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틀 동안, 해이는 산처럼 쌓여있는 자료 정리에 새 제품 홍보를 위한 인터넷 광고 제작으로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일에 파묻혀있었다.

이틀 전, 야근을 못 하겠다는 해이의 도발을 두고 손두준 과정은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해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일만 집중했다. 상사의 눈치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제 그녀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쇼핑백에 담아온 새 드레스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옷을 입고 출근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입고 왔다면, 분명 동료 여직원들이 “무슨 일 있느냐?” “오늘 어디 가냐?” “선보냐?” 등등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래서 담아온 것이었는데, 입고 있는 것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오후 6시 정각, 해이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짐을 챙겨 옆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손 과장은 두 눈을 치켜뜨며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두 사람의 신경전을 두고 조마조마하는 눈치였다.

여자 화장실에서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강태후가 선물해준 하트 목걸이를 걸었다. 1캐럿짜리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도 착용했다.

얼굴도, 옷도 한결 귀티가 나고 우아해 보였다. 구두도 높은 하이힐로 바꿔 신었다.

“이 정도면 창립 파티에 어울릴만하지?”

해이는 만족스러웠는지 거울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연락이 없지? 데리러 온다고 했으면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마트폰이 울렸다.

“해이 씨, 회사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내려오시죠.”

“네, 준비 다 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해이는 입고 온 옷은 쇼핑백에 담아서 여자 휴게실의 창고 안에 넣어두고 작은 핸드백만 메고 내려갔다.

강태후는 해이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차에서 나와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 매너, 스윗해.’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차에 탔다.

“오늘 무척 예쁜데요. 옷이 날개라더니, 다른 사람 같습니다. 그냥 편한 차림으로 와도 되는데, 꽤 신경 썼네요.”

“중요한 자리 아닌가요? 제가 초라해서 강태후 씨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되잖아요. 그 자리엔 손님들도 많을 텐데….”

“제 눈에만 예쁘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이 해이 씨한테 관심 가질까 봐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어머, 제비 같아요. 여자 마음 홀리는….”

“지금 저더러 제비라고 했습니까? 해이 씨, 절 지금 조류에 비유하셨습니까? 이거 인간 이하라고 무시하는 거 같은데요. 하하.”

“무시는 안 했고요. 조금 느끼하기는 했어요. 그리고 요즘 잘나가는 조류가 얼마나 많은데요.”

“잘나가는 조류 뭐가 있는데요?”

“펭수 있잖아요. BTS 라이벌.”

“하하하. 펭수한테 졌습니다. 그래도 제가 오일은 좀 수입하는데, 몸에 바르지는 않습니다.”

“호호호.”

“그럼, 강오일은 출발하겠습니다. 안전벨트 잘 매시고요.”

그는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

퇴근 시간이라 조금 막히긴 했지만, 한 시간쯤 걸려 이촌동에 도착했다. 강태후가 멈춘 빌딩 앞에는 ‘(주)옐로우 피치 창립 8주년 기념 파티’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내린 곳은 20층에 있는 리셉션장이었다.

커다란 홀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백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중후해 보이는 중년의 남성들이 많았고, 젊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해이는 생각보다 큰 규모의 파티에 적잖이 놀랐다. 그녀는 태후가 많아야 십여 명의 직원들 두었을까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열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이 남자, 어느 정도의 회사를 운영하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초대되었지?’

강태후가 입구에 들어오자 보는 사람들마다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젊은 직원들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악수를 청했다.

“강태후 사장님, 축하해요! 벌써 8주년이 되었군요. 우리 백화점에서 매출 상위 5위 안에 들 정도로 크다니, 정말 대단해요. 이런 훌륭한 파트너와 함께해서 우리 회사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별말씀을요. 이렇게 사장님께서 찾아와주시니 저로서도 영광입니다.”

강태후는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하며 손님들을 챙겼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해이가 소외되지 않도록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해이 씨, 나 잠깐 강단에 올라가 봐야 해요. 창립식 간단하게 하고 내려올 거니까 편하게 있어요.”

“알겠어요. 전 여기 있을 테니까 다녀오세요.”

강태후는 해이에게 말을 건네고 바로 앞으로 갔다.

단상에는 임원으로 보이는 세 명이 함께 있었다. 그중에는 여자 이사도 있었다. 장마리였다. 멀리 있었지만, 해이는 그녀를 보면서 어딘가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어디서 본 듯하네.”

하지만 이내 관심을 끄고 앞으로 나오는 강태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다.

