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전 있는 여자

“불금이에요. 어서들 퇴근 하세요~”

윤희는 경쾌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팀원들에게 먼저 퇴근 인사를 건넸다.

“역시 팀장님~, 금요일에는 칼퇴 하시네요.”

“그럼요, 금요일은 칼퇴지요.”

윤희는 당연하다는 듯 팀원들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팀장님들은 금요일에도 야근을 해서 팀원들이 눈치 보기 바쁘다던데, 우리 팀장님은 가장 먼저 퇴근해 주시는 센스. 역시 팀장님, 너무 좋아요.”

“팀장님 오늘도 약속 있으시죠? 언제 시간 내주세요. 저희 랑도 놀아주세요.”

“아! 팀장님 오늘 의상 너무 예쁘셨어요.”

“고마워요. 다들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봬요~”

팀원들과 화기애애한 퇴근 인사를 끝으로, 서둘러 사무실을 나온 윤희는 누가 봐도 약속이 있어 보였다. 윤희는 닫히는 엘리베이터에 가까스로 아슬아슬하게 올랐다.

‘아 젠장. 저 인간이 타고 있을 줄이야.’

“퇴근하시나 봐요.”

윤희는 다시 미소를 장착하고, 옆 팀 최 팀장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요즘 들어 최 팀장이 저를 바라보는 묘한 시선이 굉장히 거슬렸다.

“네, 약속 있으신가 봐요.”

그의 시선이 윤희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아, 네.”

“언제 우리도 술 한 잔 같이 해요.”

‘웃기시네. 내가 왜 당신이랑 술을 마셔?’

최 팀장은 라떼 근성의 대표주자로 술자리에서 후배들과 주변을 불편하게 하기로 꽤 유명했다.

하지만 윤희는 속마음과 달리 친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그래요.”

물론 같이 마실 생각은 추호도 없는 인사치레의 빈말이었다.

‘어색해 죽겠는데, 엘리베이터는 왜 이렇게 느린 거야?’

“혹시, 차 안 가져오셨으면 제가 약속 장소까지 태워드릴까요?”

최 팀장의 부담스럽고 과한 친절에, 윤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려고요. 그럼 주말 잘 보내세요.”

윤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약속시간에 늦은 듯 서둘러 내렸다. 다행히 회사 빌딩 앞 대로변에서 택시가 바로 잡혔다.

‘그냥 차를 가지고 올 걸 그랬나.’

30분 후, 한적한 주택가 입구에서 택시 한 대가 멈췄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린 무표정한 얼굴의 윤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셨다. 일주일 동안 누적된 피로와 긴장감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거 같았다.

“휴-, 약속 있는 척하기도 힘드네.”

이윤희. 겉으로는 일을 사랑하는 커리어 우먼인 동시에 고액 연봉의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듯 보이지만, 실체는 퇴근 후 약속이 거의 없는 여자사람이었다.

그녀는 주변에서 ‘결혼해라’, ‘연애해라’, ‘이 사람 어떻게 생각 하냐’, ‘저 사람 만나라’ 등의 오지랖에 지쳐 자기방어로 퇴근 후 가상 라이프를 만들었다. 윤희는 바쁜 척, 인생을 즐기는 척, 연애는 즐기지만 결혼에는 관심 없는 척 했다. 그렇게 그녀는 회사에서 화려하고 쿨한 싱글녀 이미지를 구축했다.

또각! 또각!

점점 깔리기 시작하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윤희의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작은 가게 앞에서 윤희가 멈췄다.

원조 외할머니 왕족발.

익숙한 문을 열고 들어간 가게 내부는 한적한 골목과 달리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희를 보고 반갑게 걸어오시는 사장님을 향해 윤희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족발 대자 포장해 주세요.”

가게에서 나오자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또-각, 또-각!

오전의 당당했던 윤희의 하이힐 소리와 달리, 힘없이 처량하게 들리는 구두굽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지친 듯 걷는 윤희는 아이보리색 실크 블라우스와 타이트해서 몸매가 돋보이는 짙은 보라색 하이웨스트 스커트를 입고, 신상 명품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에 자연스럽고 굵은 웨이브, 귀에는 적당한 원형 사이즈의 단아한 진주 귀걸이. 가늘고 긴 하얀 손목에는 고가의 빈티지 클래식 시계와 팔찌가 레이어드 되어있었다, 다만 그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검은색 봉다리가 들려있었다.

“빨리 가서 족발 먹어야지.”

피곤하지만 족발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윤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려 소주와 맥주, 어묵으로 만든 소시지 몇 개를 더 구매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아무도 없나?’

윤희는 현관에 아무렇게나 힐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바로 거실 바닥에 앉아 족발이 든 봉지를 열었다.

“족발~ 족발~ 맛있는 족발을 먹지요~”

그녀는 본인이 즉흥적으로 급하게 작사, 작곡한 괴상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동시에 티브이를 켜고 채널을 돌리며 볼만한 예능을 찾았다.

“아하하하하하~ 웃겨! 아 진짜, 왜 이렇게 웃긴 거야!”

