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물세 살의 세연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길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어깨 위에 흐트러져 있었고 꼭 다문 입술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금씩 양쪽으로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짙은 쌍꺼풀의 두 눈은 반짝이며 자연스럽게 웃음을 담고 있고 하얀 얼굴은 투명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녀 앞에 앉은 젊은 남자는 여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었다.

“일본 출장은 안 가시는 게 좋겠어요. 이달은 안 좋은 기운이 많은 달이고 멀리 떠나는 게 위험하게 보이고 있어요. 조정하실 수 있겠어요?”

“네? 아 네.”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아…… 좋은 여자를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순간 세연의 미간이 찡긋거렸다.

“손님께서는 이미 만나고 있는 분이 계시잖아요. 제가 아까 그분과 좋은 인연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고 두 분의 합이 좋아 내년이며 결실을 볼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남자의 단점도 모두 안아 주는 분이에요. 본인 성격도 안 좋은데 뭘 더 바라세요?”

남자는 솔직하게 말하는 세연의 말에 눈 하나도 깜짝 안 하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욕심내지 마세요. 지금도 본인 운에 넘치게 좋은 사람 만나고 있어요. 주변의 여자들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 애인보다 나은 사람 못 찾았잖아요. 너무 많은 욕심내지 말고 내후년까지 열심히 일하면 그 뒤에는 자기 사업으로 잘될 수 있습니다.”

“아니, 욕심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여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깐 물어본 거죠.”

“아저씨 예쁜 여자만 보면 욕심내는 거 다 알거든요. 그러시면 나중에 벌 받아요.”

남자는 조용히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하며 방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세연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저씨 망신수가 있다고 조심하라고 해도 소용없네. 하여튼 간에.’

“이제 네 명밖에 안 봤는데 오늘은 좀 힘들다.”

유독 기가 달리는 날이 있긴 하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 같았다.

‘오늘 아침이 부실했어. 너무 조금 먹고 나왔나 보다. 많이 먹을걸.’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서 힘든 거라며 세연은 앞에 있던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렇게 오는 손님 모두 다 인연이 되어 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예약을 받고 안 받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 신이 정해 주는 일이기도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세연은 혹시나 할머니께 혼날까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침 총무가 살짝 문을 열며 세연과 눈이 마주쳤다.

“손님 오셨어요?”

“네.”

“제가 좀 딴짓을 해 가지고 한 5분만 있다가 들여보내 주세요. 집중을 좀 해야 할 거 같아요. 그리고 총무님, 저 물 좀 더 가져다주시겠어요?”

“잠시만요.”

40대 중반의 총무는 세연이 처음으로 점사를 봐준 인연으로 시작돼 2년이 넘도록 총무로 일해 주고 있었다. 엄마처럼 힘들 때면 언제나 세연의 얘기를 들어 주고 기도를 갈 때 자주 동행해 운전을 해주기도 하는 좋은 분이다. 일을 같이하고 있지만 일을 넘어서 세연을 딸처럼 돌봐 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이혼하고 두 딸과 지내다 보니 더욱 세연을 애틋하게 생각해 주고는 했다.

물과 세연이 좋아하는 견과류를 같이 들고 오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우리 총무님 월급 올려 드려야겠어요. 예약 전화 받는 것도 힘드실 텐데. 사람들 상대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거기에 저까지 매일 이렇게 챙겨 주시고. 반찬도 매번 가져다주시고. 저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 옆에 있으니깐 정신없으시죠?”

“그런 얘기 마세요. 애기씨처럼 밝고 착한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요. 정신이 없긴요. 매일 즐겁죠. 그리고 월급은 지금도 차고 넘치게 주고 있어요. 저처럼 쉽게 돈 버는 사람이 어딨다고. 힘들 텐데 이것 좀 드시고 계세요. 손님 모실게요.”

세연에게 점사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그녀를 애기씨라고 불렀다. 어리고 예쁜 무당이어서 그렇게 불려야 한다고 신어머니가 얘기해 주었었다. 그래서 세연은 신내림을 받은 뒤부터 그렇게 애기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회사에서 얘기 안 하시고.”

경준은 한 달 만에 본가에 오게 됐다. 아버지가 할 얘기가 있다고 들어오라는 말씀 때문이었다.

“넌 집에도 안 오니? 독립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도 같은 서울에 살면서 너무 안 오는 거 아냐?”

고생과는 거리가 먼 우아함이 흐르고 따뜻한 분위기가 흐르는 경준의 어머니였다.

“바빠서 그랬죠. 주말에도 운동하고 나면 시간이 없어서요.”

“운동하느라 집에도 못 온다는 게 말이 되니? 그리고 적당히 휴식도 취해야 더 일을 잘하는 거지.”

“알았어요. 자주 올게요. 죄송해요.”

식탁에 앉자마자 아버지가 경준에게 말했다.

“형이 그러는데 김 부장하고 트러블이 좀 있었다면서?”

“네, 김 부장님이 제가 하는 일에 좀 계속 브레이크를 거세요.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건지 제 실력이 맘에 안 드는 건지 제가 제안했다고만 하면 자꾸 그러시네요. 여태 참았는데 오늘은 제가 할 말 좀 했습니다.”

