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물빛 커튼 아래, 터키블루 빛깔의 슬립을 걸친 여자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농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투명할 정도로 흰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여자의 자태에 은서는 그만 끙, 하고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젖히자 가느다란 슬립 끈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아찔할 정도로 선명한 골짜기가 맞닿은 젖무덤이 살짝 드러났다. 감당할 수 없는 여자의 색기(色氣)에 감탄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부시도록 환한 빛살이 그녀의 쇄골을 간질였다.'“으음…….”'뇌쇄적인 비음을 토해낸 은서가 한쪽 어깨를 틀며 벌어진 입술을 축축한 입술로 핥았다.'“진짜 혼자 보기 아깝네.”'커다란 베개를 끌어안고 요상한 포즈에 그보다 더 요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은우는 기가 막힌 듯 멍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오, 베이비……!”'“내가 미쳐, 미쳐.”'주위를 두리번거린 은우는 화장대 위에 놓인 언니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도저히 혼자보고 끝낼 수 없는 아까운 장면을 망설임 없이 천만 화소가 넘는다는 내장 카메라 화면에 담았다. 턱 끝을 치켜들고 절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내미는 얼굴을 찍은 그녀는 사정없이 언니의 어깨를 흔들었다.'“정은서, 아침이야!”'“으음…… 가만히 있어 봐…….”'유난히 잠귀가 밝은 은서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며 베개를 끌어안았다.'‘아쭈, 네가 꿈속에서 봉을 빼려고 하지?’'두 손을 허리에 얹고 언니를 내려다보던 은우는 어느 순간 이불을 확 소리가 나게 걷어 버렸다. 두 다리 사이에 베개를 끼어 넣은 몰골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아이, 추워!…… 뭐야?”'갑자기 몰려든 한기에 어깨를 움츠린 채 번쩍 눈을 뜬 은서가 당황한 듯 동생을 올려다보았다.'“너, 무지 쌓였나 보다?”'“뭐, 뭐가?”'끝을 보지 못한 꿈이 아쉬운 은서는 입맛을 다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나쁜 계집애! 막 남자 얼굴이 등장하려던 참인데.’'“요즘 그이랑 시큰둥해?”'갑작스런 동생의 질문에 은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이런! 잠꼬대라도 한 건가?’'하지만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듯 시치미를 잡아뗐다.'“무슨 소리야, 아침부터?”'“아무튼 있는 것들이 더 무서워요.”'아래위로 고갯짓을 한 은우는 아홉 삼십 분을 지난 사발시계를 언니에게 던져 주곤 방을 빠져나갔다. '얄미울 정도로 정확한 시계바늘은 너울 같은 커튼에 가려진 남자의 얼굴을 못 본 은서의 아쉬움을 잊게 만들었다.'“웁스, 오 마이 갓!”'열 시에 고객과 예약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은서는 비명과 함께 침대를 빠져나와 욕실을 향해 질주했다.''화장은커녕 간신히 세수만 하고 집을 나선 은서는 길 위에서 택시를 잡느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출근 시간도 아닌데 빈 택시는 왜 이렇게 없는 건지. 새삼 열악한 교통수단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남들 다 따는 운전면허인데 진즉 따서 딱정벌레라도 한 대 살 걸.’'때 아닌 후회를 곱씹는 그녀의 앞에 택시가 아닌 검정 승용차가 멈추어 섰고, 은서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말로만 듣던 그 인신매매?’'며칠 전에 보았던 출근길의 여자를 납치해 카드빚을 갚기 위해 여자를 어떻게 했다는 신문기사가 떠오르자, 뒷걸음질하는 은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였다. 스르르 미끄러져 내린 유리문 너머로 눈에 익은 남자의 윤곽이 나타난 건.'“여기서 뭐 하냐?”'언제 들어도 퉁명스런 목소리,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유감이 있구나, 라고 오해하기 십상인 목소리이다. 순간 긴장이 풀린 은서는 그의 차를 향해 터벅터벅 다가갔다.'“보면 몰라, 택시 기다리잖아.”'“타, 인마.”'문을 열어 주기는커녕 까딱 턱짓만 하는 도현을 노려본 은서는 그가 사장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에 몸을 실었다.'“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야?”'“넌 이 시간에 어쩐 일인데?”'“사람이 살다 보면 지각도 할 수 있지, 안 그래?”'“누가 뭐래, 난 다만 네가 한 말을 따라 했을 뿐이야.”'