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협화음

“도면 나왔어요, 대표님.”

수희가 지원에게 노트북을 보여 주었다.

지원은 노트북 속 도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고했어. 정 사장 아직 확인 전이지?”

“네, 수정된 거라 아직이에요.”

“음~ 아주 멋진데? 까다로운 고결 오빠도 이 정도면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지원이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아, 진짜. 대표님~!”

“왜 이렇게 재밌니? 너무 잘 어울려. 고결 오빠, 왠지 교회 오빠 같은 느낌이잖아. 입에 착착 붙는다니까.”

수희의 투정에도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수희를 놀렸다.

“오늘 오빠 만나서 최종 컨펌 받을 거지?”

“네, 받아야죠….”

계속되는 지원의 놀림에 수희는 이젠 그냥 포기해 버렸다.

“그래, 수고해. 그럼 철거는 수요일부터 들어가면 되겠지? 황 팀장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수희 씨는 오빠 만나고 바로 퇴근해.”

지원은 싱글싱글 웃으며 여전히 장난스럽게 말했다.

수희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지원의 배려에 기분 좋게 대표실을 나왔다.

그러고는 고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희 씨?”

“아, 고결 오….”

‘아이참, 괜히 신경 쓰이게….’

수희는 지원의 짓궂은 장난이 떠올라 어쩐지 오빠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 방금 도면 최종본 나왔거든요. 바쁘시면 파일로 확인하셔도 되고요, 시간 되시면 제가 가서 설명해 드려도 되고요.”

“저야 수희 씨가 오면 좋죠.”

“네, 그럼 사장님 댁으로 갈게요. 거기서 설명해 드려야 더 좋을 것 같아요. 한 시간 뒤에 뵐게요~.”

“그래요.”

수희와 통화를 끝낸 고결은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호칭이 변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사장님? 흠… 이러면 좀 섭섭한데….”

고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

“사장님~!”

수희는 커피와 노트북을 들고 고결의 집으로 힘차게 들어섰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고결은 언제나처럼 친절한 미소를 띠면서 그녀를 맞았다.

“왔어요?”

“여기 커피요.”

“고마워요.”

수희가 테이블 위에 커피와 노트북을 내려놓고는 얼른 화면을 켜자 그녀 옆에 가서 슬그머니 앉는 고결.

“디자인 엄청 예쁘게 나왔어요. 자, 2층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그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면서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한동안 설명을 듣던 고결의 시선은 점차 수희의 얼굴로 옮겨갔다.

‘전에 그 말 때문에 선을 긋는 걸까?’

고결은 전에 농담처럼 했던 사귀자는 말 때문에 수희가 호칭을 바꾼 것으로 생각했다.

‘괜히 그랬나? 어떻게 하면 다시….’

하지만 그때 그 일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수희는 신나게 설명을 마치고 그에게 물었다.

“마음에 드세요? 수정하고 싶은 부분은 없으세요?”

“네? 네, 멋져요. 이대로 하죠.”

“그럼 수요일부터 철거 들어가도 될까요?”

“아….”

고결은 철거라는 말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왕이면 바로 하는 게 낫겠죠.”

그런 고결에게 수희가 위로하듯이 말을 건넸다.

“좀 섭섭하시겠어요. 부모님과 사시던 집이고 추억도 많으실 텐데….”

“네….”

‘추억? 그런 것도 추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희의 말에 고결은 문득 이 집에서 살았던 지난 시간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했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짐은 다 정리하셨어요?”

“아직이요. 이제 해야죠.”

수희의 질문에 마지못해 대답하는 고결.

미루고 있었던 일들을 이제는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럼 도와드릴까요? 원래 이렇게 보면 짐이 적어 보여도 막상 풀어놓으면 엄청나거든요. 혼자 하기 힘드실 거예요.”

또 괜한 오지랖을 부려 보는 수희.

혼자 사는 동네 오빠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오지랖이었다.

고결은 그런 수희가 좋았다.

평소에는 남이 자기 물건에 손대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예민한 이 남자.

그러나 그녀만큼은 간섭해 주기를, 신경을 써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네, 도와주세요.”

“그럼… 어디 좀 볼까요?”

고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희는 소매를 걷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막상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도 손을 댄 흔적이 없다. 마치 정리할 마음도, 버릴 마음도 없는 것처럼.

“박스 같은 건 있으세요? 버릴 건 분류해 놓으셨구요?”

“아뇨….”

고결의 대답에 수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사장님 너무 대책 없이 계신 거 아니에요? 전혀 안 그러실 것 같은데….”

“그래요? 평소에 내가 어떻게 보이길래….”

“음… 되게 철두철미하고 신중할 것 같고 준비성도 철저할 것 같으시고….”

평소 수희에게는 관대하고 다정하기만 한 고결.

그러나 꼭 지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고결의 이면에 그 어떤 강박과 예민함이 있음을 수희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꽤 정확한 수희의 말에 고결은 속으로 뜨끔하고 말았다.

잠자코 수희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불쑥 물었다.

“그 말은 내가 편하지는 않다는 거죠?”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수희는 고결의 질문에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이제 만난 지 겨우 대여섯 번째.

동네 오빠에 가까울까, 고객에 더 가까운 걸까?

결국 그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못한 채 수희는 얼른 말을 돌렸다.

“아… 뭐부터 하면 좋을까요? 일단 버릴 것부터 분류하는 게 좋을 거 같거든요.”

수희의 말에 고결도 문득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사실 며칠 전부터 계속 짐을 정리하려고는 했었다.

그러나 막상 이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들추어내고 싶지 않아 계속해서 외면하고 있었던 기억.

