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사랑

여란이 먹고 싶다는 음식을 먹고 벌써 어둑하게 어둠이 내린 거리를 그녀의 손을 잡고 걸었다. 어두워지는 만큼 달빛도 별빛도 더 밝아지고 있었다. 밤이 되자 사람들의 소리로 소란스러웠던 거리가 조용해졌다.

보겸은 잔잔한 물결 소리로 가득한 강가로 여란을 데리고 갔다. 그곳엔 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었다. 정자 가까이에 이르러서는 보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정자를 바로 앞에 두고 더는 가지 않는 보겸을 여란은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는 것 같아서.”

보겸이 소리 죽여 여란의 귀에 속삭였다. 여란은 까치발을 하며 고개를 들어 정자를 바라봤다. 보겸의 말대로 이미 그곳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사내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사내를 바라보고 서 있는 여인의 얼굴에도 행복함이 가득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하군요.”

“삶이 짧다는 것을 알기에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것이다.”

보겸은 남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발길을 돌렸다.

“곤륜산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 다른 곳으로.”

보겸은 내내 인간들처럼 걸었었는데, 여란의 손을 잡고는 어딘가로 훌쩍 건너가 버렸다. 지신의 산장처럼 산속 깊은 곳에 아름다운 전각이 있었다.

“신들이 인간계에 내려와 일을 봐야만 할 때 이용하는 곳이다. 핑계는 일이지만 간혹 사랑에 빠진 신들은 인간계에 와서 여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거든.”

“왜 굳이 인간계에 와서 시간을 보냅니까?”

“인간을 사랑하게 됐을 때. 신선도 아닌 인간을 대라천이나 사범천에 데려가는 것은 금기거든. 그리고 인간계의 1년이 대라천에서는 고작 하루에 지나지 않으니 신들은 인간과 충분히 사랑을 나누고 그 인간의 수명이 다 되면 다시 대라천으로 돌아가지.”

여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의 삶에 신이 개입하면 안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신이 왜 달리 신이겠느냐? 그것도 대라천의 신이다. 최고의 신이지. 남두성군을 불러 그 인간의 삶을 바꾸는 것이지.”

여란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긴 하지.”

“대사형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신 적이 있습니까? 나이를 셀 수 없을 만큼 오래 산 대라천의 신이신데 그 사이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란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시샘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 이전에 누군가에게도 지금처럼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오셨습니까?”

보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신선이 다가와 말을 거는 바람에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다.

“잠깐 쉬었다 갈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볼일을 보거라.”

“예, 태자마마. 늘 쓰시던 방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늘 쓰시던 방’이라는 말에 여란의 눈이 더 동그랗게 변했다.

“고맙네.”

신선이 물러가고 나서 여란은 따지듯 보겸을 바라봤다.

“늘 쓰시던 방?”

보겸은 여란의 시선을 피했고, 질문처럼 따진 물음에 대답도 안했다. 보겸의 손에 잡혀 끌려가듯 걸어 여란은 그가 늘 쓴다는 방으로 갔다.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서자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보겸은 방에 있는 다른 문을 활짝 열어 보였다. 그들이 처음에 가려 했던 정자처럼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달도 별도 보였다.

“가끔 12신장과 오는 곳이다.”

“12신장?”

“그럼 내가 누구와 왔을 거라 생각 하느냐?”

“그 긴 세월 중 한 번쯤은 인간 여인과 왔겠지요.”

토라진 듯 말하는 여란의 빈 잔에 보겸은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여기 신선이 술을 매우 잘 만든다. 천계의 신들이 아주 좋아하거든.”

여란은 멀끔히 술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셔 보거라.”

여란에게 술을 권한 후, 보겸은 한잔을 시원하게 마셔버렸다. 여란은 고개를 저어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왜?”

“안 마셔 봤습니다.”

술을 한 번도 마셔 보지 않았다는 말에 보겸은 잠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빙화궁엔 술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 처음 마셔보면 되겠네.”

“술은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했습니다.”

보겸은 어린애처럼 순수하기만 여란을 웃으며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 한 잔을 훌쩍 마셔 버렸다.

