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주체할 수 없는

월요일 퇴근 후 지원과 수희는 고결의 집에 들렀다.

“와~ 이쁘다~.”

공사는 모두 끝이 났고 정리가 한창이었다.

잡초가 무성했던 정원도 다시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지원은 양손을 맞대고는 집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너무 멋져. 내가 꿈꾸는 집이야. 복슬복슬한… 우리 그이와 함께….”

“네? 대표님, 뭐라고요?”

“아, 아니야, 아무것도….”

지원이 실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와중에 고결이 다가왔다.

“서 대표님, 수희 씨, 오셨어요?”

오늘따라 그가 더 화사해 보였다.

“어머나, 정 사장님은 얼굴이 더 좋아졌네요.”

“아… 그런가요?”

지원의 인사에 고결은 민망한 듯 웃었다.

“집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죠?”

“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잘 고쳐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오 팀장이 신경 엄청 많이 썼어요. 그렇게 매일매일 현장 쫓아다닌 건 아마 처음일걸요?”

“헤헤… 그렇긴 하죠.”

지원이 공치사를 하자 수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집들이 생각이 났다.

“아 참, 오빠 집들이는 언제 하실 거예요?”

“글쎄요…. 이번 주말에 할까요?”

“어머~ 정 사장님, 저도 초대해 주셔야 해요! 저 이 집 꼭 다시 오고 싶어요.”

“아… 네, 그럴게요.”

갑자기 나온 집들이 얘기에 지원도 불쑥 끼어들었다.

고결은 얼떨결에 지원까지 초대한 셈이 되고 말았다.

“집 내부도 한번 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고결이 현관문을 열면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아직 정리 중이라 어수선해요.”

집 안에서는 제준이 뭔가를 열심히 옮기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지원과 수희는 흠칫 놀랐다.

“엉? 제준이 니가 여기 왜 있어?”

“아… 형 좀 도우려고 들렀지.”

“여기는 또 언제 형이 된 거야?”

멋쩍게 대답하는 제준을 보며 지원은 놀랍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어머~ 정 사장님 매력이 장난 아닌가 봐요. 수희 씨가 그렇게 오빠 오빠 하면서 챙기더니 제준 씨는 형이라고 하면서 챙기네~.”

지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고결을 보며 웃었다.

그녀의 말에 고결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빠~~.”

그때 어디선가 혜리의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침 현관문을 열고 고개를 쏙 내민 혜리가 애교 넘치게 고결을 부른 것이다.

“어머~ 너무 간질간질하다. 크크….”

지원은 오글거린다는 표정으로 양팔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면서 수희를 툭 쳤다.

“수희 씨, 난 그만 가 봐야겠다. 고결 오.빠. 잘 도와 드려.”

“네. 내일 봬요, 대표님~.”

수희도 킥킥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음… 나도 오빠라고 불러볼까? 후니 오빠? 크큭….”

지원은 또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고결의 집을 나왔다.

**

저녁을 먹고 나서도 수희와 혜리, 제준은 집에 갈 생각이 별로 없는 듯 보였다.

고결은 지금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항상 혼자만 덩그러니 머물러야 했던 집.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이 집에 어느 새 익숙해진 듯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내일 직접 들러보고 결정할까?”

“그게 좋을 것 같아.”

수희와 혜리는 뭔가를 보면서 속닥거리고 있고 제준은 턱을 괸 채 그녀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고결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혜리에게 고정되었다.

하지만 혜리가 돌아보면서 활짝 웃자 그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아… 저, 저기… 커, 커피 내려줄까요?”

“네~ 좋아요~.”

“라떼도 돼요, 오빠?”

“네, 되죠….”

고결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고 얼른 커피 머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혜리가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오빠, 뭐 도와드려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데 평소에는 눈을 감고도 다룰 만큼 익숙하던 커피 머신이 오늘따라 잘 작동이 안 되었다.