불이 꺼져 어둑하고 넓은 거실로 티브이 소리와 함께 윤희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녀는 혼자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능숙하고 즐겁게 소주를 마셨다. 입고 있던 실크 블라우스가 걸리 적 거리기 시작하자, 대충 단추 몇 개를 풀러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타이트한 스커트가 불편해 허리춤의 지퍼만 적당히 내렸다. 스타킹도 벗을까 말까 고민하다 귀찮아 결국 나중에 벗기로 했다.

***

“야! 이 기집애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윤희의 등짝을 아주 세게 후려친 덕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아파!”

“이 기집애가 미쳤네, 미쳤어! 옷도 안 갈아입고, 소파에서 또 처자고 있어! 족발은 다 벌려 놓고! 술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아 엄마! 진짜!”

“기집애가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족발에 술이나 처마시고!”

“아! 시집 안 간다고!”

‘아니! 시집은 나 혼자 가나? 상대가 있어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윤희를 웬수 보듯 보고 한숨을 쉬는 엄마를 방으로 들여보낸 후, 아빠가 윤희 옆으로 앉았다.

“윤희야.”

부드러운 아빠의 목소리에 윤희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네, 아빠.”

“옷은 갈아입고, 족발을 먹지 그랬니.”

딸의 실크 블라우스를 만지며, 안쓰럽게 바라보는 아빠의 눈은 ‘우리 딸 많이 피곤했구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배고팠고, 귀찮았어요.”

“그래, 그랬겠지.”

아빠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윤희야.”

아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윤희를 불렀다.

“네, 아빠.”

“아빠가 족발은 사 먹지 말라고 했잖니.”

차분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 아래 약간의 짜증과 짙은 서운함이 깔려있었다.

“족발이 먹고 싶어서 사 먹은 거예요.”

“그럼 아빠한테 말을 했어야지. 아빠가 족발집 사장인데, 딸이 다른 가게에서 사 먹으면 아빠 마음이 어떻겠니?”

윤희의 부모님은 족발 장사를 한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한 장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잘 되었다. 그리하여 넓은 곳으로 가게를 여러 번 이전했고, 현재는 강남에서 족발집 세 개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윤희네 부모님, 특히 아빠는 그녀가 다른 가게의 족발을 먹는 걸 아주 많이 서운해했다.

“아빠한테 말하면 아빠가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먹고 싶을 때 바로 먹어야지.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다.’

그때 부모님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휴, 저놈의 기집애는 어릴 때 그렇게 족발집 딸인 게 창피하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다른 가게 족발은 잘도 사 먹어요!”

“아, 엄마 진짜! 내 돈 주고 내가 사 먹는데!”

“뭐야?”

“여보 들어가요. 들어가.”

아빠는 손을 휘휘 저으며 다시 엄마를 방으로 들여보낸 후, 윤희 곁으로 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다른 집 족발 사 먹지 말고, 아빠한테 미리 연락해. 아빠가 네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배달 보내줄게.”

“네.”

“다른 건 몰라도 족발은 꼭! 아빠 거로 먹어라.”

순간, 족발에 대한 아빠의 강한 프라이드가 느껴졌다.

“알겠어요.”

그나저나 윤희는 화장을 안 지우고 잔 덕분에, 피부에 뾰루지가 돋고 족발과 소주로 얼굴이 탱탱 부어 있었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아빠와 엄마는 다시 나간 듯했다.

윤희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목이 있는 대로 늘어난 티와 무릎이 있는 대로 튀어나온 수면바지를 입고 다시 주섬주섬 어제 먹다 남은 족발을 뜯기 시작했다.

‘식어도 참 맛있네. 어릴 때는 이 맛있는 게 왜 싫었을까?’

어릴 때는 족발이 그렇게 싫었다. 나에게 깔끔하고 예쁜 원피스를 입히고, 머리도 정성스럽게 땋아 올려주고 말끔히 세차된 차로 학교에 데려다주신 부모님은 가게로 돌아가 하루 종일 땀을 흘리시며 장사를 하셨다.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싫었는지….’

윤희는 쫀득쫀득하게 식은 족발에 맥주를 먹으며,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꿀 조합이라 생각했다.

‘아 진짜, 너무 맛있어!’

그녀는 마지막 맥주 캔을 끝내고, 아쉬움에 주방으로 향했다.

“이놈의 집구석 맥주가 하나도 없네.”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가 없음을 확인하자 짜증이 확 밀려왔다.

‘먹다가 맥이 끊기는 게 제일 싫은데, 어제 맥주를 더 사 왔어야 했어.’

윤희는 한쪽 손에 족발 뼈를 든 채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찾았다.

‘윤똥꾸한테 맥주 좀 사 오라고 해야겠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 화면에 ‘동생 이윤한’이 떴다.

“여보세요?”

“야, 윤똥꾸. 맥주 좀 사 와.”

“나 공부 중.”

“공부 안 하는 거 다 알아. 빨리 가서 사 와.”

“귀찮아.”

“게으른 자식.”

