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暴風前夜)속의 고요함과 달달함

“마마, 곧 중궁전이옵니다.”

마 상궁의 말에 량이는 덩의 창문을 열어 찬바람을 깊게 들어 마셨다.

오는 내내 마 상궁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덩의 창문을 열지 못하게 하여 갑갑했던 량이다.

찬기가 몸 안으로 들어오니 궐이 가까워 올수록 점점 울렁거리기 시작했던 속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오기 싫은 곳, 하지만 올 수밖에 없는 곳…… 어쩌면 이렇게 다시 오게 된 건 제가 풀어야 문제들이 궐 안에서 해결 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럴 수 있다, 여겨진다.

담의 서찰도, 심증(心證)만 있고 증좌(證左)를 밝힐 수 없는 독도 그리고 절 식구의 안전과 자신의 안위(安危)도 모두 궐에 답이 있음이다.

자신의 안위는 어찌되든 상관없다. 다른 것만 다 해결 될 수만 있다면.

‘!’

생각에 빠져 있는데 어느새 덩이 멈춰 땅에 내려져 있었다.

덩의 문이 올려지고 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량이는 분이의 손을 잡고 덩 밖으로 나와 몸을 폈다.

온 몸으로 달려드는 찬바람이 춥다기보다 상쾌함마저 들어 량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깊게 들어 마셨다.

“……마마, 무사히 환궁하실 것을 감축 드리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순빈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상쾌함을 불쾌감으로 만들었다.

량이는 눈이 떠 앞을 보았다.

후궁들이 나란히 서 저를 맞이하고 있었다. 갑자기 덩 안으로 도로 들어가 있는 기분이다. 특히나 순빈의 빨간 입술을 보니 더 그렇다. 그리고…… 눈길이 슥, 장빈, 육 숙의를 지나 모 숙원으로 갔다.

여전히 공손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에 량이는 그녀에게 제일 먼저 반가움을 전하려 발걸음을 움직였다. 헌데 발걸음은 한 발짝 채 떼지 못하고 멈춰 섰다.

“왜 그러시옵니까? 마마.”

마 상궁은 의문스러움이 묻어나는 량이 얼굴을 보았다.

“……아니……네.”

량이는 모 방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느릿하게 말하고는 이내 발걸음을 빨리하여 그녀 앞으로 갔다.

“잘 있었는가?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아, 아니옵니다. 마마…….”

모방희는 거의 기습적으로 제 손을 움켜쥔 량이에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몸은? 용종은 무탈한 겐가?”

“예, 마마. 중전마마께옵서도 정녕 무탈하시온지요? 신첩, 얼마나 마음을 졸이면 기다렸는지 모르옵니다.”

어느새 놀란 표정을 가다듬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꾼 모방희였다.

그에 량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하네. 홀몸도 아닌데.”

“흥, 무슨 벼슬 한 것도 아니고…….”

멀리 순빈의 아니꼬운 목소리가 들러옴에도 량이는 계속에서 모방희 앞에 머물렀다.

“용종을 생산할 때까지 늘 조심하게.”

“……그리하겠나이다.”

모방희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장빈과 숙의도 잘 있었는가? 물론 순빈도.”

“저희 모두 잘 있었나이다. 것보다 중전마마께옵서 이리 무탈한 모습으로 돌아오신 게 정말 천행(天幸-하늘이 준 큰 행운.)이옵니다.”

“아무렴요, 천행이고 말구요. 이 세상에 중전마마와 같이 천행이 따르는 이는 또 없을 것이옵니다. 아니 그렀사옵니까?”

순빈은 장빈의 말에 빨간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일순 주위가 고요해진다.

“……호호호, 나도 그리 생각한다네. 저승문턱까지 갔다 온지라 맹독도 어찌 하지 못하나보이.”

량이는 주위를 슬쩍 보다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래, 내가 살아오니 배가 많이 아프지?

의식적으로 눈꼬리를 길게도 늘린 량이는 순빈의 앙 다물어진 빨간 입을 만족스레 보았다.

그때였다.

“웃음소리를 들으니 몸이 진정 괜찮은 것 같으오.”

굵직하고 저음의 사내 목소리가 여인네의 대화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위아래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목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려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곤은 고개 숙인 이들을 지나 량이에게로 다가왔다.

“……전하, 어찌 행차이신…….”

“그저 중전의 몸이 괜찮은지 보려함이오. 그리고 청하가 중전을 보고 싶어 해서…….”

그리고 보니 청하가 곤의 손을 잡고 량이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

량이는 몸을 낮춰 청하옹주를 품에 안았다.

작은 몸집에 따뜻한 온기가 한 가득이었다. 량이는 그 온기가 너무나 안온(安穩-조용하고 편안하다.)하여 오랫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

청하도 량이 마음을 느꼈는지 작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보고 싶었어. 청하야.”

량이는 고개를 들어 청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중전마마가 보고 싶었사옵니다……훌쩍.”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청하다.

“왜 울어?”

“못 뵈올 줄 알고…….”

량이가 독에 중독되었다는 걸 들었나보다.

“괜찮아. 봐. 멀쩡하잖아?”

팔을 벌려 흔들며 괜찮다는 표정을 짓는 량이다.

“이제 궐을 안 떠나실 것이지요?”

“…….”

문득 물어오는 청하에 량이는 말을 잇지 못하며 갈 곳을 잃은 눈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멈춘 곳이,

“!”

곤이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

“…….”

마주친 눈빛이 서로를 붙잡듯 보다가 이내 엇갈리며 떨어진다.

량이는 눈길을 다시 청아에게 주었다.

“춥다. 들어가자.”

물음의 답을 해 줄 수 없으니 그냥 안하는 게 낫다.

량이는 몸을 일으켜 청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물음을 금세 잊은 듯 청아는 좋아라 량이 손을 잡았다.

“그리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오?”

발걸음을 떼려는 량이를 향해 곤이 묻는다.

량이의 눈길이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다시 갔다.

“…….”

대답해 보라는 알 수 없는 집요한 눈빛에 량이는 순간 그가 제 정체를 알고 묻는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허나,

“궐을 떠날 생각이 없는 중전에게는 제일 쉬운 물음 아니오.”

그렇군, 비꼬기 위해 물은 것이었어.

량이는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가 심호흡을 한번하고는 다시금 곤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지당(至當)하신 말씀이옵니다. 중전인 제가 궐을 떠나 어디 가겠사옵니까.”

그러니 제발 앞을 막고 서 있지 말라 말입니다, 하듯 량이는 그의 옆을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