“수희 씨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나 이런 거 보기보다 못해요.”

속마음을 숨긴 채 고결은 수희를 바라보며 웃었다.

혼자서는 힘들지만 수희가 도와주면 왠지 무난히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황 팀장님한테 박스 좀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

하지만 수희 역시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제준에게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수희가 몸을 돌리면서 제준에게 전화를 거는 바로 그때.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고결의 시야에 한 소녀가 갑자기 나타났다.

“여보세요? 바빠? …여기 정 사장님 댁인데 짐 정리 좀 도와드리려고 하거든. 포장 박스 가지고 와 줄 수 있어?”

하얀 원피스를 입은 창백한 얼굴의 작은 소녀는 전화 통화를 하는 수희 옆에 우두커니 서서 고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결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소녀를 바라보는 고결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통화를 끝낸 수희가 뒤로 돌아보았다.

“…사장님?”

수희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고결을 무심결에 부르면서도 그의 얼굴이 너무 창백하고 핏기가 없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수희는 다시 그를 가만히 불렀다.

“사장님, 몸이 안 좋으세요?”

“…….”

그러나 고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희가 곁으로 왔지만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머무는 그의 시선, 그리고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의 양손.

“오빠, 고결 오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희는 고결의 떨리는 손을 감싸 쥐었다.

수희가 손을 잡자 고결은 번뜩 정신이 들었고 소녀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결은 그제야 숨을 깊이 내쉬었다.

“오빠, 어디 아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수희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 고결은 그제야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직원이 스파게티를 엎은 그날 이후 처음 보는 것 같다.

“저 화장실 좀….”

허둥지둥 화장실로 들어간 고결은 세면대에 물을 틀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왜 또 나타난 거야…?”

한편 고결의 그런 모습에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운 수희.

그러면서도 그가 걱정되어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뭘까?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시간을 보니 벌써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수희는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

수희는 바로 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이제 회사 앞에 거의 다 왔어.”

“응, 혜리야. 미안한데… 여기 고결 오빠 집이거든. 너 여기로 올래? 집 주소 찍어줄게.”

수희의 말에 혜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응, 알았어.”

**

“오빠, 이것도 버릴까요?”

“음… 네, 그것도 버려야 할 것 같아요.”

수희와 고결은 서로 얘기를 나누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걸터앉은 채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제준.

오늘 수희가 고결을 만난다는 걸 알게 된 제준은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며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수희의 전화를 받자마자 짐을 정리할 박스를 잔뜩 싣고 쏜살같이 고결의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제준아, 이 박스는 버릴 거니까 밖으로 빼줄래?”

“어, 그래.”

이 공간에서는 오로지 수희에게만 물건을 만지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는 걸 제준은 눈치 챘다.

그래서 제준은 수희가 부탁하는 것에만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제준이 감지한 것이 있었다.

바로 고결과 수희 사이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어.’

제준은 두 사람을 힐끗거리며 생각했다.

특히나 달라진 것은 고결을 대하는 수희의 태도였다.

수희가 진짜로 고결을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제준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저… 안녕하세요?”

혜리는 평소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결의 집에 들어섰다.

“왔어? 찾기 어렵진 않았어?”

“응, 금방 찾았어.”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수희를 보니 혜리는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사실 혜리는 저번에 고결과 헤어지고 나서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안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한 감정.

그녀에게는 낯선 감정이었다.

“고결 오빠, 안녕하세요.”

혜리는 수희 뒤에 서 있는 고결을 보고 한 번 더 인사를 건넸다.

고결은 수희를 의식해서인지 마지못해 혜리에게 친절하게 대꾸했다.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어, 제준 오빠도 있네?”

“어… 왔어?”

박스를 들고 지나가던 제준도 혜리를 보고 무심하게 인사를 건넸다.

혜리는 불과 얼마 전에 심각한 목소리로 고결을 아냐고 물었던 제준이 떠올랐다.

도대체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된 것인지 참 아리송하기만 한데….

뻘쭘하게 서 있는 혜리를 수희가 테이블로 데리고 가 앉혔다.

“혜리야, 미안. 여기 수요일부터 작업 들어가는데 정리를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아서…. 너 어색해? 괜히 불렀나?”

“아니야. 괜찮아.”

수희는 혜리에게 이래저래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고결을 혼자 둘 수가 없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혜리도 고결에 대한 뭔지 모를 찝찝함 때문에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근데 너 얘기하려던 거 있는 거 아니었어?”

“어? 그, 그랬나? 갑자기 생각이 잘 안 나네….”

수희는 혜리가 평소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라 짐작이 갔다.

“그럼 다음에 생각나면 해. 오늘은 저녁 먹고 오빠 좀 도와주고 가자.”

“응, 알았어.”

혜리가 순순히 대답하자 그제야 수희는 울상을 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혜리야, 맛있는 것 좀 시켜 봐. 나 배 너무 고파.”

“아… 그, 그래. 뭐 먹고 싶어?”

“오빠, 뭐 먹고 싶어요?”

수희가 고결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음… 글쎄요? 수희 씨는?”

“이런 날은 아무래도 중국 음식이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재깍 대답하는 수희.

제준이 그녀 옆에 앉으며 괜히 투덜거린다.

“나한테는 왜 안 묻냐?”

그러나 수희는 제준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혜리와 배달 앱을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결은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러움인지 질투인지 모를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피어오를 때 수희가 고개를 들고 고결에게 손짓을 했다.

“오빠도 여기 와서 고르세요.”

“아….”

“빨리요.”

수희의 재촉에 고결은 얼떨결에 세 사람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