하반기 인사팀 채용 공고에 이력서를 넣은 사람들은 많은데, 그중 딱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네.”

한은재. 대학 선배이자 제 첫사랑. 그녀의 이력서를 보자마자 당장 면접을 잡으라고 인사팀에 얘기했다. 최대한 빠를수록 좋다고 했고 인사팀에서는 오늘 은재가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면접 시간은 꽤 남았는데 얼른 그녀를 보고 싶었다.

“네 시까지 어떻게 기다리냐.”

시간은 원래 빠르게 가지만 지금만은 더 빨리 가기를 바랐다. 그녀를 보려면 두 시간 정도가 남았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은재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귓가에 들렸고 승하는 재빨리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들어오세요.”

천천히 문이 열리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여자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빨리 그녀를 마주하게 된 승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