“원래 그 사람이 좀 그런 게 있어. 근데 그런 사람도 품어서 내 사람으로 만들 줄 알아야지.”

“전 생각이 좀 달라요. 제가 사인한 사안은 꼭 문제 제기를 하면서 회장님 동의가 있었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라면 저와 함께 일 못 하죠. 굳이 그런 사람까지 감싸 안고 싶지 않아요.”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두 사람의 회사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집에 가기 위해 나서는 경준에게 어머니는 커다란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네가 집에 오는 걸 싫어하니 갈 수도 없고 챙겨 줄 수가 없잖아. 이렇게 왔을 때라도 가져가. 반찬하고 찌개 몇 가지 준비했어. 가져갈 거지?”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너 선 안 볼래? 알아, 너 싫어하는 거. 우리는 너 정략결혼 같은 거 시킬 생각 없어. 근데 엄마 친구가 잘 아는 아가씨인데 미술 전공했다더라. 지금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대. 물론 집안도 좋고. 정말 놓치기 아까워서 그래. 네가 뭐 여자 친구 있다고 하면 이런 말도 안 하지만 없잖아.”

“엄마, 나 자만추라고 했지? 그렇게 만나는 거 내 스타일 아니에요. 형은 부모님 원하는 결혼 할 거니깐 나는 그냥 좀 내버려 두세요.”

어머니가 말을 더 이으려 하자 경준이 빠르게 현관을 나섰다.

“갈게요.”

그렇게 도망치듯 나와 경준은 자신의 아파트로 서둘러 왔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저녁에 퇴근해 집에 들어올 때 불이 다 꺼져 있는 게 싫어 경준은 항상 불을 켜 놓고 출근하는 버릇이 생겼다. 원해서 한 독립인데 유독 불 꺼진 집에 들어오는 건 너무나 싫었기 때문이다. 가져온 음식들을 정리하고 씻고 나오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나이 어리고 경력이 짧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과는 일을 같이할 수 없지.’

김 부장과의 문제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었는데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고 나니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경준에게는 연애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 생겨도 멀리할 생각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워라밸이 균형을 이루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그는 그냥 일에만 충실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오너의 아들이 아닌 이경준으로서 객관적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김 부장님, 계속 이러실 겁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왜 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계속 딴지를 거시는 거예요? 심지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도 계속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시잖아요. 지금은 문제 제기보다 지지해 주고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같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한 팀 아닙니까?”

“전 그냥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문제라는 거 여기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부분입니다. 그런 걸 감안하고 시작하는 건데 왜 굳이 이런 식으로 문제를 만드세요? 이건 저를 디스하시는 거잖아요.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경준은 회의실의 모든 직원을 내보냈다.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이사님을 디스한 게 아니고 일에 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계속 같은 말뿐이시네요. 자,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회장님과 상무님과 다릅니다. 저는 아니다 싶은 건 바로 고치거나 버립니다. 끝까지 내 식구 감싸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김 부장님 신뢰하는 건 알지만 저하고 자꾸 이런 트러블이 생기면 같이 못 합니다. 앞으로 일하시면서 잘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제 얘기는 끝났습니다.”

회의실을 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온 경준은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쉽게 흥분하는 성격은 아닌데 오늘 회사에 입사한 후로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게 됐다.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 뭐 이런 일로. 내가 할 말은 했으니깐 앞으로 두고 봐야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거든.”

“잘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상하게 이사님에게만 적대적으로 대하고 직원들도 휘젓는 게 보이더라고요. 경고 잘하셨어요.”

“정 실장, 나 커피 좀 사다 줄 수 있을까? 매번 미안해. 내가 커피만큼은 예민하게 굴어서. 정 실장이 사다 주는 커피만 입에 맞아 가지고 매번 신세를 지네.”

“그럼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경준은 정 실장이 나가고 의자에 깊게 기대었다. 아버지나 형이 뭐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이 문제만큼은 자신의 부하 직원에 대한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했다.

세연은 황당한 질문을 하는 손님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아니, 태어나는 날짜도 중요한데 애기씨가 날짜를 정해 주시고 그날 맞춰 낳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손님, 물론 태어나는 날이 중요하기는 한데 그걸 어떻게 막습니까? 좋은 날짜를 뽑을 수는 있지만 그날짜에 맞춰 낳게 해달라는 건 말이 안 되죠.”

“왜 안 돼요? 부적을 쓰든지 굿을 하든지 해서 좋은 날 태어나게 해 주시면 되죠.”

“저 굿 안 하는 거 모르세요? 그리고 제가 무속인이기는 하지만 태어나는 날을 어떻게 막습니까? 그건 할 수 없어요. 다른 분들은 모르겠는데 저는 안 합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다른 데서 해 주면 여기서도 해 주는 거지.”

“아놔 진짜! 내가 삼신할머니예요? 아이 낳는 날을 어떻게 맞춰요? 그렇게 욕심부리면 안 된다고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죠. 전 안 되니깐 그만하시고 나가세요.”