“많이 마시면 그렇지. 적당히 마시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어색했던 사이가 술 몇 잔으로 친해지기도 하거든.”

그래도 여란은 고개를 저었다.

“대사형이 술 한 잔에 취한 저를 인간계에 두고 갈까봐서 안 마십니다.”

고작 버리고 갈까 봐 걱정을 하다니. 눈앞에 앉은 사내가 지금 얼마나 심란한 지 여란은 정령 모르는 듯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내가 널 두고 가면 아마 정법이 번개처럼 달려 올 것이다.”

“정법이 제가 어디 있는지 다 안다고요?”

보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의 호위다. 네가 어디에 있든 정법은 다 알고 있지.”

보겸이 그녀를 두고 가도 정법이 찾으러 온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보겸은 다시 또 한 잔을 마셨다.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닙니까?”

“많이 마셔 취한들 뭐가 걱정이냐,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도 대라천에서는 고작 일각도 안 되는 것을.”

보겸은 몸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빙화궁에서는 무슨 일을 하느냐?”

조용히 물어보는 보겸을 바라보다가 여란은 그가 하고 있는 것처럼 의자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법기를 지킵니다. 혼돈을 가둔 법기를. 혼돈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그건 빙화궁의 궁주가 하는 일이다.”

“빙화궁의 신선들도 합니다. 저는 법기가 있는 방의 문을 지킵니다.”

그녀의 말에 보겸이 소리 내어 웃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큰일을 하는구나. 그 일을 하느라 그렇게 앓아누울 정도로 힘이 드는 것이냐?”

놀리는 보겸의 말에 여란은 술잔을 노려보다가 질끈 눈을 감고 홀짝 한입에 털어 넣어 버렸다. 오만상이 다 찌푸려지고 말았다. 목을 타고 술이 내려갈 때마다 화끈화끈 타는 것만 같았다. 가슴까지 다 타고 내려가고 나서야 화끈거리는 것이 멈추었다.

“천천히 마시거라, 독한 술이다.”

독하고 입에 쓴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 여란은 점점 온몸이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편안한 것 같기도 하고 나른한 것 같기도 했다. 하늘의 별도 달도 점점 더 아름다워 보였고, 옆에 있는 보겸은 더 잘생겨 보였다.

“대사형은 제가 왜 좋으십니까?”

여란의 직접적인 질문에 보겸은 웃으며 흘끔 돌아봤다. 고작 술 한 잔에 그녀의 볼이 발그레해지고 말았다.

“그러게 왜 좋을까? 나도 아직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너는 내게 왜 쪼오금 관심이 생긴 것이냐?”

“대사형한테서는 좋은 향기가 납니다. 그 향기가 느껴지면 아, 대사형이 나를 지켜주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거든요. 그 안도감이 왜 생기는 건지 궁금합니다. 정법은 늘 저를 지켜주고 있는데, 정법에게서는 그런 향기도 없고 그냥 편안함뿐이거든요. 그 차이가 뭔지 궁금해졌습니다.”

보겸은 흘끔 여란을 보았다. 술 한 잔에 벌써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술술 대답하는 사이 여란의 눈이 감기고 있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아기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다가 이내 스르르 감고 말았다.

보겸은 잠이 든 여란을 바라보았다. 입술은 붉고 빙화궁의 얼음처럼 투명한 하얀 피부, 인간 세상을 돌아다니느라 약간 흐트러져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 무엇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보겸은 남은 잔을 마저 마시고 일어섰다.

의자에 기대 잠이 든 여란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 보겸은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술을 매만지고 하염없이 바라봤다. 자꾸 얼굴을 매만지자 여란이 눈썹을 씰룩이다가 살포시 눈을 떴다. 그를 보자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지어졌다.

“술이…… 독해서…… 자꾸 잠이 옵니다.”

“자거라. 내가 지켜줄 것이니까.”

“저를 지켜 주시려면 밤새 제 옆에 있어야 하는데요?”

“옆에 있지 않느냐?”

여란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보겸의 손에 겹쳐졌다. 보겸의 눈빛이 짙어지고 있었다. 숨이 멈춘 듯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보겸의 손이 멀어졌다. 멀어지는 보겸의 손을 여란이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