고결은 진땀을 빼며 겨우 커피를 내리고 나서 말했다.

“커피 다 됐어요.”

그러나 커피 잔을 들고서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고결은 흠칫 놀랐다.

거실 한 귀퉁이에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서 굳어 버린 그의 손에서 잔이 미끄러져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오빠?”

“오빠! 괜찮아요?!”

“형, 유리 조각 조심하세요!”

모두 놀라서 그의 곁으로 달려왔지만, 고결은 여전히 거실 한구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고결의 모습에 수희는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오빠, 좀 쉬세요. 여기는 우리가 정리할게요.”

그제야 고결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감싸 쥐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미안해요.”

그가 2층으로 올라가고 나자 제준은 유리 조각을 치우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형 갑자기 왜 저러지? 안색이 엄청 나쁘던데….”

“전에도 저렇게 얼굴이 창백해진 적이 있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어.”

“쉬면 괜찮아지려나?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제준과 수희가 나누는 대화에 혜리는 불현듯 고결이 공황장애가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결이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혜리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올라가서 오빠 보고 올게.”

한편 2층 침실로 올라온 고결은 우두커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여기서 살기로 결심했을 때…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 했나…?”

피식하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미 각오하고 또 각오했던 것인데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나한테 자꾸 그러지 마.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또다시 나타난 하얀 옷을 입은 소녀, 바로 동생을 향해 그는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소녀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고결을 바라볼 뿐이었다.

“날 놓아줘….”

“…놓지 못하는 건… 내가… 아니야….”

소녀가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결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곧 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혜리가 침실 문 밖에 서서 열린 문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혜리 씨….”

고결은 당황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저… 들어가도 돼요?”

“…네, 들어와요.”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고결에게 혜리가 다가왔다.

고결의 옆에 앉은 혜리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 힘들면 같이 병원 갈까요?”

고결은 혜리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사실 그는 얼마 전부터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항상 자신을 찾아오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말.

“내가 신경 쓰여요?”

오히려 저에게 질문을 던지는 고결에게 혜리는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많이요.”

“왜요?”

혜리는 잇따른 고결의 물음에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진심을 고백하기로 했다. 그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그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내가… 오빠를 좋아하니까요….”

너무나 듣고 싶었음에도 막상 너무나 낯선 말.

수줍은 듯 천천히 이어지는 혜리의 고백에 고결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난… 전처럼 그렇게… 당신에게 상처만 줄지도 몰라요.”

하지만 사랑에 서툰 고결은 자신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저 맷집 엄청나게 좋아졌어요!”

혜리는 기쁘기만 했다. 고결의 마음속에 이미 자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느꼈기에.

하지만 혜리의 말을 들은 고결은 고개를 떨궜다.

“그때 아프게 한 건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오빠 잊었어요? 내 생명의 은인인 거?”

그녀를 아프게 한 일들이 떠올라 새삼 미안해하는 고결에게 혜리는 발랄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너무 예뻐서 고결은 문득 그날처럼 그녀를 안아 보고 싶어졌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러나 간절하게 말했다.

“그럼 나… 안아 줄래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혜리는 고결을 와락 껴안았다.

“오빠, 이런 건 언제든지 해줄 수 있다구요. 대신 다른 여자한테 해 달라고 하면 절대 안 돼요!”

명랑하게 귓가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와 품 안에 느껴지는 그녀의 가녀린 몸.

마치 살아있는 듯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고결은 혜리의 몸에 양팔을 두르며 미소를 머금었다.

**

다음날 수희와 혜리는 고결에게 현판을 선물하기 위해 공방에 들렀다.

“직접 눈으로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그렇지? 아무래도 사진으로는 질감까지 알 수는 없으니까. 이거 어때?”

“응, 그거 좋아.”

두 사람은 현판 디자인을 고르면서도 할 말이 있어 서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수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혜리야, 어제 고결 오빠 좀 어땠어? 괜찮았던 거지?”

