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구 반 바퀴를 지나 파리에서

노을 진 센강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유람선 위에서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신 끊이지 않았다. 긴 전문가용 렌즈가 달린 카메라는 연속해서 톱스타 유준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무거운 반사판을 들고 있는 스텝은 팔을 후들거리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못했다. 최대한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모두 차유준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좋아요. 이번에는 재킷을 좀 벗어볼까요?”

카메라맨의 요구에 재킷을 벗으니 얇은 셔츠만 입은 유준의 넓은 어깨가 매우 도드라졌다. 열심히 운동해서 만든 다부진 몸과 날렵한 턱선을 뽐내며 유준은 계속 멋있는 표정과 자세를 지어 보이었다.

파리의 배경과 어우러져 원래도 멋진 유준의 매력이 한층 더 빛을 발하였다. 그는 유명 조각가들이 만든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이 유준의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드는 덕분에 사진은 더 자연스럽고 멋스럽게 연출되고 있었다.

“아주 좋아요. 유준 씨 이번에는 잠깐 다리 위쪽을 바라볼까요? 네 그렇죠.”

카메라맨은 카메라 화면을 확인하며 매우 흡족한 듯 웃었다.

한강처럼 넓지는 않은 비교적 좁은 센강을 잇는 다리는 무려 37개나 되었다. 지금 유준의 눈에 보이는 다리는 퐁네프 다리로 영화의 배경으로 나오며 사람들에게 더 유명해진 다리였다. 다리 교각에는 얼굴 조각상들이 여러 개 붙어있었다. 조각들은 하나같이 코가 오뚝하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지옥에 있는 악마들처럼 약간 무섭기도 하고. 희한하게 생겼네.

퐁네프 다리의 신기한 조각을 보다 조금 더 위로 시선을 들어 올린 유준은 갑자기 걸터앉아있던 난간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각상들의 얼굴과는 비교도 안 될 놀라운 얼굴이 유준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멈춰! 배 좀 멈춰!”

유준은 크게 소리치며 스텝들을 모두 제치고 다급하게 매니저인 전 실장에게 뛰어갔다.

“빨리 선착장에 배 좀 멈춰!”

특별히 화보 촬영용으로 대관을 한 바토 무슈 유람선이었기에 다른 관광객이 타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유준의 요구에 바로 배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근처에 선착장이 보였지만 아직 촬영이 끝나지 않았기에 멈출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너 왜 그래?”

“형! 저 위에, 저 다리 위에!”

이미 배가 다리 밑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상태라 다리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빠른 물살 때문인지 배는 어두운 다리 밑으로 금세 들어와 버렸다.

“아! 미치겠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강에 뛰어들어 헤엄이라도 쳐서 나가고 싶었다.

별로 물이 깊어 보이지도 않는데 가능하지 않을까? 정말 유준은 그런 절박한 마음마저 들었다.

“유준 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스텝들 모두 그의 이상한 행동에 놀랐다. 프로다운 모습으로 촬영을 하던 유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허둥지둥 대며 배에서 당장 내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애타는 유준의 마음을 모르는 배는 계속 유유히 지나갔고, 드디어 보이지 않던 다리 위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구소영!”

유준은 크게 소리쳤지만 조금 전 봤던 그리운 소영의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눈이 맞았어. 분명 나랑 눈이 맞았다고!

잠시였지만 자신과 눈이 맞은 게 분명하다고 유준은 확신했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구소영이 분명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너 헛것 본 거 아냐?”

유준이 10년째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찾고 있다는 걸 전 실장은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사람 잘 찾는 기자에게 그녀의 정보를 주고 찾아 달라 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찾지 못한 그 여자를 파리에서 봤다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너 잠깐 헛것 본 거야.”

연이은 일정으로 유준의 심신이 지쳐 잘못 본 거라, 전 실장은 그리 여겼다. 어떻게든 촬영을 이어나가려 전 실장은 유준의 어깨를 잡으며 진정시키려 했다.

“아니야. 절대 헛것 본 거 아니야. 꿈에서 봤을 때도 저렇게 선명하지 않았어. 소영이 분명했다고!”

“차유준! 조용히 해. 스텝들 다 듣잖아!”

