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마녀의 마리오네트. (1)

따뜻한 봄 햇살이 거실 안을 가득 메운다. 커다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던 윤리가 방에서 나와 주위를 살피는 해랑을 본다.

“고모는 볼일 보러 나가셨어요. 누구네 집 이바지 음식이 왔다나? 어쩐다나?”

“…아….”

거실 중간에 서서 머리를 뜯던 해랑이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린다. 그를 돌아본 윤리가 묻는다.

“할 말 있어요?”

해랑은 윤리를 애써 외면하며 슬금슬금 그녀의 옆자리를 찾아 궁둥이를 붙인다.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 내 말이 뭐냐면….”

사탕을 손에 든 윤리의 ‘고백’ 타령에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한 해랑은 밤새 뒤척이며 큰 결심을 했다. 하지만 윤리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그의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

“…아… 뭐냐면….”

“말씀하시라고요.”

날카롭게 찢어진 눈과 창백한 피부가 찰떡처럼 어울리는 윤리를 보며 해랑은 뜬금없는 말을 꺼내놓는다.

“…아… 너 나갈 때 화장하지 마라. 진짜 잘 어울려. 네 눈매랑 피부가 완전….”

“그 이야기하려고 여기 앉았어요? 앞으로는 화장하지 말라고?”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은 윤리가 싸늘하게 묻는다. 해랑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게 아니고….”

해랑은 습관적으로 다소곳이 무릎에 올린 주먹을 움켜쥐고 결심한 듯 눈에 힘을 준다.

“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하기는 하는데 여자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냥 동생처럼 예뻐하는 거지. 그렇지. 내가 널 많이 좋아하긴 하지. 똑똑하고 대화도 잘 통하고 또 취향도 잘 맞고. 그렇다고 해도 내가 널 여자로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야. 생각해 봐. 우리 띠동갑이야. 네 말대로 난 아저씨고 넌 앞길이 창창한 이십 대인데. 그냥 막냇동생처럼 귀엽고 예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해랑을 바라보던 윤리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입을 연다.

“그냥 겁쟁이가 아니라. 비겁한 겁쟁이였네.”

“…어…?”

“내가 동생 같았다고요? 대체 어디가요?”

“…어… 그니까… 어…어리고….”

“내가 12살 차이가 나는 거 빼고 어디가 동생 같았어요?”

해랑은 달이 앞에서 매번 펼쳐졌던 익숙한 상황에 침을 꼴깍 삼킨다. 사실 그를 주눅 들게 만드는 능력은 달이나 윤리가 모두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너는 내 동생처럼 날 매번 주눅 들게 만들어.’라고는 말할 수 없는 해랑이 말을 더듬는다.

“…아… 그러니까… 어… 귀엽고….”

싸늘한 눈매와 인상적인 외모. 큰 키에 깡마른 몸매를 가진 윤리는 귀엽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었다.

“24년 중에 한 2년은 귀여웠을지도 모르겠네요. 아기 때는 그래도 대충 다들 귀여우니까.”

“…그럼… 그렇지….”

소파에 기대 늘어져 있던 윤리가 몸을 일으킨다. 해랑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난다.

“그런데요. 겁쟁이 아저씨. 나는 작가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놔도 하나도 겁 안 나요. 작가님이 거짓말쟁이 꼰대라도 나는 괜찮다고요. 작가님이 내 치료제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어? …내가 뭐라고…?”

윤리는 긴 검지를 들어 허공을 짚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큐어. 내 치료제라고요. 작가님이 날 살게 한다고. 그러니까 난 절대 도망 안 가.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봐요. 아무도 믿지 않을 그 거짓말로 날 밀어내 보라고요. 난 절대 작가님 곁에서 단 100m도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자살 충동과 빈번한 자해를 일삼던 소녀가 살기 위해 힘겹게 찾아낸 치료제는 한해랑 그 자체였다. 윤리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절대 그를 놓을 수 없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 되냐?”

“작가님이 날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말은 더 말이 안 돼요.”

해랑이 보글보글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친다.

“그건 또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 내가 널 여자로 안 본다는데.”

“삐이. 거짓말.”

“넌 그냥 동생이라니까. 난 정말 너한테 아무 감정이 없어요.”

윤리는 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다시 시크하게 소리친다.

“삐이. 그것도 거짓말.”

“…으아아아악… 미치겠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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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벽 조깅까지? 너 진짜 너무너무 낯설다. 그 여자가 이제 조깅까지 다니자고 했냐?”

예정일보다 늦어지는 아내의 출산으로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찬성이 거뭇거뭇한 수염 그대로 나타나 재림의 신경을 건드린다.

“나한테 짜증 내지 말고 아내한테나 가보시죠. 장 팀장님. 저한테 괜한 짜증 부린다고 제 조카가 일찍 등장하는 건 아니니까.”

“안 그래도 저녁에 제왕 절개하기로 했습니다. 대표님. 때 되면 제가 알아서 갈 테니까 걱정 마시죠.”

젖은 머리까지 싱그러워 보이는 재림과 녹초가 된 찬성은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재림은 아빠가 되기 위해 힘든 전초전을 치르고 있는 가여운 친구를 돌아본다.

“일은 나한테 넘기고 병원에나 가봐. 인마.”

“내가 하도 안절부절못하니까 장모님이 쉬고 오라고 성화를 하셔서 나온 거야.”

“쉴 데가 없어서 회사를 나오냐? 이 미친놈아.”

눈 밑이 까맣게 변한 거구의 찬성은 귀여운 거대 판다를 연상시킨다. 그때 소파에 드러눕는 찬성이 말한다.

“집에 혼자 있는 거 무서워.”

결국 재림은 혀를 차며 찬성을 외면하고 달이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동시에 누워있던 찬성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너 진짜 민여진이랑 아무 사이 아니지?”

“당연하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그가 찬성을 돌아보는 사이 메시지 도착음이 울린다. 재림은 대뜸 시선을 돌려 메시지를 확인한다.

[혼자 먹어요. 난 선약이 있으니까.]

달이의 메시지에 눈살을 찌푸린 재림이 재빨리 손을 놀린다.

[싫어.]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는 재림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찬성이 별수 없이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친다.

“어제 지선이 회사 동료 전화를 받았는데 방송국에 민여진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거 같아.”

“소문?”

[경주 만나기로 했어요.]

[나도 갈래.]

[왜?]

[혼자 밥 먹기 싫어. 어디에서 볼까?]

[야!!!]

문자질이 한창인 친구의 뒤통수를 격정적으로 노려보던 찬성이 화낼 기운도 없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다시 눕는다. 그러자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재림이 묻는다.

“무슨 소문이냐고? 인마. 아버지 회사 문제야?”

[그럼.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자. 엘리베이터!! 아하!!]

다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히죽거리며 문자를 보내는 재림을 본 찬성이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대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