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구 혹은 악연

노래하는 병국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목청을 쥐어짜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친 듯 울먹이는 얼굴, 거기다 좀처럼 내려 올 줄 모르고 허공을 방황하는 손짓은 감히 가왕의 후계자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쟤는 왜 노래를 안면 근육으로 하고 있다냐. 안쓰러운 얼굴로 병국을 지켜보던 정현이 차마 더는 보지 못하겠다는 듯 은성에게 눈짓을 돌렸다. 이쯤에서 적당히 끊을 때가 왔다는 뜻이었다.

부루퉁한 얼굴로 병국이 툴툴거렸다.

“아씨. 왜요? 지금 삘 딱 꽂혔었는데. 완전 감정 실렸단 말이에요.”

은성은 누가, 언제 그런 삘 꽂아 달라고 부탁했는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조용히 안으로 삼켰다. 그동안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따지고, 의견을 묻고, 절충하는 과정이 더는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응, 병국아. 나도 삘이 빡 왔어. 이대로 앨범 내면 제대로 망하겠구나, 하는 삘.”

“아, 왜 자꾸 본명 불러요. 멀쩡한 예명 놔두고? 누나 일부러 그러는 거죠?”

“응. 일부러 그런다. 이제 알았니?”

이 누나가 또 내 속 뒤집네! 얼굴을 붉히는 병국의 어깨를 진정하라는 듯 두드리며 은성이 말을 이었다.

“너 원래 노래하는 것도 아니었잖아. 드럼쳤잖아.”

“뭐래? 나 드럼 치면서 노래도 했거든요?”

“밴드 해체하고선 그마저도 안 하겠다며. 앞으론 연기 외길 걷겠다며. 그 다짐, 패기 다 어디로 갔어. 중동 보냈어?”

병국과 은성이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 병국이 밴드를 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은성은 은성대로, 병국은 병국대로 성질이 곱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치기 일쑤였지만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일곱 곡을 함께 작업했다. 그런 인연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나선 것은 병국이었다.

‘저 이제 연기할 거예요. 벌써 대본도 몇 개 받았고요. 이젠 누나 볼 일 없을 거예요. 솔직히 내가 누나 독설 들을 때마다 녹음실에 불 지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지금 와서 보니까 안 지르길 잘한 거 같네. 종종 놀러 올게요.’

콧대를 세우는 폼이 하도 당당하기에 어디 얼마나 엄청난 연기를 하나 싶어 은성은 디데이까지 세며 병국의 드라마를 기다렸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히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게시글은 대부분 병국의 매끄럽지 않은 대사 전달과 어색한 움직임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거 시청률은 잘 나왔어요!”

벌게진 얼굴로 발끈하는 병국을 보며 은성을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나 못하나 궁금해서 본 사람이 절반이라곤 생각 안 해봤어?”

“초반에 좀 헛발질해서 그렇지, 나중에는 응원도 많았다고요.”

그건 은성도 안다. 실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병국의 연기는 점점 극에 녹아들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제법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얘기를 꺼내 병국을 우쭈쭈 칭찬해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 아까운 내 소중한 시간 돌려달라는 글도 나는 되게 많이 봤는데.”

은성의 평온한 목소리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병국은 거의 소리치기 시작했다.

“누난 그렇게 내 앨범이 망했으면 좋겠어요? 이 노래 만든 거 누나거든요?”

바로 그거야. 손뼉을 짝 부딪친 은성이 정답이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내가 만든 거니까 이러는 거야. 솔직히 노래도 너한테 좀 안 어울린다 했는데, 녹음해놓고 보니까 더 구려졌다고. 혹시 이 앨범, 명절에 소소하게 친지들한테만 돌릴 거니?”

아이고, 난 모르겠다. 앓는 소리를 내던 정현이 담배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무룩한 눈으로 그 뒤를 쫓는 병국의 얼굴을 보자 은성은 말을 마구잡이로 늘어놓은 게 조금 미안해졌다.

병국이 이번 앨범에 집착하는 이유는 은성도 알고 있었다. 그는 한때 반짝했던 밴드의 인기가 사라진 지금 제 살길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혀 저 자신을 갉아 먹는 사람이 허다한 업계에서 참으로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나. 나도 이젠 쫌, 성장했다는 소리도 듣고 싶고 그렇거든여. 언제까지나 그 시절 귀여운 드러머일 수는 없는 거잖아여?’