수희는 어제 본 그의 모습과 저번에 본 모습이 자꾸 겹쳐 걱정스러웠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놀라서 몸이 굳는 것으로 보였다.

“응. 힘들어 보이긴 했는데, 그래도 진정된 것 같았어.”

“그럼 다행인데… 저러다 다칠까 봐 걱정돼.”

“음… 그러고 보니 가게에는 사람들이 같이 있지만, 집에서는 혼자니까….”

혜리는 수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자주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말이야, 언니. 사실은 나 오빠한테 고백했어. 좋아한다고….”

“헐~ 진짜~?”

얘기가 나온 김에 혜리는 수희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수희는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곧 손가락을 딱 튕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 나 참… 어쩐지 둘이 느낌이 그랬어.”

“둘이? 나야 티 엄청나게 냈지만, 오빠는 왜?”

“아니 뭐… 오빠가 얼마 전부터 너한테서 눈을 못 떼는 거야. 어찌나 애틋한지… 흐흐….”

“아, 진짜?”

수희는 오글거린다는 듯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의 말에 혜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발그레한 뺨을 양손으로 감싸면서 혜리가 재차 물었다.

“진짜야? 오빠가 진짜 그랬어?”

“그렇다니까. 너 얼굴 완전 빨개졌어. 그렇게 좋아?”

“…….”

“이야~ 윤혜리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다니…. 이게 웬일~.”

“아, 그만 놀려.”

민망한 마음에 수희를 밀치면서도 혜리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수희는 그런 혜리를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혜리야, 너도 오빠네 가족 얘기 알고 있지?”

“응급실 갔던 날 오빠한테 들었어. 언니도 알고 있어?”

“응. 오빠가 너한테 먼저 얘기했다고 하면서 말해 줬거든. 그때 오빠에게 니가 특별한 것 같다고 느꼈는데… 둘이 잘 돼서 너무 기분 좋다. 진짜 축하해~.”

사실 그 특별함의 시작은 수희였다는 것을 혜리는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수희에게서 나는 고결과 같은 향기.

그렇게 혜리에게는 같은 의미가 된 두 사람.

“고마워, 언니.”

혜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곧 확인해야만 하는 것들이 떠올랐다.

“언니, 나도 물어볼 거 있는데….”

“뭔데?”

혜리는 수희의 눈치를 보면서 슬쩍 말을 꺼냈다.

“저기… 혹시 최태온이라는 애 알아?”

“최태온이라면 최명주가 실장님? 너도 아는 사람이야?”

“실장님이라고? 걔가?”

“응, 우리 회사 최명주가랑 같이 프로젝트 할 수도 있거든. 그래서 지난주에 만났어.”

“아, 그랬구나….”

혜리는 태온의 말을 곱씹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허튼 말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근데 넌 어떻게 알아?”

“아,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야.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걔가 언니 안다고 하길래….”

“헐~~! 진짜? 그게 또 어떻게 그렇게 되지? 세상 참 좁네.”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희에게 혜리는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언니, 전에 선봤던 최태양이라고 하는 사람이 걔 형인 줄은 알고 있어?”

“아, 태양 오라버니? 실장님 형인 줄 알고 있어. 둘이 너무 닮아서 내가 먼저 알아봤는걸?”

“그 사람이랑 계속 만나는 거야? 혹시… 사귀는 거야?”

“아니야. 그냥 친한 오빠 동생이야.”

“아, 그렇구나….”

혜리는 수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예나 얘기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혜리를 보면서 수희는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그 선! 점쟁이 얘기 듣고 니가 주선해 준 거잖아. 너 고결 오빠도 셰프라고 칼이 어쩌고 했던 거 기억나? 이제 보니까 완전 엉터리였잖아~!”

“앗, 그러네. 언니 시집보내기 프로젝트 한다고 해 놓고 내가 앞서가 버렸네.”

수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해묵은 얘기에 혜리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내 수희의 팔짱을 끼고는 애교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