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조 하시겠습니까

‘이곳이 그 유명한(?) 바이어가 있는 곳이군.’

서은지가 한이선 대표가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 손에는 한복이 들려 있었다. 자신이 이번에 새로 디자인한 옷을 보여주러 가는 것이었다. 은지는 양복 전문 디자이너지만 바이어의 요청으로 인해 한복을 주문제작한 것이었다. 한복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제작한 것이었다.

‘선비라면서 건물은 서양식이네.’

은지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곧장 대표실로 갔다. 뭐가 어쨌건 간에, 이렇게 큰 기업 대표에게 옷을 보여주는 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선비니 뭐니 해도 만나보지 않고서는 다 선입견일 뿐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은지가 옷을 들고 대표실에 들어가자, 한이선 대표가 반갑게 웃으면서 맞이해줬다. 옷은 한복을 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양복을 입고 있었다. 대표실 안도 서양식이고, 딱히 한국적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에이, 뭐야, 역시 그냥 소문일 뿐이었잖아. 되게 친절하기도 하고. 여자라고 무시하지도 않고.’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은지는 그런 줄 알았다.

“아, 그런데, ‘남녀칠세부동석’이라서, 단둘이는 못 있겠네요. 그래서 일과 관계는 없지만 직원 한 분을 불렀어요.”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선과 은지 사이에 남자 직원 한 사람이 다소 어색하게 있었다.

‘저 말을 아직 쓰는 사람이 있긴 했구나….’

“그리고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 분이 디자이너님의 말을 다 적을 겁니다.”

“어, 어째서죠?”

“서은지 씨가 올바르고 윤리적이고 교양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지 알고 싶어서 말이에요.”

그 와중에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는데 은지가 생각했던 거보다 더 잘생겼다.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 사람, 도덕 선생님이 하실 것 같은 말씀을 한다… 딱히 나쁜 말은 아닌데.’

은지는 학창시절 도덕 시간에 공부 안 하고 잠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한번 가져온 옷 보실래요? 여자 한복, 남자 한복 둘 다 부탁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한번 볼게요.”

이선은 계속해서 웃으면서 말했다. 웃음이 잘 어울리는 따뜻해 보이는 남자였다. 이선은 은지로부터 옷을 건네받았고, 옷을 한번 확인해봤다. 옷을 보더니 표정이 다소 진지해졌다. 여자 한복, 남자 한복 둘 다 천천히 살펴보았다. 디자인을 보기도 하고 재질을 만져보기도 하고, 무게(?)도 느껴보고 그랬다.

“흐음….”

은지는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할까봐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고 떨렸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알아봐줬으면 좋겠다…칭찬받고 싶다, 제발…제발!’

“이렇게 보기만 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한 번 입어보실래요?”

“네? 아, 그게…저는 쭈구리라, 옷이 잘 어울릴지 모르겠는데….”

“아, 그렇군요… ‘쭈구리’셨군요. ‘옷의 맵시가 잘 안 난다’라고 말씀해주시는 게 훨씬 더 좋을 텐데….”

이선이 다소 불편한 기색을 내비추었다. 그 와중에 직원은 그걸 다 받아 적고 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은지는 생각지도 못한 것에서 실수를 했다.

“아, 괜찮아요, 하하하. 그럴 수도 있죠.”

“아, 하하하,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입은 모습을 보고 싶네요. 맵시는 상관없어요. 저는 옷 디자인만 보거든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한 번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탈의실은 이 직원 분이 안내해주실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은지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간 탈의실에서 자신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고, 그러고 나서 다시 대표실로 왔다.

“…예쁘네요.”

이선이 은지를 보자 처음 한 말은 그것이었다. 이선은 은지를 보자 뭔가에 확 꽂힌 듯한 느낌을 느꼈다. 한복을 입은 은지의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고 예뻤기 때문이었다.

“네? 아, 감사합니다….”

은지는 자신보고 예쁘다고 하는 건지, 옷이 예쁘다고 한 건지, 둘 다인 건지 뭔지는 모르게지만, 칭찬을 들은 건 기분이 좋았다. 칭찬받고 싶다는 소원(?)을 이룬 것이었다.

“그런데, 치마가 너무….”

이선이 치마 길이를 보고 다소 불편한 내색을 보였다.

“짧나요? 이게, 현대식으로 조금 개량한 거라서, 짧게 보이실 수도 있는데….”

은지는 어떻게든 해명해보려고 노력했다.

“긴데요?”

이선은 은지가 예상한 말의 정반대로 말했다.

“네?

그런 말을 듣자 은지는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요즘 한복은 너무 치마가 긴 것만은 안 좋다고 생각해요. 서양식 옷에 맞춰서 어느 정도는 길이를 조절해야지 전체적으로 태가 나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해요.”

“어, 음, 그게….”

은지는 그런 정반대의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라서 얼었다.

“그리고 치마 무늬가 너무….”

“화려한가요?”

“아뇨. 밋밋한데요.”

“그리고 동백꽃 무늬는 뭐랄까….”

“별, 별로인가요?”

“아뇨, 아주 좋아요.”

이 남자가 뭐라고 대답할지 도저히 예상이 안 되는 은지였다. 은지는 하는 말마다 오답이었다.

그리고 이선은 은지한테 가까이 와서, 옷을 유심히 보기도 했다. 은지는 그렇게 유심히 자기를 보니까 뭔가 민망하기도 했다.

“아,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남자 옷도 한 번 입어 봐주실 수 있나요?”

“네? 저는 여잔데, 어떻게 남자 옷을….”

“걱정 마세요. 저는 디자인만 보거든요.”

“아, 네….”

결국 은지는 남자 한복을 입고 왔다. 남자 옷이라서 그런지 어깨가 헐렁헐렁하고 바지가 조금 작은 느낌(골반 부분이)이 들었다. 물론, 길이는 길어서 접어서 올렸다.

“흐음….”

이선이 은지를 유심히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니까 은지는 왠지 민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