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견례

나는 하인이다. 나에게는 절대적 복종을 해야만 하는 주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류태하’이다. 나는 그의 하인이다.

출판사에 보낸 이번 신작 ‘눈꽃 연인’의 첫 문단이었다. 문단 밑에는 빨간색의 리뷰가 적혀 있었다.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강렬함은 있지만, 실제로 책 속의 남자 주인공의 성격과 부합하지 않아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끝까지 읽어 본 게 맞아?”

영 내키지 않는 리뷰였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던 남자 주인공은 정인(情人)을 만나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군다. 그런 그가 마음의 상처를 받아 정인(情人)에게 광기 어린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저 첫 문단은 소설에 꼭 필요했다. 노트북 화면의 워드 창 커서가 깜빡거렸다. 피해 봤자 수정하게 되어 있으니 얼른 하라는 듯. 거슬려….

“…어떻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조금 전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엄마의 주치의가 ‘개인 사정’이라는 이유만으로 변경되었다. 근 몇 년을 같이 해온 선생님이 하루아침에 바뀌게 되었다. 그냥 주치의가 변경됐을 뿐인데 괜히 불안했고, 곧 엄마가 어떻게 될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 항의를 했다. 돌아온 건 ‘개인의 사정으로 인한….’ 앵무새같이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답변뿐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고서 맥주 캔을 들고서 베란다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의 네온사인이 술에 취하기 딱 좋았다.

“캬. 역시 술안주에는 야경이 딱이지.”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살짝 달아오른 뺨을 위로라도 하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과 야경을 안주 삼아 먹다 보니 어느새 맥주 캔이 그녀의 옆에 수북이 쌓여 갔다. 그녀는 문득 옆에 있던 베고니아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길 가다가 기분 전환 겸 샀던 꽃이었다. 무슨 꽃인지 모르고 샀는데, 점원이 베고니아라고 알려 주었다. 그녀는 꽃병에서 베고니아 한 송이를 꺼내어 냄새를 맡았다. 향긋한 베고니아의 꽃향기가 그녀의 코끝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에 팔베개 삼아 머리를 기댔다. 입가에서는 오래전에 유행했던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도망가고 싶다.”

가족이라고는 엄마 하나인데, 하나뿐인 엄마가 암 투병만 지금 몇 년째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한 바퀴 돌고 하나를 접었을 때 진심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아무도 들어 줄 이는 없지만, 허공에 대고 말이라도 내뱉으니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동시에 죄책감이 물씬 몰려왔다. 그 죄책감을 밀어내고자 눈을 감았다. 달콤하게 오른 취기 때문인지 눈을 감고 있는 데도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기분이 좋았다. 환각에 빠지면 이런 기분인가? 입가에 웃음까지 새어 나올 정도로 기분이 업되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과 그녀의 눈에 한 방울 흐르는 눈물과 그녀를 위로라도 하듯이 지나가는 바람이 섞여 꼭 그녀를 어디론가로 데리고 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아가씨! 아가씨!”

누군가가 두피의 온 신경을 세게 잡아당기는 것 같은 두통이 일었다. 딱 알맞게 자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좀 일어나 보세요!”

아가씨라니. TV라고 틀어 놓고 잤나? 그녀는 눈을 뜨고 싶어도 자꾸만 내려가는 눈꺼풀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불러댔다.

“아가씨!”

“아이 씨. 누구보고 자꾸 아가씨래?”

참다못해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눈을 두어 번 끔벅거리자 멀어졌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느린 추의 움직임이 느리게 멈춤을 시작하는 것처럼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부산스럽게 그녀를 부르는 멀대같이 생긴 남자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색이 된 채 바르르 떨고 있는 여자 몇 명과 남자 몇 명, 그리고 그. 새하얀 얼굴에 서늘한 긴 눈매가 마치 붓으로 그려 놓은 것 같고, 잘생긴 이마와 콧날이 그의 이목구비를 더욱더 돋보이게 했다. 한눈에 봐도 장신인 것 같은 완벽하게 잘생긴 남자.

‘어, 왜, 왜 이러지?’

심장이 물 만난 고기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발그레 물들어 갔다.

“…채이경 씨 괜찮아요?”

음색은 낮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건넸는지도 모르면서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커다란 손을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무슨 꿈이 이렇게 리얼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바닥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힐을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할 만큼 그는 장신이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모르지. 당연히. 꿈인데. 그나저나 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

그의 걱정스러운 말에 그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조금 전에 그녀를 보고 아가씨라고 불렀던 멀대같이 생긴 남자가 울상이 된 채 발을 동동거렸다.

“아이고. 어째? 조금 전에 머리를 부딪혀서 크게 다치신 거 아니에요? 아가씨 저는 알아보겠어요? 저 김용하, 김 비서예요.”