손님은 성에 안 찬 듯 계속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제발 그런 욕심부리지 마시고 며느님한테 잘하세요. 집안에 복 가지고 들어온 며느리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걸로 만족하시고 잘해 주시면 되지. 이게 무슨 억지예요?”

결국 손님은 개운치 않은 얼굴로 법당을 나섰다. 간혹 아기 낳는 날짜를 잡아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세연은 절대 그런 점사를 봐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손님들이 올 때면 가끔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해서 보내야 했다.

‘아, 피곤하다. 내일 쉬니깐 영주 언니한테 가서 언니나 도와줘야겠어.’

잠시 뒤 열 번째 손님이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2.

“아이스아메리카노 세 잔하고 스트로베리 요거트 스무디 한 잔 주세요.”

점심시간 무렵부터 이미 손님들로 카운터의 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가려는 근처 회사원들로 가득했다. 강남 빌딩 숲에 커피숍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이곳 ‘어니스트’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좋은 원두에 저렴한 커피 가격이 주변 직장인들의 커피 성지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세연은 추출된 커피 샷 두 잔을 컵에 붓고 찬물을 붓기 시작했다.

“여기 주문하신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 스트로베리 요거트 스무디 한 잔 나왔습니다.”

바쁜 와중이지만 세연은 환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워낙 웃는 얼굴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게 그녀를 더욱 신나게 만들었다. 같이 일하는 알바생도 능숙하게 일을 잘해 다행히 주문 줄은 점점 줄어들었다.

“너 그냥 나랑 커피숍이나 하자. 너처럼 잘하는 알바 구하기도 힘들고 구해도 금방 그만둬서 내가 흰머리가 난다니깐. 늙는다구. 내가 이제 스물여덟 밖에 안 됐는데 흰머리가 말이 되냐? 어? 어때? 나 좀 도와줘. 돈은 요구하는 대로 다 줄게.”

“사장 언니! 우리 할머니한테 혼난다. 왜 자꾸 꼬셔? 무당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무시는 누가 무시하냐? 너네 할머니 무서운 거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두 달 전에도 우리 외할머니 뵙고 오라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얘기해 줬을 때 내가 건강한 외할머니한테 무슨 소리 하는 거냐며 무시했다가 바로 다음 날 돌아가셨잖아. 그때 정말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고. 내가 모른다고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그래서 잘 알지. 너네 할머니 무서운 거. 할머니 거역하라는 게 아니라 너 점사 봐주는 거 조금 줄이고 나 좀 도와달라고. 너도 좀 쉬엄쉬엄하고 이렇게 나와서 바람도 좀 쐬고 하면 좋잖아.”

카페 어니스트의 사장이자 세연의 사촌 언니 영주는 그녀가 또래들처럼 자연스럽게 세상에 섞여 살기를 바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오롯이 혼자 겪어야만 했던 것들이 안쓰러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어니스트 알바는 모르겠는데 쉬면서 하고 싶기는 해. 요즘 들어서 힘에 좀 부치네. 근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난 그냥 신의 제자인데.”

세연은 바로 신의 제자, 사람들이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속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무당이 된 세연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친척들이나 친구들 모두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세연의 외가와 친가 모두 절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기에 친척들은 모두 그녀에 대한 얘기를 쉬쉬하며 숨기기 바빴다. 그녀의 친할머니는 세연의 두 손을 잡고 애원하듯 물었었다.

“내림굿은 안 받을 수는 없는 거니? 세실리아, 미사는 빠지지 않고 가고 있는 거야? 아니지, 그랬으면 이런 일이 있지도 않았겠지. 할머니한테 말해 봐. 도대체 누가 너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라고 시켰어? 우리 신부님께 가서 고백 성사를 하자.”

세연은 신병에 시달리는 것보다 주변의 이런 상황들이 더욱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 본인도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며 울고 매달렸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는 건지 하나님께 빌고 빌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연의 몸과 마음은 점점 약해져 갔고 길거리에서 쓰러지기도 했었다. 몇 달을 거센 파도 속에 있는 것같이 치열하고 힘겹게 보낸 세연은 결국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자신의 길에는 혼자 서야 하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선명해진 이상 망설이는 것은 고통만 증가시킬 뿐이었다.

“세연아, 우리 아빠 말대로 싱가포르 가서 살자. 거기 가면 여기서 있었던 일 다 잊게 될 거야. 아빠 엄마는 결정했어. 그쪽 대학하고 얘기도 됐고.”

세연의 부모님 두 분 모두 의사였다. 사회적인 지위와 종교적 신념을 넘어 남들의 시선보다 딸의 고통을 가장 아파하셨었다.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딸이 갑자기 신병에 걸려 낯선 모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것을 참기 힘들어하셨었다. 하지만 밥을 먹지 못하고 갑자기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기도 했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는 딸을 무조건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은 세연과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갈 것을 결정했고 다른 환경에 가면 그녀가 달라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세연은 같이 갈 수가 없다. 그곳에 가도 세계 어디를 가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