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집중력의 상실

“술 한잔 더 할래?”

엘리베이터 앞에서 태주의 이 질문, 지시사항, 부탁, 제안인지 모를 말에 미호는 잠깐 망설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8년이란 기간이 문제 아니라 올해가 이상한 해인가보다. 박태주도 달라졌다. 미호도 달라질지 모르겠다.

“그럴까요?”

그 후 몇 시간 지난 뒤.

태주는 여기가 2층인지 3층인지 잊었다. 다만 객실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슈트 재킷 주머니엔 분명 카드 키도 있었다.

그때 거길 나왔어야 했다. 아니 술 한잔을 권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태주는 그러지 못했다. 낮고 느릿한 블루스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자글거리는 바텐더의 칵테일 셰이커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앞에 앉은 강미호, 이 여자 때문인지.

“그러니까 궁금한 게 뭐라고?”

취해서 계속 종알거리는 미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태주는 속으로 이 얼굴이 진짜 1년 동안 봤던 얼굴인지 재차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히끅.”

딸꾹질 한 번에 온몸이 살짝 움직였다. 치파오의 매끄러운 비단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미호가 움직일 때마다 자리를 바꿨다. 태주의 시선이 그 음영을 따라 바삐 움직였다.

“도대체 몇 번째예요. 사람이 말을 하면 집중하고 잘 들어야지!”

집중이라. 오늘 저녁나절, 이 호텔 로비에서 미호를 본 이후 없어졌다.

자기가 다 가져가 놓고 집중하라니.

“알았어. 집중할게. 다시 한번 말해봐.”

빈말이었다. 그러나 미호는 태주를 향해 돌아앉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소리가 나냐구요.”

태주도 제 몸을 돌려 미호를 향해 앉았다. 정면으로 보니 여자의 볼이 잘 익은 홍시처럼 도드라졌다.

“무슨 소리?”

“아니. 대표님 여자들이 내는 소리요.”

자꾸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니 결국 짜증이 났던 것인지, 입술을 꽉 다물며 허리를 세우다 무릎이 태주의 무릎에 닿았다. 아주 작고 동그란 접촉이 태주를 찌릿하게 울렸다.

“그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빤히 태주를 보는 얼굴을 태주도 가만히 응시했다. 백자처럼 볼록하게 오른 이마, 오늘따라 유연한 눈썹, 흑진주처럼 까만 눈동자.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볼과 입술.

망설이는 듯 꿈틀거리는 입술을 미호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 바람에 빨간 립스틱이 입가로 번져 나가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저것을 닦아준다면, 그것은 예의일까 욕망일까. 아, 성추행이 될 수도 있다.

태주는 손을 말아 쥐었다.

“하… 이거 곤란한데. 흉내 낼 수도 없고.”

미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픽 기울이더니, 저 혼자 배시시 웃었다. 그 바람에 볼에 분꽃 씨 같은 보조개가 보였다.

태주는 기다렸다. 아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느라 삐죽이는 입술과 오르락거리는 볼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요. 하응. 하… 응하… 하아… 였던가?”

이게 맞느냐는 듯 여자는 동그란 눈동자를 흔들며 태주의 얼굴을 살폈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의 원나잇 상대들이 잠자리에서 지르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 묻고 있었다.

“하하하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질문도 웃겼고, 그것을 흉내 내는 미호도 웃겼고, 잘 흉내 냈는지 검사 맞는듯한 표정도 웃겼고, 지금 이러고 있는 상황은 기가 막혔다.

저를 비웃는 줄 알았는지 여자의 얼굴은 모두 뾰로통해졌다.

“그건 남자친구한테 물어봐야지.”

“헤어졌어요.”

빠르게 말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올린 머리에서 빠진 머리카락이 볼을 감싸 내려오더니 가슴께에서 떨어졌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울었구나.

동시에, 이 여자는 내 비서구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태주는 웨이터에게 손짓해서 물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땀이 흥건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왜?”