‘누, 누구? 지금 누구라고?’

김용하. 꽤 낯익은 이름이었다. 거기에다가 김 비서라니. 그녀는 조금 전에 이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보고 부르던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서 더듬어 보았다. 분명 채… 이경, 채이경이라고 했어! 설, 설마! 이경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이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헐. 대박. 이거 꿈 아니었어?”

“…채이경 씨?”

그가 불쾌한 티를 내며 그녀의 손을 내쳤다. 지금도 분명히 그가 그녀를 보고 ‘채이경’이라고 불렀다. 믿을 수가 없어 그녀는 제 뺨을 세게 한차례 때렸다. 쫙. 차진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뺨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왔다. 이건 꿈이 아니다. 리얼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그녀가 쓴 신작 ‘눈꽃 연인’ 속이다.

“채이경 씨. 진짜 괜찮아요?”

“저 하나만 물어볼게요. 호, 혹시 당신이 헤더의 류… 태하?”

“다행이네요. 약혼자 이름은 기억해서.”

“지, 진짜 류태하예요?”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류태하가 맞아요. 근데 정말 괜찮아요?”

대뜸 자기 뺨을 때리지 않나,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그가 류태하냐고 물어보지 않나. 그녀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것 같아 그는 김 비서에게 눈치를 줬다. 너희 아가씨 상태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서둘러 병원에 데리고 가보라고.

“아, 아가씨. 조금 전에 머리를 부딪혀서 그런 것 같은데 병원부터 우선 가요.”

“아, 아냐. 지금 병원이 급한 게 아니야.”

망했다. 그녀의 신작 속 유일무이한 악녀 ‘채이경’ 속에 빙의된 모양이었다. 소설 속의 ‘채이경’은 철부지 망나니 재벌 2세였다. 불현듯 그녀의 캐릭터 소개란이 생각났다.

‘화려한 외모만큼 화려한 인성 쓰레기인 재벌 2세. 안하무인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 원하는 것은 무조건 손에 넣어야 직성에 풀린다. 이번 그녀의 생에 가지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약혼자 ‘류태하’였다. 그녀는 그를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진짜 망했잖아.”

그녀의 입에서 절망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BL 소설 작가 이소미였다. 소설의 장르가 BL이기 때문에 서브 여주의 역할을 굉장히 악랄하게 설정했다. 남주를 짝사랑하다 못해 광적으로 집착하게 되고, 그를 갖기 위해서 범법 행위까지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법의 심판을 받게 되며, 결국 자살로 이 소설 속에서 사라지는 캐릭터였다.

하필이면 왜 이런….

BL 소설이니 여자가 나올 장면은 극히 흔치 않았고, 악역에는 역시 악녀가 하는 게 임팩트가 컸기 때문에 최대한 악독하게 설정했다. 그랬던 하필이면 그 ‘채이경’이 되어 버리다니. 말도 안 되었다.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이경에게 김 비서가 손바닥을 휘저으며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 아가씨?”

“아가씨고 나발이고 지금 우리 뭐 하는 중이었어요?”

“요? 왜, 왜 이러세요? 무섭게.”

아차 싶었다. 그녀는 그녀 위의 사람이라곤 성해자 여사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 말종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김 비서에게 존대를 했으니, 그가 심히 많이 놀랄 만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깐 지금 우리 뭐 하는 중이였… 냐고!”

“뭐 하는 중이긴요. 오늘 중요한 상견례 날인데, 아가씨가 앞도 안 보고 막 가시다가 이 직원이랑 부딪쳐서 바닥에 대자로 뻗으셨잖아요.”

“상, 상견례?”

그제야 그녀는 태하를 쳐다보았다. 곁눈질로 봐도 뒤로 봐도 옆으로 봐도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악녀에게 빙의된 이 순간 잠시나마 황홀한 순간이라면 그녀가 집필한 완벽한 남주의 실사가 넘사벽이라는 사실이었다.

“정신 좀 차리세요. 진짜 괜찮으세요? 김 박사님 안 불러도 되겠어요?”

“…채이경 씨.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아니면 오늘 상견례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아뇨! 괜찮아요. 오늘 꼭 상견례를 마쳐야 해요!”

상견례 장면이라면 아직 초반이었다. 상견례에서 이경과 태하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여태 갖고 싶은 것은 무조건 가졌던 그녀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남자였다. 이때부터 그녀의 집착이 시작된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려면 소설의 끝이 와야 되는데… 이 소설의 끝이 어떻게 되었더라?