술에 잔뜩 꼬인 혀로 은성에게 주정을 부렸던 게, 삼 개월 전이었나 아니면 그보다 더 전이었나. 병국이 처음으로 털어놓은 허심탄회한 고백에 은성 역시 마찬가지로 술 냄새를 풍기며 대답해 주었다. 병국아. 지랄하지 마. 그런 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있니, 라고.

“그때 내가 그랬지. 재능이 없는 게,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나쁜 게 아니야.”

“누나 진짜 너무 하는 거 알죠?”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거야. 너 연기 반응 좋았다며. 그럼 그거 계속해. 얼굴도 받쳐주잖아. 그럼 그거 잘 살리면 되는 거야, 응? 괜한 헛짓 하지 말고.”

마음 같아선 내가 그 마음 다 안다, 그러고 싶어도 정작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은성이라고 해서 누군가의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놓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기에.

“나 음악하고 싶단 말이에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정 하고 싶음 드럼을 다시 치던가.”

은성의 단호한 말에 어깨를 늘어뜨리던 병국이 별안간 번쩍 얼굴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맞다, 누나 사실은 재야의 고수라면서요.”

“이건 또 무슨 무협지에 쌈 싸먹는 소리야?”

“아니, 작곡가 모모가 예전에 무슨 가요제에서도 상도 타고 평론가들도 극찬했던 사람이라고. 지금 좀 슬럼프 겪고 있는 거 뿐이라고 그러는 거, 어디서 주워들었단 말이에요.”

모모는 철없던 학창 시절 친구들이 은성의 성을 따서 아무렇게나 불렀던 별명이다. 그땐 그 10년, 아니 20년이 지나도 그 이름을 부르는 데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속으로 어리석은 과거를 비웃는 은성의 손을, 병국이 덥썩 붙들었다.

“크게 바라지 않아요. 차트 역주행할 만한 거 하나만 만들어 줘요. 함께 신화를 써보자구요. 예? 예에!?”

“야, 역주행이 뭐 마음대로 되는 일이야? 어지간한 명곡 아니면 안 된다고. 그리고 그게 김병국 이름으로 되겠니?”

“아, 본명으로 낼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에요!”

몰라몰라. 손을 뿌리친 은성이 병국의 등을 부스 안으로 떠밀었다.

“우리 그냥 있는 노래나 제대로 소화하자 병국아. 어? 제발!”

녹음은 정현이 다시 들어오고 나서야 다시 시작됐다. 히트곡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병국은 다시 부스 안에 들어가서도 ‘지금 세상은 마약 같은 비트를 원하고 있어요 누나! 드�E더비트!’ 하며 징징거렸다.

소파에 던져두었던 전화의 진동 소리를 감지한 것은 네 번째 재녹음이 한창일 때였다.

화면에 뜬 ‘어머니’ 세 글자에 은성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녹음실을 빠져나와 통화 버튼을 누르는 움직임은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은성은 그의 가족들이 항상 불편했다.

“죄송해요. 일하는 중이라…. 무슨 일이세요?”

“은성아. 주한이 큰일 났다. 어쩌니. 사태가 이 모양인데 전화도 안 받고….”

“진정하시고 무슨 일이신지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주한이가 어제 글쎄……….”

* * *

권주한 이 미친놈. 호텔 입구에 차를 세우며 은성은 입술을 짓씹었다. 주한이 미친 짓을 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제대로 지뢰를 밟은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휴대전화 너머로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내내 괜히 은성의 피가 다 마르는 듯했다.

사고를 쳐도 소소하게 쳐야 수습할 의지가 생길 텐데, 이번엔 너무 큰 사고를 쳐 주신 통에 일 분에도 열 번씩 ‘그냥 모른 척 할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다. 당연히 그러지 못할 걸 알면서도 드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어두운 얼굴로 로비에 들어서는 은성을 보자마자 직원이 미리 준비해놓은 키를 내밀었다. 익숙한 카드키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주한은 자주 이 방에 틀어박혔다. 호텔의 가장 높은 층. 세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 로맨틱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집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