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하숙생입니다

아침이 밝아 왔다. 어둠이 걷힌 하늘은 청명했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은 봄기운을 싣고 찾아왔다.

이른 아침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깜빡거리는 신호등을 보고 뛰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허겁지겁 김밥을 먹으며 만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한가득 짐을 실은 가방을 안고 피곤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출근길은 사람이고 사물이고 할 것 없이 분주 그 자체였지만 침대에서 자고 있는 재희만큼은 예외였다.

재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따뜻한 햇살, 살랑거리는 바람, 새들의 노랫소리.

잠을 자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천국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숨을 들이쉬자 부풀어 올랐던 베개는 숨을 내뱉자 푹 들어갔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기분이 좋아 옅게 미소가 그려졌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자고 싶었는데.

Rrrrrrrrr.

상황이 뜻대로 되진 않았다.

요란스러운 전화벨 소리에 재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최대한 피해 보려고 얼굴을 파묻은 베개로 양 귀를 막아 보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랜만에 푹 자려고 알람까지 꺼두었는데 아침부터 전화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게다가 평소에 오지도 않던 전화가 잠을 깨우니 짜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Rrrrrrrrr.

벨 소리는 사그라지긴커녕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귀를 꽉 막아 봐도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고막을 웅웅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남아나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 올리려는 것도 고역이었다.

재희는 핸드폰이 잠잠해질 때까지 베개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벨 소리가 없는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 맴도는 방이었지만 그 자체가 마음에 드는지 그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스르르 얼굴 근육이 풀렸다. 아직 잠이 덜 깨 비몽사몽했어도 이대로 누우면 푹 잘 것 같아 귀를 막았던 베개를 가지런히 놓고 누웠는데 그런다고 해서 방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Rrrrrrrrr.

또다시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귀에 꽂히는 소리에 재희의 미간에 주름이 짙어졌다. 핸드폰은 금방이라도 집을 부술 것같이 울어댔다. 무시하기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재희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깨 눈이 떠지진 않았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핸드폰을 발견했고 울어대는 핸드폰을 확 낚아챈 그가 후면 커버를 열어 배터리를 빼버리니 그제야 핸드폰이 잠잠해졌다.

고요함이 찾아오자 몽롱함에 한껏 취한 그는 핸드폰을 든 채로 미끄러지듯 이부자리에 누웠다. 따뜻한 햇살, 살랑거리는 바람, 새들의 노랫소리.

또다시 찾아온 평온함에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서서히 빠졌다. 중력에 의해 핸드폰이 뚝 떨어졌지만 완전히 잠에 빠져든 탓에 핸드폰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전화 때문에 약간의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편안했다. 창문 너머로 소음이 들리긴 했어도 몸이 노곤해 자장가처럼 들리는 소음에 금세 빠져들었는데 단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띵동.

잠이 들려던 찰나에 초인종이 울렸다. 신경이 예민했던 탓인지 눈이 금방 떠졌다. 순간적으로 옆집에서 들린 게 아닐까 생각을 해보는데 그러기에는 귀에 들린 소리가 선명했다.

“뭐야. 올 사람도 없는…….”

띵동.

재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집 초인종 소리라는 건 확실했다.

고개를 든 그가 현관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데 현관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관이 보인다 할지라도 밖에 나가지 않는 이상 식별이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애초에 머리에 힘을 주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정신이 멍했다. 난데없이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다.

택배? 올 건 없었다. 자그만 사치 따윈 부릴 만한 여유가 있지 않았으니까.

약속? 그것도 없었다. 사람을 만나기엔 이리저리 삶에 치여 살기 바빴으니까.

“나가야 돼, 말아야 돼…….”

이른 아침부터 불청객에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결정을 내리는 데는 그리 큰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재희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포근함이 몸을 감싸 왔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잘못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 괜한 일로 큰 체력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인기척이 없으면 갈 게 분명해 신경 끄고 자려고 했는데.

띵동띵동.

그 생각은 금세 접어들었다.

인내심을 테스트라도 하는 건지 상대가 초인종 누르는 걸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자려고 해도 신경을 자극하는 초인종 소리 때문에 잠을 자는 건 불가능했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아침부터 초인종이라니.

심기를 건드리는 초인종이었지만 재희는 오기로 잠을 청하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이 들길 간절히 바랐는데 오늘따라 왜 잠은 안 오는 건지 오늘따라 초인종은 계속 울리는 건지.

띵동띵동.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잠을 억지로라도 자려 했던 재희는 결국 눈을 떴다.

이불을 걷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잠이 덜 깨 비몽사몽이었다. 잠을 잔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피곤한 탓에 두 눈이 충혈됐고 얼굴은 불어터진 면발처럼 퉁퉁 부었다.

한숨이 나왔다. 짜증 낼 기운조차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자 얼굴을 때렸지만 마비라도 됐는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잠 좀 자려 했더니…….”

하품이 나왔다. 불규칙한 생활이 일상이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더욱이 아침에 일어날 일도 없었고.

잠자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벽 늦게까지 작업한 터라 아무리 눈을 떴어도 몸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지탱할 힘이 없어 벽에 기대었다. 이대로 잠을 잘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초인종은 그를 못 보채 안달이었다.

띵동띵동.

초인종이 또 울렸다. 듣자마자 재희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아무리 좋게 넘어가려 해도 이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누군지 만나기만 해봐.”

씩씩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온 재희는 현관으로 향하려 했는데 바닥에 있던 맥주 캔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 그만 차버리고 말았다.

날카로운 맥주 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놀란 그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는데 공간 감각이 일시적으로 둔해져 책상에 부딪히는 걸 시작으로 쌓아 두었던 콘티 노트를 쏟는가 하면 심지어는 손을 잘못 짚는 바람에 하마터면 태블릿을 부술 뻔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쌓여 있던 맥주 캔 중 하나가 엎어졌는데 그 안에 남은 맥주가 쏟아지는 바람에 멀티탭에 맥주가 들어갈 위기를 목격했다. 재희가 재빨리 움직여 멀티탭을 든 덕분에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지만 정신은 피폐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난장판이 된 건 모두 초인종 하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