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대표 (1)

은지는 이선의 회사에 왔지만, 이선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니었다. 부대표인 선아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오늘은 여성 속옷 업무 관련된 미팅이기 때문이기에 이선이 부대표에게 가라고 한 것이었다. 그 일의 담당은 부대표인 선아였기 때문이었다. 은지는 이선의 여동생인 선아를 만나기 전에 이선을 한 번 만나긴 했다. 이선은 은지에게 선아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건 선입견 아닌 선입견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선이 뭔가 특별하거나 대단한 얘기를 한 건 아니었다.

‘여군 출신이고, 대표님보다 어림에도 불구하고 대표님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실력은 대표님의 자리를 위협하는 정도인 분, 빡셀 수도 있고, 강하고 독한 분이라…서열 2위라면 보통 대단한 분이 아닐 거 같은데….’

‘강한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가셔야 될 거예요. 호락호락하지 않은 분이에요.’

이선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은지에게 그렇게 조언을 했다.

‘대표님도 대단한데,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의 분이라면, 도대체 어떤 분인 거지….’

은지는 이선에게 들은 그런 내용들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은지는 부대표실의 문 앞에 살짝 긴장된 상태로 서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선을 처음 만날 때도 긴장했지만, 선아를 만날 때도 긴장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차피 믿을 건 나밖에 없어(?). 자신감을 가지고 전진하자.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지.’

그 와중에 은지는 기죽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들어오세요.”

선아의 그런 목소리에 은지는 부대표실의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다. 그 목소리 자체는 딱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지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들어가고 나서 은지는 깜짝 놀랐다. 선아를 보고 놀란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안 보였는데, 부대표실이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대표실도 작은 건 아니었지만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그리고 은지는 그 방이 무슨 공주님 방인 줄 알았다. 아니, 공주님의 방이 아니라 여왕의 방인 줄 알았다. 아니, 여왕의 방 치고도 대단한 방이었다. 넓은 건 둘째 치고, 온통 연분홍색인 벽지에는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이 드는 고급스러운 문양들이 있었고, 여기저기 레이스가 달려있고, 예쁜 장식이 달려있었다. 꽃무늬 장식들은 기본이었다. 한쪽에는 엄청나게 큰 거울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인형들이 많이 있었다. 벽에 그림도 몇 개 걸려있었다. 비싼 그림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류장과 책상도 고급스러워 보이고 예뻐 보였다. 조명도 예뻐 보였다. 은지의 눈에는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하고 예뻐 보였다.

그냥 평범하고 깔끔하고 단순한 대표실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예술혼이라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양쪽 벽에는 온통 옷들이 걸려 있었다. 한 쪽 벽에는 여군 출신답게 각종 여군 복이 걸려있었고, 다른 쪽 벽에는 여러 종류의 여성 한복과 남성 한복이 걸려 있었다. 여성 한복의 비율이 조금 더 높긴 했다. 아무 옷도 안 걸려있는 대표실과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또한 업무 자료들과 여러 종류의 포스터가 한 쪽 게시판에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은지는 박물관에라도 온 것처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도 서열 2위의 치열함이 느껴져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의 노력이라면 1위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 자체는 1위였다. 이 정도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선의 말이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은지였다.

“안녕하세요.”

멀리서 선아가 마이크를 들고 왔다. 그러자 방의 스피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은지는 선아에게 가까이 갔다.

“아, 안녕하세요.”

은지는 왠지 긴장되었다. 은지를 압도하는 심각할 정도로 아름답고 치열한 방이었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이 사람은 노력파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은지의 선아의 첫인상은 선아 자체를 보면, 좋은 인상이었다. 방이 공주님 방 같은 느낌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쁘고 귀여우면서도 착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선이 말한 것처럼 강해보이거나 독해보이는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순수하고 귀여워 보이는 편이었고,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어려보이는 인상이었다.

“여기 앉으세요.”

선아가 앞의 소파에 앉으면서 말했다. 소파 앞 탁자에는 난 무늬가 그려진 차가 담긴 찻잔 두개와 주전자 하나가 있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은지는 선아의 말 대로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반가워요.”

선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미소를 지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은지는 그 미소가 예뻐서 반할 뻔했다.

‘저런 미소는 이 집안사람들의 유전자인가….’

이선의 미소도 강력하고 좋기에 은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몇 번 더 보면 자신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은지가 대답했다.

걸려있는 옷들과 달리 선아의 패션 자체는 깔끔한 정장이었다. 특이한 점이 하나있다면, 무려 비녀를 꽂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녀가 옛날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머리 전체를 묶은 건 아니고 일부만 묶고 그곳에 비녀를 꽂은 형태였다.

“방이 좀 넓죠? 이 회사에서 제일 큰 방이에요. 대표실보다 크죠. 대표실보다도 말이죠.”

선아가 그렇게 방을 소개했다. 대표실보다 크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 선아는 두 번 말했다.

“아, 네. 엄청 크네요. 무슨 박물관인 줄 알았어요.”

“하하하, 그런가요?”

“네.”

“그래서 넓어서 마이크가 있어야 되죠.”

“아, 그렇겠네요.”

“저는 이러한 넓은 마음, 이런 치열함과 열정, 아름다움으로 예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어요. 저한테는 믿고 옷을 맡기셔도 될 겁니다. 제가 이렇게 큰 방이 갖고 싶다고 말했어요. 사실은 이것보다도 더 큰 방을 갖고 싶었는데 말이죠.”

선아의 그런 말에서는 프로 의식이 느껴졌다. 은지는 그런 선아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