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러니 여기 있어라

의금부에 밤이 찾아왔다. 병졸들이 옥사 안을 돌아다니며 홰에 하나씩 불을 붙였다. 바싹 마른 싸리에 순식간에 불이 옮겨 갔다.

무릎을 끌어안고 불안에 떨던 남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활활 타는 불길을 외면하였다. 추운 겨울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이 꺼지지 않게 살필 때면 장작이 타는 소리가 좋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있고는 하였다. 그러다가 밤을 지새운 적도 더러 있었다. 그만큼 남윤은 장작 타는 소리를 좋아하였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나는 소리는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 일만 없었다면 지금도 남윤은 그 소리를 좋아할 터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그녀를 위로하여 주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젠 그 소리가 남윤에게는 악몽과 같은 소리가 되었다. 장작이 불타는 소리는 그녀에게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도록 신경을 자극하였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묻어둔 보물처럼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둔 비통함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하였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남윤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남윤의 등이 움찔하였다. 살며시 어깨를 누르는 감촉 때문이었다.

깜짝 놀란 남윤의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런 남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것인지 어깨 위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며 남윤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연의 모습이 보였다. 꿈이라 생각한 남윤이 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날렵한 턱선이 손에 닿기 직전에 남윤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지금 연을 만지면 꿈에서 깨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여 남윤은 연의 얼굴에서 한 뼘 떨어진 위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연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면 충분하였다. 간접적으로 연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고 남윤은 생각하던 때였다.

허공에 머물러 있던 남윤의 손을 연이 꼭 잡았다. 그리고 남윤의 손을 제 얼굴 위로 가져갔다.

따뜻함을 넘어서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연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달음박질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연은 남윤이 뛰라고 해도 뛰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꿈이 확실하였다.

남윤의 눈동자에 얼핏 씁쓸함이 엉겨들었다. 아무 말 없이 남윤은 연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를 끝으로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 테니 가슴 깊이 아로새겨 두려 하였다.

남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연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방금 본 것인데도 눈을 감자 희미한 잔상만 남았다. 이렇게 해서는 연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남윤이 다시 눈을 떴다.

연이 저를 보며 슬프게 웃고 있었다.

그때 남윤은 깨달았다. 이 모든 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그것도 깊은 구덩이에 빠져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가혹한 현실임을.

연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울지 마십시오.”

남윤이 연에게 잡힌 손을 움직여 연의 눈가를 닦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연의 모습이 밝은 모습이었으면 하였다. 언제 어떻게 다시 꺼내 보아도 기쁠 수 있게 말이다.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연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낮게 한숨을 내쉰 연이 잡고 있던 남윤의 손을 놓아주었다.

남윤은 온기가 사라진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연의 온기를 붙잡고 있어 보려고 주먹을 쥐었다.

연이 남윤의 발목을 잡고 발바닥의 먼지를 손으로 털었다.

버선발로 궐에서 이곳 의금부까지 오느라 새하얀 버선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털어도 털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건 빨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이 한쪽 옆으로 내려놓았던 신을 남윤의 발에 신겨 주었다. 반대쪽도 마저 신을 신겨 주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렸다.

살짝 올라가 있는 치마를 끌어당겨 발이 드러나지 않게 가렸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연의 손을 남윤이 낚아채듯이 잡았다. 사라진 온기가 아쉬워서만은 아니었다.

“저하,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여기에 잡혀 올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옥사에 갇혀 있는 동안 흥분되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머릿속으로 지난 일들을 정리하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생각하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생각 외로 남윤은 덤덤하게 연에게 말하였다.

“저하께서 보여주신 노리개는 제 것이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문득 서러움이 밀려와 목이 막혔다. 남윤이 잠시 잠깐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노리개를 잃어버렸습니다.”

연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남윤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이 제 말을 믿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한때는 남윤의 것이었던 노리개 때문에 그녀를 범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연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남윤은 알 수 없었다.

“네가 노리개를 잃어버렸다는 걸 증명해 줄 사람이 있느냐?”

대답은 한 가지뿐이라는 걸 남윤은 잘 알고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남윤에게 연이 허리를 굽혔다.

“없겠지. 그러니 여기 있어라.”

남윤이 눈을 들어 연을 바라보았다.

연이 더욱 허리를 굽혀 남윤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힘들다는 건 잘 안다. 편치 않다는 것도. 최대한 빨리 끝날 수 있게 하겠다. 그러니 날 믿고 조금만 더 버텨 주겠니?”

연의 말이 언뜻 이해 가지 않았다.

잠시 남윤의 반응을 살핀 연이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네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 모든 건 널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구나.”

숙였던 허리를 세우기 전 연이 남윤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단시간에 여러 가지 상황을 겪는 바람에 한 박자 늦게 남윤이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때는 이미 연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후였다.

지켜보는 눈들을 의식한 연이 짐짓 엄한 음성으로 남윤에게 말하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이곳에 있던 것이 편했다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얌전히 있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려세운 연이 무정하게 옥사 밖으로 나갔다.

*****

“대체 그 아이의 어떤 점이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벌인 것처럼 보였느냐?”

연을 향해 불벼락이 떨어졌다. 잠시도 쉬지 않고 왕은 연을 몰아세웠다. 한 마리의 성난 황소가 날뛰는 것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연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은 배 위에 모은 채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세상이 미처 돌아가지 않고서야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기어코 분을 참지 못한 왕이 서안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천둥이 치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복도에 시립해 있던 궁인들이 그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하였다. 놀란 시선을 교환하던 궁인들이 닫혀 있는 방문을 쳐다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이 벌써 한 시진 가까운 시간 동안 세자인 연을 다그치고 있었다. 누가 말려야 끝이 날 듯하였다. 일찍이 침수에 든 중전을 깨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깊어만 갔다.

“그 일로 남윤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서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냐?”

말을 하는 왕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연이 고개를 위로 들고 왕을 보았다.

왕이 쿨럭쿨럭 마른기침을 하였다. 한동안 화를 낸 탓에 입안이 말랐기 때문이었다.

잠시 왕이 물을 마시는 동안 연이 운을 떼었다.

“이번 일은 아바마마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옵니다.”

“뭐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냐!”

물을 마시다 말고 왕이 버럭 하였다. 가라앉았던 화가 연의 한마디에 다시 치미는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사발의 물이 출렁이다가 넘쳐서 바닥으로 쏟아졌다.

상선이 마른 천을 가져와서 바닥에 고인 물을 닦았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저하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왕에게 들려있던 사발을 도로 가져가며 상선이 말하였다.

누가 보더라도 왕은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예전부터 서영익과 관련한 일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였다. 이젠 그게 남윤에게도 해당되었다.

어떤 문제가 되었건 남윤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 왕의 견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