*

그의 모친이 앓고 있던 희귀병이 지민에게도 덮쳤다. 지민은 스스로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르륵 태하의 어깨에 힘없이 떨어지는 지민의 얼굴. 태하는 숨죽여 울음을 터트렸다.

“지민아.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한 바다야.”

“네. 보여요. 아주 아름다워요. 당신처럼.”

힘없는 그의 목소리가 태하의 심장을 더욱더 옥죄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대신하고 싶었다. 태하는 그동안 그에게 했던 모든 것들이 스스로가 용서되지 않았다. 그를 갖기 위해서 저지른 일의 벌로 그를 일찍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아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하늘에서 눈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힘없는 지민의 목소리에 눈비가 흩날리는 수평서 너머로 하늘에서 한 줄기의 빛이 내려왔다. 마치 신(神)께서 그를 데려가기 위해 천자의 사자(死者)를 보낸 것 같았다. 태하는 힘없이 떨어지는 그의 손을 부여잡으며 오열했다. 오열 끝의 그의 들을 수 없는 속죄 같은 고백이 이어졌다.

“사랑한다. 김지민.”

*

치열하게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하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이 소설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태하와 지민을 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어차피 형식적인 자리인데 다음으로….”

“아뇨. 그러니깐 해야죠. 형식적인 자리니 더욱더 해야죠.”

“그럼 그렇게 합시다. 우선 주변의 이목도 있는데 자리부터 옮기죠?”

조금 전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온데간데없고,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만큼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애초에 브로맨스 소설이니 그녀와 그가 이어질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은 마음이 조금 아팠다. 아니, 심장이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왜 이러지?’

이경이 왼쪽 가슴을 통통 두드리자, 그가 또 신경 쓰인다는 얼굴을 하고서 돌아봤다. 이경은 이내 괜찮다는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는 그 어떤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먼저 떴다. 마치 이제 막 눈이 마주친 일면식도 없는 사람 대하듯.

“…치. 무슨 인간이 저렇게 냉정해?”

“지금 좋게 생겼겠어요? 콧대 높은 헤더가 돈 때문에 목매게 생겼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리를 찧은 사람을 그냥 두고 가냐?”

“이해하세요. 류태하 부회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똥 밟은 결혼이나 다름없으니깐…!”

“지금 뭐라고 했냐? 그러면 내가 똥이라는 말이야?”

“하핫. 그, 그게 아니라 워낙에 완벽하신 분인데 아가씨처럼 사고만 치는… 아. 그게 아니라 자유분방한 분이랑 결혼하게 되었으니….”

“됐고! 너 앞으로 한마디만 더 하면 확 캐릭터 없애 버리는 수가 있다?”

이경의 윽박에 그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천하의 악녀 몸에 빙의되었다고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매한가지였다. 그나저나 이경은 정말로 골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 소설 속의 정해진 그녀의 운명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자살로 죽고 싶진 않아.

그렇다면 어떻게든 빨리 엔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상견례 자리에서 이경은 태하에게 한눈에 반하는 설정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한눈에 반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고, 그의 정인(情人)인 지민을 하루빨리 그의 옆에 데려다 놔야 할 필요가 있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적을 알아야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김지민’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김지민, 한국 대학 졸업. 지금 한국 병원 안에 있는 G 편의점에서 알바 중이야. 이 사람에 대해서 낱낱이 알아봐 줘.”

“도대체 누군데 알아봐 달라는 거예요? 혹시 무슨 일 저질렀어요?”

“이 씨! 아니거든? 내가 무사히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야.”

“엥?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이 상견례를 뒤집어엎는 건 아니죠?”

“놉! 이 상견례는 무조건 해야지. 그래야 그가 그 사람에게 더욱더 빠질 테니깐.”

“그가 그… 사람이요?”

김 비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깐 김지민에 대해서 최대한 빨리 알아서 나한테 보고해!”

아직도 그가 남기고 간 상흔처럼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 심장을 다독이는 방법은 그에게 정말 빠지기 전에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거였다. 류태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마음을 여는 사람은 단 한 사람 김지민뿐이었다. 그와 지민은 고용 관계로 만나게 되고, 태하는 그런 그에게 시나브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경이 그와 지민을 멀어지게 하려고 그가 한 것처럼 그의 모친을 죽인다. 오해한 지민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태하의 절친인 준우와 함께 멀리 도망가 버린다.

‘안 되지. 그의 모친을 절대 죽여서는 안 되고, 준우가 지민을 사랑하게 해서도 안 돼!’

***

“부회장님 이제 곧 가실 시간입니다.”

태하는 결재 파일을 읽어 보던 손이 멈췄다. 데스크 위의 시계를 확인했다. 앞으로 한 시간 뒤면 메종드 호텔에서 상견례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는 마치 비즈니스차 미팅 가는 느낌으로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그래도 상견례 자리인데 이 옷이 어떠세요?”

