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하는 이어폰을 꽂고, 지하철 문가에 기대선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아르바이트 시간이 변경돼 잠이 부족했다. 덕분에 그녀는 지하철과 버스를 탈 때마다 쏟아지는 잠의 유혹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운이 좋은 건, 계속해서 그녀가 서 있는 반대 방향의 문이 열린다는 거였다. 주하가 문득 희미하게 눈을 뜬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그녀 앞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덕분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눈을 번쩍 떴다.

“어? 여, 여기가 어디지?”

주하는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곧바로 역 이름을 확인했다. 확인과 동시에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커진 눈도 덩달아 금세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휴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주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한 걸음을 뻗어 열차 밖으로 내디뎠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내려야 할 역에 딱 맞춰서 눈을 뜬 그녀였다.

주하 제가 생각해도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어깨에서 흘러내린 에코백을 고쳐 멨다. 크림색 에코백에는 그녀가 직접 그린 청명한 하늘이 돋보였다. 그녀가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한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앗! 늦었다!”

주하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에스컬레이터 위를 빠르게 뛰어올랐다.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다. 더군다나 지하철에서 잠들어 버린 덕분에 늦는다는 메시지조차 보내지 못했다.

‘어? 그러고 보니, 왜 어디쯤 왔냐는 메시지가 없지?’

갑자기 든 생각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재차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역시,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다.

‘오빠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급하게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오르던 그녀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주변 사람들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지하철역 앞, 카페.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주하의 시선이 천천히 내부를 훑기 시작했다.

‘아! 저기, 오빠다!’

주하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물 위로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자연스럽고 빠르게 그것도 설렘이 가득한 수줍은 미소가 말이다.

‘오빠는 역시, 너무 근사해.’

주하는 짧은 단발머리를 애써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갑자기 후끈 달아오르는 열감에 양손으로 제 볼을 감쌌다. 볼에서 내린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지른 후 크게 숨까지 들이마셨다. 그녀는 발그레 핑크빛으로 물든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드디어 남자에게 향했다.

주하가 테이블 가까이 다가가자, 휴대전화를 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의 시선이 주하와 마주쳤다. 무표정하던 남자의 얼굴로 매력적인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남자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왔구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에, 지금 막 맞은편에 앉은 주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혹시, 뛰어왔어? 얼굴이 붉은데….”

남자의 손이 주하의 얼굴로 향했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조금이라도 더 손가락을 움직인다면, 그의 중지가 주하의 발그레한 뺨에 닿기 충분했다.

“아…. 조금, 더워서요….”

주하가 작은 목소리로 얼버무리자, 남자는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눈매를 휘어 접었다.

“목마르겠다. 뭐 마실래? 여기 브라우니가 유명하대. 그래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거야.”

“저는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마실게요. 브라우니요? 오빠는 단 거 안 좋아하잖아요.”

“주하 네가 좋아하잖아.”

남자의 달콤한 목소리가 주하의 귓가를 간질였다. 며칠 전 그와의 통화 중에 브라우니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 그녀였다.

‘내가 브라우니를 좋아해서? 대화를 하던 중 스치듯 말했을 뿐이었는데… 오빠가 그걸 기억한다고?’

주문을 하러 일어선 남자의 뒷모습에 주하의 시선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어쩜, 오빠는 자상한 데다 뒷모습까지 완벽할까?’

주하는 기다란 다리로 여유롭게 고고히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주문을 마친 남자가 뒤를 돌자, 그녀는 민망함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헉! 내가 너무 대놓고 보고 있던 건가? 오빠 눈에 내가 이상하게 보였으면 어쩌지?’

“5분 정도 기다려야 브라우니가 나온다네. 주문한 음료는 그때 같이 받기로 했어.”

자리로 돌아온 남자는 테이블 위로 진동벨과 함께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세심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남자는 길고 매끈한 손으로, 트레이 위에 있던 탄산수를 얼음 잔 위로 천천히 기울였다.

“주하 네가, 목이 마를 거 같아서.”

