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훤칠한 청년들이 풍채 좋은 중년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세상의 소리라고는 오직 중년 남자의 음성뿐인 듯, 넓은 거실에 그의 커다란 말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중년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합창이라도 하듯 세 청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버지!”'병섭은 입을 꾹 다물고 매서운 눈을 들어 사정없이 아들들을 쏘아봤다. 서슬 퍼런 병섭의 눈에 이내 고개를 숙인 학진과 달리,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학명과 학선이 고개를 수그렸다. 하지만 삼형제는 똑같이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간과하며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학명과 학선은 슬며시 병섭의 눈치를 보며 곁눈으로 서로에게 발언권을 밀고 있었다. 학진은 이미 포기한 듯했지만 자신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학선이 학명의 옆구리를 푹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나마 할 말은 하는 학명이었다. 평소 상황이었다면 학명이 진즉에 반발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에서 누구 하나 입을 잘못 뗐다간 뼈도 못 추릴 태세였다. 학명은 한숨만 쉴 뿐,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정적의 시간이 흐르며 갑갑한 마음에 학명은 슬쩍 고개를 들어 병섭을 바라봤다. 아직 50도 안 된 아버지가 노망이 났을 리는 없었다. 병섭은 당장 소를 때려잡으라고 해도 잡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노망이 아니라면 좀 전에 들은 말은 설명이 안 됐다. 올해 스물다섯인 최씨 일가의 장손 학진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섭은 학진을 볼 때마다 스무 살이 넘으면 장가를 보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런데 학진이 스물다섯 살이 넘도록 가만있었으니, 그 성격에 오랫동안 인내하며 기다려준 셈이었다.'허나! 이제 스물넷인 자신과 한 살 아래인 학선까지, 올해 안으로 구슬 꿰듯 장가를 가라는 명은 너무한 처사였다. 수없이 머리를 굴려 봐도 노망이 난 게 틀림없다는 결론뿐이었다. 학명은 다시 미심쩍은 눈으로 병섭을 바라봤다. 병섭은 선대에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땅으로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근래 학선을 통해 주워들은 바로는, 몇 년 전부터는 회사도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그러니 몇 년째 지역구 의원까지 하겠지 싶었다. 어디 그뿐인가 싶었다. 병섭의 불같으면서도 곧은 성품으로 인해, 그의 위용은 수원은 물론이고 그 일대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디 가서도 결코 기가 죽지 않는 자신들도 병섭 앞에만 서면 기가 죽었다. 병섭은 매서운 호랑이, 그 자체였다.'그런 병섭이 최근 정치를 하며 속 썩는 일이 많다고 했다. 학명은 ‘역시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새 정치판에서 뇌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병섭은 복학을 해 얌전히 대학을 다니는 학진을 필두로 자신들까지 반드시 장가보낸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학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병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학명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에 있는지 병섭이 잊은 게 분명했다. 학명은 국가대표 유도 선수였다. 그런 학명이 지난 올림픽에서 동메달에 그친 패배를 씻고,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제패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잊고 있는 듯했다. 병섭은 분명 그 모든 걸 잊고 자신에게 결혼하라고 하는 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명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집에 오니 마음에 안 들고 이상한 것들뿐이었다. 몇 주 전 제대한 학선만 해도 그랬다. 학선은 전국 방방 곳곳을 쏘다니며 강태공이 울고 갈 정도로 낚시와 여행에 빠져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 학선을 병섭이 무슨 수로 도장에 묶어놨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학선은 모든 걸 포기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차피 결혼할 거, 시기만 앞당겼다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솔직히 학명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긴 했었다. 그들이 몇 시간 더 버틴다고 물러설 병섭이 아니었다. 결국 학명도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드디어 세 명의 청년들 입에서 항복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병섭은 그제야 만족스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으로 사라지는 병섭의 뒷모습을 보고 학명과 학선은 서둘러 다리를 폈다. 커다란 집을 감싸던 무거운 공기가 이제 좀 가벼워지고 있었다.'“에고, 다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