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믿음을 줄 수 있을지 예전의 나였다면 전전긍긍 끙끙 앓고 발을 굴렀겠지만, 그런 건 노력한다고 줄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지금의 난 알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가만히 기다려. 기다리면서 난 나름으로 내 시간을 나아가, 당신이 나를 지켜보면서 당신의 시간을 헤치고 가는 것처럼.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 나름의 노력을 나는 내 나름의 노력을 그 위로 시간이라는 담요를 덮으면 당신과 나도 곧 녹은 봄을 맞을 수 있을 거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아. '어떠한 깨달음이 있었다. '스스로가 한 사랑에 대한 꼭꼭 싸여진 틀 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에는 윤혁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 깊고 넓게, 그저 좁은 시야가 아닌 더 많이, 더 열심히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답이 나올 거다. 소연은 그런 그녀가 답답하다며 ‘넌 평생 그렇게 살다 죽어라!’ 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그 말에 하하하 웃으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창피했었다.'조금만 더 쉽게 생각해 보자. 중요한 건 없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또한 똑같은 마음이라는 것. 그것만 놓고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좋아한다고 한들 뭐가 그리 겁내 해야 하는 일이 많았던 걸까. '끝나버린, 지나간 일인데 왜 우리는 그때를 되새기며 혼란스러워하는 걸까. 그때엔 열렬히 사랑했고 사랑받고 있음을 몸서리치게 느꼈으면서, 왜 시간이 지나면 그 지나간 사랑에 자신이 없어지고 갈증을 느끼는 걸까. 내가 더 사랑했음을 인정하기 싫어서? 나 혼자만 사랑한 것 같아서? 내가 작게 느껴져서? 누가 더 사랑했고 덜 사랑했음에 아무도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는데. '있는 그대로, 부딪치고 상처받고 그러다가 목적지를 찾지 못해 길을 잃어도 그 길의 끝에 서로가 서 있다면, 그렇다면, 그 과정쯤이야 쉽게 넘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조금은 익숙해지고 담담해지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진심, 이라는 말 속에 담긴 간절함을, 그 말 속에 담긴 따뜻함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힘을 믿는다.'짐 덩어리들 앞에 앉아 세월아 네월아 옷들을 정리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정리하는 일주일 동안, 한 살을 더 먹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한숨을 쉬면서도 어째서, 왜, 일주일째 짐 덩어리들은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인지 머리를 긁적였다. 따뜻한 유자차를 홀짝이다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린 찰나였다. '딩동.'벨이 울렸다.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바라보니, 소연이라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누굴까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다녀왔어.”'그가 찬바람을 몰고 핼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쉴 수 있는 곳은 단 한 사람뿐이라.”'재희가 담담히 그를 바라보았다.'“잊어보려고 해도,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운전을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놓아달라고 했지만, 다시 이렇게 되돌아와.”'그가 가볍게 웃으며 한 발자국 다가와 재희를 끌어안았다.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몇 번이고 고민하며 담배를 피웠을 모습을 생각하자 코끝이 찡해졌다.'“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달려왔어 재희야.”'우리가 처음 만났었던 것은 1999년 손끝이 차갑게 식어 손에 쥐고 있던 호빵을 호호 불며 아껴 먹어야 했었던 때. '처음으로 윤혁에게 고백을 했었던 건 2002년 대학 1학년. 그때의 그는 한창 월드컵에 푹 빠져 학교에도 자주 나오지 않았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축구를 보며 괜히 신난 척 즐거운 척했어야만 했었던 스무 살이었다.'그를 포기하자 마음먹었던 건 2005년 살갗에 파고는 추위에 마음까지 시렸던 겨울. '사랑도, 사랑도 아닌 편을 택하지 못했었던 2011년 어느 여름날의 맞선자리, 겁을 먹고 도망가 버렸던 2011년의 겨울의 시작, 이 이상은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절대로 그녀는 그를 포기할 수 없을 거라고 자각한 2012년의 유난히 눈이 헤펐던 겨울. 그리고 오늘. '비포장도로를 우리 참 잘도 덜컹대며 달려왔다. '재희는 그에게 왜 왔어요? 하고 묻지 않았고, 윤혁은 재희에게 날 받아줄 거야? 하고 묻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요.” '“응?”'“미국에 6개월 정도 다녀올 참이에요.”'순간 윤혁이 움찔하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옴싹달싹였다.'“기다리는 건 윤혁 씨 선택이에요.”'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도 먹었다. '윤혁이 비장한 표정의 재희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6개월 그까짓 거 내가 못 기다릴 것 같아서 긴장한 거지?”'“전 무조건 미국 갈 거예요.”'재희의 말에 한 걸음 멀리 떨어져 있던 윤혁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재희가 피식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걸어 꼭 껴안았다.'“준비는 잘 되가?”'“네, 다음 주에 출국이에요.”'엄마와 아빠는 굳이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해야 하냐고 물었다. 재인과 함께 떠나는 것이기에 걱정이 조금 덜어지면서도 두 분이서 지내야 하는 적적함이 벌써부터 느껴지는 듯 보였다. 재희는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숨 가쁘게 달려가는군.”'그가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꼭 떠나야 하는 거냐고 혜승이 물었을 때 조금은 단호하게 대답했었다.'‘그 사람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포기하고 싶진 않아.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걸 빌미로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미워하고 싶진 않아.’ '“섭섭해요?”'“그럼 서운하지. 안 서운하겠어.”'“그래 봤자 6개월이에요. 6개월 안에 글 완성하고 신춘문예에 도전할 거라고요.”'이렇게 야무지게 이야기하는 재희를 말릴 도리가 없다는 건 그녀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기다릴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보고 싶으면 그까짓 거 찾아가지 뭐.”'그가 가볍게 재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