‘재미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하지만 ‘지각’이라는 비상등에 불이 들어온 상황, 은서는 더 이상 도현의 퉁명한 말투를 나무랄 여유가 없었다.'“도현아, 나 급하거든.”'“어허, 볼일은 집에서 보고 나왔어야지.”'“진짜!”'“다른 급한 일이 있는 건가?”'“장난 그만 해. 열 시까지 한은정 씨 오기로 했단 말이야.”'“바쁜 양반이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래? 아무튼 아침 잠 없는 것들이 여러 사람 힘들게 한다니까.”'그의 말이 도저히 지각한 직원에게 할 말은 아니란 생각을 하며 그녀는 느긋하기 그지없는 도현을 채근했다.'주머니를 뒤적거린 그는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대시보드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급해진 은서가 그에게 물었다.'“왜 그래?”'“휴대폰을 두고 왔나 봐. 잠깐 네 거 좀 빌려 줘.”'아무 생각 없이 건넨 휴대폰을 받은 그의 입가에 순간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리는 것 같았다. '삼 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 준혁의 생일날 함께 찍은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걸어 둔 은수가 나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자식, 부러우면 말을 하지, 웃기는. 아무리 봐도 잘 어울린다 그거지?’'“이지야, 오빤데 낮에 잠깐 가게에 좀 들려. 오빠 방 책상 위에 보면 휴대폰 있을 거야. 그것 좀 가져다 줘…… 그래, 이따가 보자.”'짤막한 통화를 끝낸 그는 은서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사이 핸드백에서 꺼낸 파우더를 얼굴에 바르고 있던 은서가 건성으로 휴대폰을 받았다.'“대외 홍보용이야, 아니면 대내 경고용이야?”'“뭐가?”'스피드 메이크업에 제격인 틴트를 입술에 찍으며 은서가 싱겁게 되물었다.'“연출 사진치곤 아주 자연스럽네.”'“오호, 전문가가 보기에도 자연스럽다?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네.”'대학 시절 길거리 캐스팅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한 도현이었다. 비록 조기종영이라는 아픔을 겪기는 했지만, 두어 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된 적도 있었다.'‘하긴 그날 조명이 좀 좋긴 했지.’'은서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틴트를 바른 입술 위에 립글로스를 칠했다. 얻어 탄 사장의 차 안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는 했지만, 그런 걸 논하기엔 더없이 막역한 사이였다. 탁, 소리가 나게 파우더의 뚜껑을 닫은 은서의 맑은 눈동자가 도현을 향했다.'“그러니까 도현이 너도 사랑을 하란 말이야. 남자와 여자는 둘이 있어야…….”'“그 사진 혼자잖아?”'“무슨 소리야?”'또 도현의 능청에 말리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큰 키를 자랑하듯, 툭하면 싱거운 장난질을 하는 그였다.'“누가 찍어 준 거냐?”'“아침부터 왜 헛소리야?”'“헛소리 같은 소리 하네. 작품 모델로 전업했냐?”'“뭐래.”'“봐 줄만 하긴 한데 너무 많은 사람한테 보이지는 마라. 너도 장래가 있잖아.”'‘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아, 또 당하는 거 아니야? 하긴 이 녀석 능청에는 늘 이렇게 당하지.’'미심쩍은 얼굴로 도현을 쳐다보던 그녀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냈다.'“헉!”'당황한 그녀의 머릿속에 세수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제 방으로 달아나던 은우가 떠올랐다.'“감동 받았어, 은서야. 표정이 리얼리티 그 자체야.”'“입 다물지?”'“도저히 연출 사진이라곤 안 믿겨지는 그 몽환적인…….”'“사장!”'능구렁이 백단 문도현에게도 통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은서의 ‘사장’이란 호칭이었다. 그만큼 은서의 기분이 최저에 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느물대며 웃을 줄 알았던 도현이 운전석에 눈을 둔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워.”'“이씨, 은우 이 계집애! 가만두나 봐라.”'씩씩거리며 휴대폰의 배경화면을 바꾸는 그녀를 보며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하루 밥 세끼 먹고 사는 건 똑같은데, 왜들 명품에 환장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수북하게 뜬 밥을 입안으로 넣으며 다정이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새빨간 낙지볶음을 맛있게 우물거리며 은서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래도 언니, 난 어떤 때 정말 속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