어떻게든 전 실장은 유준을 잠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텝들이 다 듣는 데서 첫사랑을 운운하는 건 괜히 기삿거리만 제공할 뿐이었다.

“일단 촬영부터 끝내. 내린다고 한들 당장 찾지도 못하잖아.”

“형!”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너 벌써 데뷔 7년 차야. 이 사람들 다 너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인 거 몰라? 가더라도 일 다 끝내고 가!”

전 실장은 단호하게 말하며 유준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유준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마치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애처롭게 전 실장을 바라봤다.

“민우 형. 형 제발….”

“안 돼. 배 세우지 마시고 계속 촬영 이어가세요.”

전 실장의 말에 촬영은 계속되었지만, 유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도저히 좋은 표정과 모습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아. 이거 안 되겠는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카메라 감독은 촬영을 이을 수 없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마른 한숨을 쉰 전 실장이 유준의 어깨를 잡고 귓속말을 했다.

“배에서 내리면 너 혼자 도망갈 수 있게 해줄 테니, 빨리 내리고 싶으면 일에 집중하라고!”

* * *

소영은 유명한 플로리스트의 수업을 듣기 위해 비싼 수업료를 내고 파리로 와 있었다.

2년 전부터 소영은 대학가에서 작은 꽃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요즘의 꽃집들은 꽃만 파는 가게가 아니라 플라워 레슨으로 수익을 꽤 많이 얻고 있었다. 워낙 SNS가 활성화되다 보니 미국이나 유럽에서 꽃집 사장이 직접 레슨을 받고 사진을 올리면 사람들은 ‘좋아요’를 연신 눌렀고 그것은 장사 수완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소영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영애 말로도 그런 게 소위 있어 보이는 영업이라나. 결국, 소영도 홍보를 위해 비싼 레슨을 받으러 파리까지 와있는 것이었다.

원래 SNS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업을 시작하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영은 계속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진들만 올렸지만, 대부분의 유명 꽃집들은 사장의 얼굴까지 나오는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언니는 왜 기껏 예쁘게 태어나서는 얼굴을 써먹지 않으려 하는 거예요? 언니가 직접 사진에 나와야 홍보가 된다니까요! 파리 사진은 최대한 언니 얼굴이 잘 나오도록 찍어서 올려야 해요! 그래야 더 가게가 잘 된다니까요?-

계속 잔소리를 하던 영애의 말이 생각나 수업 중간에 얼굴이 잘 나오는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도저히 부끄러워서 못 올리겠다.

소영은 결국 이번에도 얼굴이 나오지 않은 사진들로만 골라서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파리의 풍경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유럽은 물론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었다. 생활비를 얻기 위해 돈 벌기 급급했던 그녀에게 여행은 사치였다.

수업을 핑계 삼아 온 파리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느끼는 여행의 행복감에 한껏 젖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도 바로 숙소로 돌아가기 아쉬워 거리를 걸으며 예쁜 풍경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행안내 책자 속의 퐁네프 다리 중간중간에 놓인 둥근 석조 테라스에 앉아 석양을 보는 사람들의 사진이 인상적이었기에 소영은 퐁네프 다리를 찾았다.

노을을 보며 센강을 찍던 소영은 멀리서 오고 있는 바토 무슈 유람선을 보다가 너무 놀라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놓칠 뻔했다. 유람선 위에서 톱스타로 유명해진 차유준이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계속 티브이로, 스크린으로 봐오던 그였기에 그의 모습은 늘 익숙했다. 하지만 그건 브라운관 속이었기 때문이지,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이렇게 널 다시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소영은 그와 시선이 맞은 느낌에 서둘러 몸을 숙이고 앉아 숨었다.

하아… 방금 눈이 맞은 거 같은데. 어떡하지?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분명 그와 눈이 맞은 거 같았다. 좀 더 빨리 눈을 돌려야 했는데, 멍하니 계속 쳐다봤던 게 잘못이었다.

“구소영!”

배 위의 유준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역시 눈이 맞았던 게 맞았어. 날 보고 말았어.

소영은 계속 움츠리고 앉아서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하게 기둥 뒤에 꼭꼭 숨어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를 태운 유람선은 이미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휴우. 이제는 나와도 되겠네. 소영은 그제야 잔뜩 숙였던 몸을 일으키고 길을 걸었다.