이 비서가 그에게 감색 스프라이트 슈트를 건넸다. 태하는 곁눈질로 그 슈트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말했다.

“됐어. 얼굴만 비치면 되는 자리잖아.”

“부회장님 정도면 뭘 입어도 빛이 나시긴 합니다.”

“아부가 아주 그냥 생활이 되었구나?”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기에 태하는 피식 웃으며, 그가 건넨 슈트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른 이 비서는 그에게 옷을 건네주며, 그를 탈의실로 안내했다. 완벽주의인 그는 가끔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에 탈의실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자리야?”

“그럼요. 룩스에 잘 보여 나쁠 건 없죠.”

“그러니깐 내가 왜 룩스에 잘 보여야 하냐 말이야.”

괜히 분한 마음에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죠. 그 일들이 있었는데, 그리고 우리 쪽에서는 신(新)사업도 성공시켜야 부회장님의 입지도 탄탄해질 수 있으니 좋게 생각하는 편이….”

류태하는 헤더 그룹의 삼남 중 막내아들이었다. 위로 두 형이 있지만, 그들을 제치고 그가 부회장 자리를 쉽게(?) 앉을 수 있었던 것은 두 형의 무능력함이었다. 그들이 친 사고 수습하느라 헤더에서는 신(新)사업을 할 자금이 부족했다. 그걸 모면하고자 룩스 쪽에서 건네 온 정략결혼 제의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채이경 님만 아니면 딱 좋았을 텐데. 룩스의 채준경 이사님하고는 동창이시잖아요. 그분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환상의 커플이었을 텐데요. 아쉽네요.”

“아쉬울 게 뭐 있어? 어차피 그냥 인수합병일 뿐인데.”

“그래도 채이경 님은 좀 아니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입에 담지도 못할 사고를 쳤습니까? 그런 사람이 부회장님의 옆자리에 가당키나 합니까?”

“네가 채이경 씨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건 충분히 잘 알겠지만, 이제 조금 건설적인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이 비서의 도움으로 감색 슈트로 환복(換服)한 그는 현역 모델 같은 느낌이었다. 감색이 그의 하얀 얼굴을 더욱더 돋보이게 했고, 남자다운 선의 얼굴이 서늘했지만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 소년미가 돋보였다. 까만 동공은 칠흑같이 까매서 흑진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완벽하십니다!”

“넌 가끔 지나칠 정도 부담스러워.”

“진심입니다. 만약에 다비드 상이 살아 있다면 바로 부회장님이 아니실까 싶습니다.”

“부담스럽다고. 그만해.”

태하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부회장실을 나섰다.

*

메종드 호텔은 룩스 그룹 계열사 호텔이었다. 이 호텔에서 상견례를 하는 것은 명백하게 누가 우위인지 보여주기 위한 심산이었다. 태하는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차에서 내렸다. 이 비서가 바로 뒤를 따르며 말을 했다.

“회장님과 여사님께서는 이미 와 계신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속이 답답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그는 습관처럼 넥타이를 풀려고 하다가 멈추었다. 오늘을 위해서 이 비서가 한정판으로 가져온 슈트의 완벽한 핏을 망칠 순 없었다. 쇼윈도 부부나 다름없는 부모님이었다. 그는 제 부모님을 보면서 결혼이라는 환상 따윈 가지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 상견례 그저 서로에게 협조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꺅!”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란이 그의 심란한 마음을 분산시켜 주었다.

“헐. 저, 저분은 채이경 님 아니십니까?”

이 비서의 말처럼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거대한 장식품을 옮기던 직원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친 모양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비서가 울상이 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무 가벼워서 마치 손안에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채이경 씨 괜찮아요?”

“아가씨!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아가씨!”

김 비서의 채근에 이경의 눈이 움찔거렸다. 곤히 자고 있는 백설 공주를 연상케 하는 그녀의 얼굴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눈을 뜬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동화 속 공주님 같은 외모라고 생각했다. 자그마한 얼굴에 동그란 큰 눈 속의 다갈색 눈동자 속에 그가 비쳤다. 풍성한 속눈썹과 앙증맞은 입술이 꼭 잘 빚어 놓은 인형 같았다. 인형 같은 외모에 비해서 거친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이 씨. 누구보고 자꾸 아가씨래?”

신경질을 내며 눈을 뜬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발그레해졌다. 혹시 머리를 다쳐 어디 안 좋은 건가?

“…채이경 씨 괜찮아요?”

생각보다 걱정스러운 말투가 나왔다. 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아무 의심 없이 덥석 잡아 온다. 여전히 작고 귀여운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