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 째 나는 편지지 위에서 수많은 단어를, 아니 수많은 문장을 열거했다.'‘헤어지자.’ ‘우리 그만할까? 아니 그만 하자.’ ‘이제 끝내.’ ‘나 진짜 힘들어.’ ‘놔 줘.’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그것은 이별의 물꼬를 터트리기 위한 시작이자 관계의 마침표였다.'그리고 내가 마지못해 선택한 그 문장은…….''나에게서 너는 미안한 사람이었다.'우리가 어쩌다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늦은 밤. 반으로 조각 난 달 아래서 나는 상념에 잠겼다. 손바닥에서 새어 나온 땀에 오그라든 청첩장만 등신처럼 바라봤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종이 안에는 네 이름이 적혀 있을 줄 알았다. 첫사랑의 추억 속에 내 온몸은 잿빛이 되어 아주 잠깐 과거의 황노미가 되어 보았다.'시작은 자신만만했다. 고무신? 그게 뭐 별거야? 까짓 것 그 고무신. 20년도 아닌 2년 반을 못 참을까. 겨울눈만 두 번 맞으면 네가 돌아 올 거다. 라고 나는 확신했다. ‘기다릴 수 있겠냐.’는 물음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네가 군화를 거꾸로 신었으면 신었지. 나는 안 변해.’'‘웃기고 있네.’'아, 나는 정말로 웃기고 있었다. 네가 없는 첫 봄. 나는 잠을 자는 도중 문득 울었다. 골목 어귀에 뿌리박힌 가로등 불빛이 겨우 창 안에 새어들어 왔던 그 밤. 홀로 자신을 감싸며 자고 있는 엄마의 등 자락을 바라보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외로움 그것이 기어코 찾아왔다. 일찍이 병으로 먼저 가셨던 아빠의 빈자리가 다시 커다랗게 보였다. 네가 메웠던 자리에 다시금 커다랗게 구멍이 나 외로움 그 고약한 것이 다시 내 구석에 달라붙었다. 지금으로써 그게 나의 유일한 변명이자 이유다.'그렇게 하나둘씩 구멍이 생기고 틈이 생기며 그 단단했던 장벽이 부질없이 무너졌다. 네가 내 옆에 없다는 이유. 내 손을 잡아 줬던 네가 내 옆에 없다는 이유.'“너 소개팅 해라. 그 군바리랑은 헤어졌지?”'1년 전만 해도 균이를 바라보며 나를 부러워했던 친구들이 군대 간 그를 가리켰던 말은 고작 ‘군바리.’'“안 헤어졌어.”'“어우! 어우 저 등신.”'게다가 외로움을 참으면서 널 기다리면서 듣는 말이라곤 고작 등신. 등신일까, 아님 어쩜 등신일 줄도 모른다. 관자에 머무는 그 말에 점점 나도 이골이 났다. 손가락이 빠져가며 쓰는 손 편지의 낭만도 사라져갔고, 휴가를 나올 때면 당연하듯 찾는 모텔에도 싫증이 났다. '그리고 세상에 유독 특별하고 유독 아름다운 사랑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