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딸그락, 딸그락.

분명 두 개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밥그릇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두 개의 소리 사이에서 이어지는 대화는 전혀 없었다. 언제나 똑같은 풍경의 아침 식탁이지만 웬일로 채은이 눈앞의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늦어요?”

“아마.”

상대방이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채은은 항상 그래 왔던 일인 것처럼 살짝 수긍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건넸다.

“오늘 할 말 있는데, 일찍 올 수 없는 거예요?”

“무슨 말?”

할 말 있다는 아내의 말에 무서워할 유한은 아니지만 약간의 호기심은 들었던지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리며 채은을 바라보았다.

“아침 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에요. 바쁜 건 알지만 오늘은 웬만하면 일찍 와줘요. 부탁해요.”

언제나 바쁜 자신을 배려해 주던 아내였기에 이런 식의 강요가 섞인 말은 처음이었다. 처음 있는 일에 뭐냐고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오늘 저녁이 될 때까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아내의 표정에 유한은 그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달리 채은의 말을 예상해 보는 유한의 마음에 이유 모를 불안이 잠식해 왔다. 물론 도무지 마음이 읽히지 않은 표정 덕분에 유한의 그런 불안은 채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노력, 해볼게.”

“네.”

그리고 둘 사이에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침묵이 찾아온 식탁. 오래전에 적응을 끝낸 침묵임에도 어쩐지 불편함을 느끼며 밥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엔 이 침묵을 깨는 사람은 없었다.

휘이이잉.

청소기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오후 시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회장 시아버지에, 그 대기업의 대표이사인 남편을 둔 사람이 왜 직접 청소를 하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냐 순수하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고, 바보 같다며 채은을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호기심이나 비웃음에 상관없이 채은은 그를 위해, 그를 떠올리며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모든 순간순간 행복을 느꼈다. 뭐,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일이 되겠지만.

한참을 심취한 것처럼 청소기를 돌리던 채은이 문득 청소기를 끄고 거실 한쪽 벽면을 바라보았다. 채은이 바라보고 있는 거실 한 벽면에는 유한과 채은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가진 듯 웃고 있는 채은과 세상이 무너져도 유지할 것 같은 무표정한 유한이 청소기를 돌리는 채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부부들은 이 크기만 한 사진을 창고 구석이나 장롱 구석에 넣어 놓는다고 하지만 채은은 자신과 유한과 결혼을 했다는 증거인 이 사진이 마음에 들어 누가 보란 듯이 거실 한 벽면에 걸어 두고 눈에 띌 때마다 보고 싶었다.

‘유한 씨, 이것 좀 걸어 줘요.’

‘이걸? 왜?’

‘왜긴요, 그럼 그냥 썩혀요? 아깝잖아요.’

‘우리 결혼한 거 뻔히 아는데, 뭘 이렇게까지 해.’

‘그래도요, 전 걸어 두고 싶어요. 혹시 이거 걸어 두는 거 창피해서 그래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얼른요. 못부터 박아요. 여기 망치랑 못이요.’

자신의 채근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진을 걸었던 유한이 떠올랐다. 눈에 띄는 곳에 걸어 두고 유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저 사진을 봤으면 했던 제 마음과 달리 유한은 이 사진 쪽으론 시선을 주지도 않았었다. 자신이 아는 선에선 말이다. 그리고 아마 제가 아는 선이 다일 것이라 생각했다.

“뭐가 좋다고 웃니?”

사진을 가만히 지켜보던 채은이 사진 속 자신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인가 웃음을 잃은 자신과 달리 사진 속 자신은 너무 밝아 보였다. 손에 들린 청소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은이 사진 쪽으로 다가갔다. 매일매일 닦은 탓에 사진 위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진짜 무겁네.”

힘겹게 벽에서 사진을 떼어 낸 채은이 바닥에 사진을 내려놓았다. 아마 앞으로 다시 볼 일 없는 사진일지도 몰랐다. 그저 얕은 미련과 무게를 핑계로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 실상은 이렇게 쉽게 떼어 낼 수 있었던 거다. 조금쯤은 무서워서 낑낑거리고,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사진은 자신의 시선 아래쪽에 내려왔다. 거실에 걸린 시계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똑딱이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은 듯 채은은 결혼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욱 정확히는 웃는 자신의 옆에서도 언제나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변해도 남편의 저 표정만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만은 웃음 짓게 만들리라, 결혼 전에 그런 실현 가능성 없는 다짐을 했던 것도 같다.

“조금만 웃어 주죠.”

그럼 어쩌면 당신하고 내가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이미 지쳐 버린 스스로를 느끼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편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힘들다고 인식하니, 남편과 함께인데도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에 하루하루 힘듦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앞으로 이런 상태를 유지해 보았자 힘들어지는 건 자신들 뿐이었다. 그래서 채은은 결심했다. 모든 것이 더욱 어그러지기 전에 모든 걸 끝내기로. 그것이 아마 자신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 믿었다. 처음 유한을 선택했을 때 생겨났던 그 어리석은 믿음처럼 채은의 마음속에는 이제 다른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모님, 오늘 이사님께서 급하게 회의가 잡히셔서 늦으실 것 같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도요.”

유한의 비서인 기훈의 전화를 끊자마자 채은은 실없는 웃음이 났다. 오늘까지도 당신은 나보다는 일이 먼저인가 보네요. 그리고 그런 용건은 당신이 전하면 안 돼요? 이제 와 새삼 실망할 것도 없었다. 한참을 공허한 웃음을 짓던 채은이 하루 종일 망설이던 일을 결행했다. 스르르,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두 사람의 결혼반지가 이번에도 쉽게 제자리에서 물러났다. 허전한 손가락을 만지던 채은이 반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주인의 체온을 잃어버린 반지가 차가운 테이블 위에서 점점 더 빠르게 제 체온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