10년 만이었다. 10년 전에도 유준은 늘 혼자서만 밝게 빛났다. 그래도 그때는 그가 이렇게 유명한 연예인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와 마주쳤다는 사실을 어서 떨쳐버리고 싶었다. 10년을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담담하게 오늘을 넘겨야 한다. 늘 보고 싶었지만, 늘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와 자신은 사는 세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터덜터덜 걷던 소영이 길가의 벼룩시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꽃 사진을 찍을 때 함께 놓을 수 있을 만한 예쁜 그릇을 몇 개 집었다. 유럽의 풍경이 예쁘게 그려진 그림 액자도 몇 개 골랐다.

「봉쥬르.」

「이거 주세요.」

점원이 소영의 손에 들린 물건들을 받아 신문지로 말아서 쇼핑백 안에 넣어줬다.

그때.

“구소영!”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소영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잡힐 만 한 거리에서 유준이 소영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분명 배 위에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설마 날 따라왔어?

「여기 있습니다.」

점원에게 쇼핑백을 받은 소영은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야! 구소영! 거기 서!”

뛰면 쇼핑백 안의 그릇이 다 깨질지도 몰랐다. 아무리 점원이 신문지로 고이 싸줬다 한들 쉽게 깨질 수 있는 그릇이지 않은가.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최대한 속력을 내어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다리가 길고 달리기가 빠른 유준에게는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위험해!”

소영은 자신의 팔을 확 낚아챈 사람이 유준이라는 걸 보지 않고도 할 수 있었다. 소영과 유준의 몸이 엉기며 둘은 털썩하고 인도로 넘어졌다.

“아야….”

소영은 왼쪽 손바닥에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몸을 짚고 일어났다. 유준 역시 자신의 몸 위에 겹쳐져 있던 소영이 벗어나자 함께 팔을 짚고 일으켜 앉았다.

“너 차에 부딪히면 어쩌려고!”

유준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소영은 차도 안 보고 냅다 도로로 뛰어버렸다. 유준은 하마터면 차에 부딪힐 뻔했던 소영에게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죽을 뻔했잖아!”

그러게. 내가 너까지 죽일 뻔했네.

소영은 자신도 자신이지만 유준까지 피해를 볼 뻔했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톱스타 차유준이 자신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면 그 많은 팬에게 어떤 원망을 받게 될는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미안해.”

소영은 자신의 아픈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넘어지며 바닥에 긁혔는지 손바닥이 까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릇은 괜찮나?’

소영이 쇼핑백을 열고 확인하려 하는데 그런 소영의 팔을 유준이 잡았다.

“구소영.”

도저히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소영은 팔이 잡힌 채 유준을 바라봤다.

노을 지던 파리는 이미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기 시작해 반짝이는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밤공기 가득한 샹송을 들으며 둘은 서로를 빤히 응시했다.

“죽을 만큼 보고 싶었어.”

유준의 말에 소영의 심장이 아려왔다.

‘어쩜… 너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날 이렇게 흔드는 거야?’

땡땡땡.

도로에 아직도 주저앉아있던 둘에게 어서 일어서 비키라며 자전거 벨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유준이 소영의 손을 잡아당겼고 둘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도로 안쪽으로 옮겨 섰다.

잠시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어딜 봐도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 멋진 풍경보다도 더 아름다운 너의 모습.

둘은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아득한 옛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몽글거렸다.

-손 시려.-

처음 손을 잡았던 날, 넌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아 옷 주머니에 넣었었지.

10년 전 어느 눈이 오던 날의 느낌을 소영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라 몸을 덜덜 떨면서도 실내로 들어가면 그의 손을 놓게 될까 봐 차마 들어가자 말도 못 하고 걸었었다.

툭.

어떤 사람이 걷다 소영을 쳤다. 순간 중심이 흔들린 소영이 쓰러지며 유준의 가슴에 닿았다.

쿵쿵.

가슴 속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소영은 찬찬히 유준의 얼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계속 티브이로 봐 왔지만 실제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연예인이라 관리를 많이 받아 그런지 유준은 훨씬 더 멋있어져 있었다.