“이렇게 저희 ‘주식회사 옐로우 피치’의 창립 8주년 기념 파티에 참석해주신 모든 내빈들께 감사드립니다. 여기 모이신 사업 파트너들과 저희 직원들은 그동안 함께 고생하며 사업을 일구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매년 20퍼센트 이상씩 성장하며 현재는 연 매출 1000억의 성과를 달성하는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협력사들과 함께 땀 흘린 저희 직원 모두의 노력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모두 오늘 마련한 음식을 드시면서 마음 편히 축하 공연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강태후가 인사말을 마치가 모두 박수를 쳤고, 그가 내려오자마자, 재즈 공연이 이어졌다.

해이는 그가 한 말을 듣고 놀랐다.

‘연 매출 천억? 이 남자, 감쪽같이 날 속였네. 작은 무역회사라더니 꽤 큰 기업이잖아! 이렇게 잘나가는 CEO인 줄도 모르고… 올 때 제비 같다고 농담이나 하고. 아, 창피해.’

해이는 너무 부끄러워서 당장 두더지가 되어 땅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태후는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처음 카페에서는 알바생인 척하더니, 그다음에는 회사원인 척하고, 또 그다음에는 작은 회사를 운영한다고 하더니, 이렇게 내실 있는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을 줄이야.

해이는 그가 겸손이 지나쳐서 거짓말쟁이처럼 느껴졌다.

‘지금 강단에서 내려와서 나한테 걸어오고 있는지 맞지? 얼굴 보면 뭐 하고 해야 하지?’

강태후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해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해이의 손목을 잡더니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로 이끌었다.

“해이 씨, 여기 맛있는 게 많이 있는데, 좀 먹어요.”

“강태후 씨, 이러기에요?”

“뭐가 말입니까?”

“오늘 이거 서프라이즈 맞죠?”

“무슨….”

“이게 작은 무역회사에요?”

“대기업은 아니니까 작은 회사는 맞는데….”

“됐어요. 아직 더 놀랄 일 없는 거죠?”

“그런 일 없으니까, 즐기기만 하세요. 이 파티 끝나고, 우리의 두 번째 데이트도 하고요.”

“여기서 함께 있는 게 두 번째 만남 아니었어요?”

“이건 공적인 업무고, 우리만의 사적인 자리가 있어야지요. 도망갈 생각 하지 말아요.”

“…음, 늘 뭔가 계획을 꾸미고 있군요.”

“하하하. 제가 머리가 좀 발달해서.”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한 남자가 강태후 옆으로 걸어왔다.

“강태후, 옆에 계신 이 아름다우신 분은 누구셔?”

“어, 인사해. 한해이 씨라고 해.”

“안녕하세요. 전 태후 친구 권상윤이라고 합니다. 우리 태후랑은 어떤 사이신지….”

“…그게, 그냥 가볍게 아는 사이에요.”

해이는 그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중요한 손님이니까 불편하게 만들지 마.”

권상윤이 호기심에 던진 질문에 강태후는 더이상 질문을 막아버렸다.

“허허허, 너무 아름다우셔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지.”

“해이 씨, 이 녀석은 제 어릴 적 죽마고우에요. 은행에서 일하고 있어요.”

“네, 반가워요.”

“이 녀석 별명이 ‘뱅크 씨’에요. 혹시 금융에 관해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이 친구를 이용하세요.”

“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쌍꺼풀이 진한 권상윤은 넉살 좋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 대화하는 도중, 머리가 백발인 노년의 신사가 강태후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잠시 보자고 했다. 강태후는 두 사람에게 잠시 같이 있으라고 하고 신사를 따라갔다.

“저분 누군지 아세요?”

권상윤이 해이에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는 분인데요.”

“헤븐 그룹 회장님이세요. 헤븐 백화점 사장만 온 줄 알았는데, 그룹 총수도 와서 깜짝 놀랐어요.”

“정말요? 이 파티가 그렇게 중요한 자리인가요? 저는 강태후 씨 말만 듣고 가벼운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요.”

“저 녀석은 늘 겸손하죠. 사람들에게 쉽게 패를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좀 뜸 들이고 지켜보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하지만 일에는 거침이 없어요. 시장 파악도 빠르고 준비는 또 얼마나 지독하게 하는데요. 그러니 성공하지 않을 수 없죠. 아마 계속 사업 파트너로 헤븐 그룹에서 점 찍어둔 것 같아요. 저 회장님 눈이 보통이 아닌 걸로 정평이 나 있거든요. 이 자리까지 왔다는 건 ‘넌 내 사람이다’라고 암시하는 거예요.”

“태후 씨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해이 씨는 태후랑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그게, 좀 복잡해요. 설명하기가 애매하네요. 그냥 지인이라고만 말해둘게요.”

“꼭 비밀이 있는 사람 같아요. 둘 다.”

“…그런 건 아니에요.”

권상윤이 턱을 쓰다듬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즈음, 강태후는 다시 해이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