‘동생은 있어서 뭐 하나. 부려먹지 못하면 쓸모가 없는 것을.’

결국 포기한 윤희가 전화를 끊은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방 안에서 그녀가 게으른 자식이라고 칭하는 동생이 기어 나왔다.

“누나는 집에 같이 있으면서 왜 전화를 하는 거야?”

윤희는 당연한 걸 묻는 동생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왜긴 왜야? 귀찮아서 지.”

“누나, 족발은 왜 그렇게 공포스럽게 뜯고 있어?”

‘내가 족발을 뜯던, 오징어를 씹던, 심부름도 안 하는 어린 노무 시키가 어디서 나대는 거야!’

“독서실 가서 공부나 해!”

“어휴, 노처녀.”

“뭐야?”

노처녀라는 말에 윤희가 일어나려고 상체를 들자, 윤한이 빠르게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윤희는 다시 핸드폰을 들고 배달 앱을 실행시켰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기에는 배달 앱 만한 게 없지.’

며칠 전 재하가 신규 배달대행업체를 알려줬다. 신규라서 그런지 쿠폰을 많이 준다는 말이 떠올라 앱을 다운로드 후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진정된 마음으로 다시 예능을 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인터폰을 통해, 맥주가 도착했음을 확인한 윤희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캔 맥주가 들어있는 봉투를 윤희에게 내민 손이 문틈 사이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퍼억!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윤희가 봉투를 채 잡기도 전에 상대방이 손을 먼저 빼버렸다. 그 때문에 맥주가 현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

“!”

윤희와 배달기사, 둘 다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둘은 맥주를 주우려고 손을 뻗었다.

쾅!

“아얏!”

순간 거창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윤희를 강하게 때렸다. 윤희가 무엇인가로부터 제 얼굴이 강타 당했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이미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배달 기사가 재빠르게 윤희를 잡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이 늘어난 티의 목 부분을 잡았다. 힘없이 늘어져있던 목 부분을 잡은 탓에 옷이 팽팽하게 당겨지더니 곧 부우우우우욱- 찢어지는 소리를 냈고, 놀란 배달 기사는 잡은 손을 황급히 놓았다.

“으아아악!”

현관에서 뒤로 넘어진 채 윤희가 아파하는 사이, 어쩔 줄 모르는 배달기사가 윤희에게 다가왔다.

“괘, 괜찮으세요?”

“흐으윽… 아파요. 너무 아파.”

윤희는 코에서 뭔가가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져 코 부근을 만지자 뜨끈한 무엇인가가 손에 묻었다.

“아, 아파. 이건 뭐지? 땀인가?”

“어, 어떡해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어떡하지?”

‘배달기사가 내 얼굴을 보고 왜 저렇게 당황하지?’

정신이 혼미해진 윤희는 현관에 넘어진 채, 자신에게 연거푸 사과하며 당황하는 배달 기사를 멍하게 바라봤다. 배달 기사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거 같았다. 윤희는 점점 더 몽롱해진 눈으로 제 손에 묻은 붉은 피를 멍하게 보았다.

“피? 피가… 나네.”

윤희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저기요. 정신 차리세요. 이보세요!”

정신 차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점점 멀어질 즈음 윤똥꾸의 외침이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

“야! 이 새끼, 너 뭐야! 우리 누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누나아아아아 –”

***

“누나! 누나, 정신 차려!”

멀리서 저를 부르던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왔다.

‘아, 아파. 코가 왜 이렇게 욱신거리지?’

“누나?”

윤희가 천천히 눈을 뜨자, 윤한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나!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내 동생, 윤똥꾸.”

윤희의 대답에 윤한이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누나!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선생님, 여기요! 우리 누나가 깨어났어요!”

‘선생님이라고?’

그제야 집과 다른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윤희 님, 과로에 외부 충격이 더해지면서 잠시 기절하셨어요. 다행히 코뼈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단, 오늘은 무조건 푹 쉬세요.”

‘무슨 말이지? 과로에 충격? 과로는 회사일 때문에 그렇다 쳐도, 충격이라니? 무슨 충격?’

“어떻게 된 일이야?”

윤희는 아직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윤한에게 물었다.

상황은 이러했다. 다음 배달 스케줄로 바빴던 배달기사는 윤희가 미처 맥주가 든 봉지를 잡기도 전에 손을 놓았고, 덕분에 맥주가 현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동시에 놀란 두 사람은 서로 먼저 맥주를 집으려고 했고, 배달기사가 조금 더 빨랐다. 그리하여 배달기사가 바로 고개를 들었을 때, 역시 맥주를 집으려고 고개를 숙였던 윤희 얼굴과 부딪혔다. 윤희가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지자, 배달기사가 넘어지는 윤희를 잡는다는 게, 하필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의 목 부분을 잡은 거다.

윤한은 배달기사한테 들은 상황과 제가 목격한 상황을 접목시켜 윤희에게 설명을 했다. 설명을 다 들은 윤희는 마침 한쪽 구석에 서있던 헬멧을 쓴 남자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