너랑 나는 사는 세계가 많이 달라진 거 같네. 어느덧 그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소영의 눈에 어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울보네.”

유준은 소영의 머리 위에 그의 보드랍고 커다란 손을 툭 하고 올렸다.

‘나도 죽을 만큼 보고 싶었어.’

소영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일단 약국부터 찾자. 너 손에서 피 나.”

유준은 소영의 다쳐서 피가 나는 왼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반창고 있어.”

꽃집 일을 하다 보니 소영은 가시에 찔리거나 가위에 손을 다치는 일이 수두룩했다. 반창고는 늘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필수품이었다.

소영이 가방을 뒤적여 반창고를 꺼내자 유준은 손바닥에 반창고를 직접 붙여주며 흉터가 많은 소영의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손에 왜 이렇게 상처가 많아?”

유준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여전히 소영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혹시나 또 소영이 도망갈까 봐 그는 계속 소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나 꽃집에서 일하거든. 가위나 칼에 베이고, 철사나 가시에 긁혀 다치는 일이 수두룩해. 그래서 이렇게 반창고도 늘 가지고 다녀.”

“넌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냐. 사람 걱정되게.”

소영을 걱정한다는 유준의 말이 또다시 소영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소영은 촉촉해진 눈망울로 유준을 바라보았다.

“어? 차유준이다!”

파리는 유명 관광지답게 한국 관광객이 많았다. 유준을 알아본 팬들의 소리에 유준이 소영의 손을 꽉 잡았다.

“뛰자!”

유준과 소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계속 유준의 이름을 부르며 뒤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헉. 헉.

소영은 숨이 가쁘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멈추면 팬들에게 사진이 찍힐 것 같아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 있는 힘껏 달렸다.

“안되겠다. 일단 저기로.”

유준이 한 가게 안으로 재빨리 소영과 함께 들어가 몸을 숨겼다.

“어디로 갔지? 분명히 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

“그러니까. 분명히 이쪽으로 들어온 거 같았는데.”

“잘못 본 거 아냐? 저쪽으로 갔나?”

유준을 찾는 팬들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소영은 놀라서 입 밖으로 나오는 딸꾹질을 손으로 막았다.

사람들이 우릴 찾아내면 어떡하지? 유준의 매니저라고 둘러대면 될까?

소영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괜찮아요?」

가게 안에 숨어있는 두 사람에게 흰색 유니폼을 입고 빗자루를 든 직원이 물었다. 그에게 조용히 해달라며 소영이 검지를 입술 위로 가져갔다. 눈치를 챈 직원이 확인하겠다며 가게 밖으로 잠시 나갔다 들어왔다.

「밖에 아무도 없어요.」

직원의 말에 소영이 몸을 일으키고 열린 문으로 빼꼼히 고개만 빼고 밖을 살펴보았다. 직원 말처럼 다행히 아무도 없는 거 같았다.

소영은 그제야 가게 입구를 찬찬히 살폈다. 고급스러운 짙은 갈색의 나무 문 위로 빨간 조명이 밝혀져 있는 간판에는 선명하게 ‘Bar’라고 적혀있었다.

‘하필 들어와도 술집으로 들어왔네.’

가게는 10평 남짓의 소영의 꽃집처럼 아담했다. 중간에 놓인 긴 칵테일 바에는 술병들이 가득했고 벽에는 그림 액자들이 수두룩하게 걸려있었다. 짙은 나무 테이블과 빨간 소파는 조화로웠고 천장에는 여러 물결무늬가 그림처럼 그려져 있었다.

제법 근사한 곳이었다. 붉은색 전등이 가득 켜진 가게 안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지만, 다행히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좀 앉자.”

유준은 밖에 서 있는 소영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아무리 쫓아오던 사람들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밖에 나가면 또 누군가에게 금세 들킬 수도 있었다. 유준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이 가게 안에 잠시 있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소영은 유준을 따라 가게 제일 안쪽 테이블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유준은 혹시나 사람들이 밖에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등을 돌리고 벽을 바라보며 자리 잡았다.

가게 안 큰 대형 스크린에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투영되어 나오고 있었다. 둘이 자리를 잡자 아까 망을 봐주던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가까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