주하는 제 앞으로 놓인 잔을 내려 보고는 다시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향한 짙고 그윽한 두 눈이 부드럽게 살짝 휘었고, 입꼬리 또한 매끄럽게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주하는 이토록 근사한 남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저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는 생각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갈팡질팡하며 갈 곳을 잃은 그녀의 두 눈이 애꿎은 얼음 잔 위로 향했다.

“아…….”

주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 깜짝 놀랐다.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을 들켰을까 하는 조바심에, 그녀는 황급히 얼음 잔을 집어 들었다. 시원한 탄산수가 입 안을 적시자, 울렁이던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 거 같았다.

그녀가 두 손에 그러쥔 잔을 천천히 내려놓자, 한없이 다정한 음성이 유려하게 들려왔다.

“오늘, 아르바이트는 어땠어?”

“아… 괜찮았어요.”

그녀는 동시에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작게 입을 벌렸다. 머릿속으로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빠, 제가 심리 테스트 하나 해줄게요!”

“심리 테스트?”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가 오늘 해준 건데, 꽤 정확하대요.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어요.”

찰나의 순간 남자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정확히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는 친구’를 칭할 때였다.

정말로 재미있는 심리 테스트인지, 주하는 신난 얼굴을 한 채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느라 좁아진 남자의 미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럼, 들어 볼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남자가 느긋하고 여유롭게 대답했다.

주하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로 보아, 그는 주하가 어떤 내용의 심리 테스트를 하더라고 상관없는 얼굴이었다. 신이 난 얼굴로 쫑알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그저 그를 즐겁게 했다.

“사막여우, 비둘기 그리고 거미가 있어요. 오빠가 이 세 가지를 어떻게 데리고 갈지 정해서 말해 주세요.”

주하는 두 팔을 테이블 위에 걸친 채 남자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두 눈이 남자의 대답을 재촉했다.

“음……. 글쎄.”

“오래 고민하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세요.”

남자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한 채 제 대답을 기다리는 주하가 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서요, 궁금해요.”

“그렇다면, 음… 거미들은 전부 다 가방에 집어넣고.”

주하가 놀란 듯 그녀의 눈썹을 살짝 위로 올렸다.

‘거미들은 전부라고? 나는 거미라고만 했지, 여러 마리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오빠는 거미들은 전부라고 복수형으로 말하는 걸까?’

“사막여우는 케이지에 넣을게. 케이지에 넣어서 자물쇠로 잠그고, 암막 커튼으로 덮어서 데리고 갈게. 비둘기는 음… 비둘기는 필요 없어. 번거로울 거 같으니 비둘기는 데리고 가지 않을게.”

“비둘기를…… 안 데리고 간다고요?”

“비둘기를 돌볼 사람도 없고, 귀찮으니까.”

“그럼 사막여우는요? 사막여우를 돌볼 사람한테 비둘기도 같이 돌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심각해진 주하의 얼굴에, 남자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비둘기가 중요한 거야? 내가 중요한 걸 놓친 건가? 그래서 주하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거고?”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오빠의 생각과 의견이 중요한 거예요.”

주하의 대답에 남자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비둘기는, 글쎄…. 처음부터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누구한테 맡기기도 그렇고, 별로 데리고 가고 싶지 않은데? 사막여우는 내가 직접 데리고 갈 거야.”

남자의 대답과 함께 테이블 위 진동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주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중하고 귀한 무엇인가를 어루만지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다녀올게.”

나직하게 속삭이는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주하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료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으로 울려 퍼졌다. 오늘 주하에게 심리 테스트를 해준 친구의 목소리였다.

- “거미는 재물, 비둘기는 자식, 그리고 사막여우는…… 배우자야.”

‘분명, 사막여우가 배우자라고 했는데….’

주하는 카운터를 향해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 느리게 눈을 감았고,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배우자를 케이지에 넣어서 자물쇠로 잠그고, 암막 커튼까지 씌운다고? 암막 커튼이면 빛조차 스며들지 않게 하겠다는 거 아닌가? 도대체, 왜……?’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주하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트레이를 든 남자가 뒤를 돌았다. 남자의 두 눈이 주하와 그대로 맞닿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 다시 봐도 숨이 멎을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 그런 미소를 지은 남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주하는 저도 모르게 들이마신 숨을 아주 잠깐 멈췄다.