정신이 번쩍 들면 뭐 하나? 이런 질문은 속절없이 흘러나왔다. 더 나가다간 신세 망칠 수 있었다. 자! 한바탕 웃었으니까 빨리 일어나자, 박태주!

“다른 여자가 생겼대요.”

미친 새끼.

태주. 네가 미쳤다. 네 비서를 앞에 두고 침을 질질 흘리는 너도 미쳤단 말이다.

마침 바텐더가 놓고 간 찬물을 집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요. 왜 그런 소리가 나냐구요.”

“좋으니까 그런 소리를 내는 거지.”

간지러운 짜증에 아무렇게나 대답해버렸다.

근데 지금 이 여자가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인가?

“뭐가 좋은 거죠? 그거 가짜로 연습하는 사람도 있다면서요. 어디 강습 같은 것도 있나?”

허! 이렇게 나오면 또 얘기가 다르지. 태주는 제 몸을 돌려 다시 미호를 향해 앉았다.

“강습? 그건 아니지. 해줄까?”

이게 진정 내 입에서 나온 말인가? 발끈할 게 따로 있지.

태주는 자기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땡땡땡 빨간불이 요동쳐 울렸다.

“네.”

뭐? 태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의외의 대답을 내뱉은 미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미쳤나. 이럴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 옳고 바른, 숨 막힐 것 같던 강미호가 지금 나랑 올라가겠다고?

“내가 해준다는 게 뭔지 알아?”

설마 모르겠지.

“네. 알아요.”

“당신 취했니?”

“약간 알딸딸하긴 한데, 생각은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태주는 멍하게 미호를 내려 보았다. 이 여자는 하룻밤 보고 말 사람이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태주의 비서였다. 내일도 보고 낼모레도 볼 여자였다. 몸이 먼저 움직이면 안 되었고 생각을 해야 했건만.

감각은 이성, 합리, 논리 등을 모두 엎어버리는 악마다. 이 여자도, 여기 이 바도, 심지어 얼음물도, 망할 베이징도 모두 악마였다.

“가자.”

방으로 오늘의 술값을 달아 놓고 태주는 미호를 부축하며 진작에 빠져나갔어야 할, 아니 애초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할 그 길을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 층으로 올라갔다.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미호가 앞장서 내렸다.

태주는 몰랐다. 늘 옷을 펑퍼짐하게 입고 다녀서 저렇게 화끈하게 휘어진 몸매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작은 머리통에, 길고 여린 목과 부드럽게 이어진 어깨 아래로 축 늘어진 긴 팔 그리고 그 가운데 모래시계를 연상시키는 두 선. 그 아래 길게 뻗은 다리.

“근데… 방이 어디예요?”

저 혼자 슬렁슬렁 가던 미호가 돌연 홱 돌아 물었다. 그 속도를 차마 감당할 수 없었는지 다리가 꼬여 앞으로 넘어질 뻔한 것을 태주가 달려가 붙잡아 주었다.

“휴우….”

안 넘어졌네… 하며 미호가 내쉬는 한숨. 그 작은 바람에 위스키 향이 솔바람처럼 흘러 태주의 목을 간지럽혔다.

“여기.”

“아….”

또 넘어질세라 팔을 돌려 자연스럽게 가녀린 어깨를 끌어 잡았다.

아. 될 대로 돼라. 나도 모르겠다.

*

방문이 열리자 여자는 자기 방처럼 여유롭게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태주는 재킷과 미호의 퍼스 백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리고 스위트룸을 돌아보는 미호를 구경했다.

여자들을 데리고 집에 오면 어떻게 시작했더라. 무수한 여인들과의 무수한 밤들도 저 여자가 모두 갉아 먹은 듯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미호는 창문의 커튼을 열고 제 손바닥과 코를 유리에 붙인 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코 밑과 입술 근처에 하얀 입김이 퍼져 유리에 붙었다.

뒤에서 안아주고 저 곰살맞게 바스락거리는 비단옷을 벗기고, 드러나는 하얀 목에 입술을 문지르고.

그러나 태주의 발은 꼼짝할 수 없었다.