“지금 막 나온 브라우니야.”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주하의 코를 자극했다.

“다행이다. 가장 맛있을 때, 네가 맛볼 수 있어서.”

지금 막 구워져 나온 브라우니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 그리고 그 달콤함을 넘어선 다정함까지.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까지 전해졌는지, 가슴께가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심리 테스트 같은 건, 개나 주라지. 그런 건, 믿을 게 못 돼.’

그렇게 결론지은 주하의 입 안으로 달콤하고 진한 브라우니가 가득 찼다.

***

7년 후.

주하가 서재 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따라 사뿐사뿐 걸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코를 자극하는 갈비찜 냄새가 그녀의 식욕을 부추겼다.

‘아, 너무너무 맛있는 냄새. 진짜진짜 맛있겠다.’

계단 아래로 한 걸음 한 걸음 총총 발을 내릴 때마다 굽실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찰랑이며 등을 따라 물결쳤다. 하얀색 실크 원피스가 그녀의 몸짓에 스르륵스르륵 매끄럽게 움직였다. 가느다란 종아리 아래 더욱 가느다란 발목이 드러났다. 그녀의 새하얀 발에는 깔끔한 크림색 실내 슬리퍼가 신겨져 있었다.

계단은 다 내려온 주하는 홀린 듯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여자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사모님, 생일 축하해요. 사모님이 좋아하시는 소갈비찜을 했어요. 그리고 또 사모님이 좋아하시는…….”

“와, 잡채네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그러나 본래의 그녀다운, 오랜만에 듣는 흥분한 목소리였다. 주하는 환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쪼르르 달려가 스테인리스 볼 안에 가득 담긴,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잡채를 감동 어린 얼굴로 내려다봤다.

“사모님 취향이 고기 듬뿍, 표고버섯 듬뿍 맞죠?”

여자는 결혼 초기에 주하가 말했던 취향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주하는 황홀하다 못해 경이롭다는 얼굴로 두 손까지 가슴 위로 곱게 모은 채 잡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여자가 웃으며 젓가락을 건넸다.

“어서 맛보세요.”

주하의 두 눈이 제 앞으로 불쑥 들어온 젓가락을 향했다. 그녀는 무엇 때문인지 잠깐 망설이곤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받아 들었다.

“그, 그럼 아주 살짝만 맛볼게요.”

미세하게 떨리는 주하의 새하얀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젓가락에 고기 한 점, 그리고 표고버섯까지 집은 후 그 위로 당면을 돌돌 말았다. 살뜰하게 젓가락을 쥔 주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드디어 잡채가 들어갔다. 주하는 두 눈을 스르륵 감은 채 오물오물 천천히 입 안의 잡채를 음미했다.

“으흠, 으흐흠.”

그녀에게서 리드미컬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주하는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곧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절로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꿀꺽 잡채를 삼킨 주하의 얼굴로 금세 비어 버린 입 안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드러났다.

“정말, 최고의 잡채예요. 인생 잡채 같아요. 신 여사님은 정말 최고세요!”

주하의 재미있는 반응에 신 여사의 웃음소리가 주방 안으로 퍼졌다.

“어머, 사모님의 이런 모습 정말 오랜만이에요. 예전에 처음 사모님을 만났을 때 같아요.”

주하는 신 여사의 말에, 문득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예전의…… 내 모습?’

“사모님, 그럼 점심 식사하실까요?”

멍한 얼굴을 한 주하의 손을 신 여사가 잡아끌며 말했다. 주하의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였다.

“……네.”

주하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러운 소갈비찜과 접시에 소복이 담긴 다채로운 컬러의 잡채. 그리고 주변으로 몇 가지 나물과 밑반찬들이 정갈하게 놓였다. 마지막으로 소고기 듬뿍 미역국까지 더해지자 근사한 생일상이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