바보처럼 얼쩡대는 본인에게 화가 일었다. 그렇다고 그냥 안아버리자니 그것도 아니었다. 갈피를 못 잡는 저가 싫었는지 괜히 미호에게 소리를 쳤다.

“야! 구미호! 너 정신 안 차려!”

그러나 아주 약한 소리. 치나 마나 한 소리. 어찌 들으면 보채는 소리만 들려왔다.

“하….”

나름 피눈물 나는 노력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여자가 창문에서 몸을 돌려 제 등을 기대더니 태주를 찾아 바라보았다.

“나 안 취했어요.”

지금 이 여자는 떠난 남자에 대한 분풀이를 나한테 쏟아 놓는 거다. 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박태주를 실험실 쥐 고르듯 골랐다.

무엇보다, 태주는 여태 눈에 띄지 않던 이 여자가 대한민국 1위 에이스 백화점 대표, 일명 재벌 카사노바를 단 한 번에 흔들어 놓고 있다는 게 원통했다.

“근데 화났어요?”

“아니.”

나약하고 의미 없는 최종발악은 결국 그렇게 꺼져버렸다.

“아… 회사에서 제가 성추행으로 신고할까 봐? 합의에 의한 성관계. 녹음이라도 해드릴까?”

말이 끝났으면 입을 다물 것이지. 미호는 까? 하면서 입술을 동그랗게 벌려 놓은채 태주를 바라봤다.

오늘 하루 종일 태주의 심장을 조물락거렸던 저 발칙한 체리. 태주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미호의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쌌다. 홍시가 따뜻하게 손바닥에 감겨왔다.

그리고 앞으로 쭉 밀린 미호의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태주의 동공이 마구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여자에게 똑바로 초점을 맞출 수 없었다.

“이게 다?”

눈을 감고 있던 미호가 눈을 뜨다 말고 물었다. 심장은 아까부터 벌렁거리고 있었다.

태주와 바에서 마신 위스키 때문인가 싶었지만 아까 태주에게 분명히 말했듯이 멈추려면 멈출 수 있었다.

이 남자가 궁금하지도 않았고 아니 이 남자는 남자인 적이 없고 직장 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팔백만 원짜리 옷 때문인지도 몰랐다. 보드랍게 살을 감싸는 느낌이 좋았고 무엇보다 이 옷을 입은 자신이, 미호 스스로가 보아도 예뻐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품어져 나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망할 근재의 생각을 떨쳐버리려 이젠 안 하던 짓을 할 용기인지 객기인지가 발동되었을 수도 있다.

“하… 젠장… 아직 멀었어. 이 여우.”

느긋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태주가 속삭였다. 태주의 볼에서 느껴지는 까슬한 수염의 느낌이 짜릿하게 자극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턱을 치켜들었더니 남자의 입술이 확 와 닿으면서 따뜻한 태주의 혀가 입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회사에서는 지독하게만 느껴졌던 태주의 향수 냄새가 섹시했다. 무엇보다 비단옷을 통해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과, 손바닥의 뜨거움에 미호는 금세라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

무릎이 저절로 꺾어져 쓰러질 것 같아 그의 어깨를 잡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태주는 제 얼굴을 미호의 목덜미에 묻었다. 그의 얼굴이 가는 곳마다 아득하게 그의 촉촉한 혀끝의 감각이 전해졌다.

미호는 오늘은 섹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잠자리에서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내 즐거움을 찾는 것인지, 시각적으로 요염한 것인지.

뭔지 몰랐지만 적어도 엉겨 붙는 남자를 멈추지 않는 것은 적어도 섹시했다.

달라지긴 했다.

왜란 말은 하지 말자. 오늘은 섹시할 것이다.

어느새 미호와 태주는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태주의 손은 쉴새 없이 미호의 몸 어딘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미호는 천천히 치파오의 꼬임 단추로 손을 올렸다.

“내가 할게.”

느릿한 태주의 말에 미호는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싫어요.”

그리고 또 처음으로 명령했다.

“계속 거기 만져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