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가로등이 미워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주황색의 뿌연 빛들이 꼭 저를 약 올리는 것만 같아 노곤한 몸이 더 턱턱 힘이 빠졌었다. 게다가 외투를 파고드는 찬바람에 짜증도 나지 않았다. 1년 전만 해도 이제는 하다하다 날씨까지 지랄이구나, 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말없이 외투를 여밀 뿐이다. 가게들의 간판이 꺼지는 것을 뒤로 하면서 의연은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 돌리는 시간이 어째 이리 긴지는 몰라도 급한 마음에 열쇠 돌리는 손이 버벅거리는 것에 의연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문을 열었다. 포근했다. 아니, 냉기가 그득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아, 드디어 집에 왔다! 의연은 털썩 침대에 드러누운 뒤에 천장에 눈을 두고 꿈뻑꿈뻑 느린 손으로 외투의 지퍼를 내렸다. 한 손은 옷을 벗으면서 한 손은 자연스레 리모컨에 간다. 능숙하게 tv를 틀고 동시에 옷을 벗는다. 완전 멀티플레이어가 따로 없다. '[엄마가 아픈 동영이는 오늘도 엄마 대신 동생들을 챙깁니다.]'무겁게 내려앉은 성우의 목소리와 함께 잔잔한 음악소리가 깔렸다. 의연은 읏차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 번데기 껍질 벗듯 침대에 벗어버린 옷을 집어 들었다. '“맨 겨울에는 불쌍한 사람들만 줄줄이 나오지.”'사실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한다.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구 돈을 가져갈라고? 내 주제에 불우이웃 도울 형편도 못되는데 그렇다고 그냥 보고 있기엔 썩 불편하기 때문이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 의연은 척척 옷을 옷장에 걸었다. tv에선 계속 성우의 목소리가 깔리고 있었다. 의연의 눈은 꽂혀 있다. '[Rrrr……. rrrrr]'34살의 전화벨소리 치고는 무미건조한 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의연은 속옷차림으로 침대에 슬라이딩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야! 주의연.”'또냐. 의연의 어깨가 축 쳐진다. 유일한 친구 소리의 목소리 또한 쳐져 있었다.'“너 또 술 퍼먹고 앉았구나?”'“넌 또 고운 세상 우리 세상인가 뭐신가 그 질질 짜는 다큐 보고 있겠지?”'“됐고, 뭐야? 돈 없어? 아님 벌써 길바닥에 엎드렸어?”'“히히. 귀신같은 년…… 둘 다.”'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년. 의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쨌든 혀가 반쯤 꼬인 걸로 봐서는 취한 것 같고, 나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아 진짜 쫌! 내가 너처럼 노냐? 하루죙일 일하고 와서 힘들구만!”'“신림!”'뚝 끊긴 전화기에 의연은 열불이 터져 괜히 애꿎은 베개를 퍽 쳤다. 옷장에 고이 걸었던 옷을 다시 꺼내 입으면서 화난 표정으로 tv에 시선을 뒀다. '[동영이는 소원이 뭐예요? 엄마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살지 막막해요.]'안 그래도 세상 살기 갑갑한 어린애한테 저딴 걸 왜 물어보는 거야? 의연은 쿵 소리 나게 옷장을 닫아버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침대 위의 전화기를 낚아챘다. 그리곤 역시 신경질적으로 번호판을 꾹꾹 눌렀다. 1588-xxxx tv속 ARS번호. ''“그 자식 죽여 버려!”'깡마른 몸에서 어떻게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빽 소리를 지른 소리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의연은 오징어를 찢어 입에 물었다. 술에 쩔어 너덜너덜해진 소리는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하며 의연이 온 이후에도 소주를 2병이나 비운 상태였다. '“난 너도 문제가 있다고 봐. 어째 그렇게 맨 쓰레기 같은 것들만 만나냐?”'의연의 무관심한 듯한 말에 소리는 도끼눈을 뜨고 의연을 째려봤다. 의연은 당당한 눈빛으로 자기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쓰레기라니! 이번엔 그 정돈 아니었어!”'“크, 여자한테 뭐 사달라 이거 사달라 하고 난 니가 그냥 여동생이니 하는 게 쓰레기지 별거냐.”'소주 한 잔을 시원하게 넘긴 후에 의연은 다시 오징어를 물었다. 소리는 의연의 말이 분했던지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씩씩 거리며 의연을 계속 노려보는 것이었다. 의연은 그런 소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자기 잔에 소주를 채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야, 어쨌든 여자 눈에 눈물 나게 하는 것들은 죄다 쓰레기야. 봐봐, 너 그 새끼 때문에 쳐 울었지? 그러니까 그 새끼는 쓰.레.기.”'“야! 우리 오빠는 쓰레기 정도는 아니지. 김민호 같은 걸 쓰레기라고 하는 거야.”'소주를 따르던 의연의 손이 멈칫했다. 곁눈질로 힐끗 소리를 쳐다본 의연은 소주병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 많이 취하긴 취했구나, 니가?'“그 새끼 얘긴 왜 또 하는데.”'“까놓고. 우리 오빠가 그 새끼 정도는 아니잖아? 진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아, 너 아직도 이러는 거 보면.”'“내가 뭐. 나 아무렇지 않아.”'“아.무.렇.지 않다고오?”'자신의 얼굴에 쓱 얼굴을 들이미는 소리에게서 훅 하고 진한 술 냄새가 난다. 의연은 무표정으로 소리를 밀어내고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힘주어 씹었다. '“너…… 너말야 주의연. 내가 이제야 얘기한다…… 이제야 말한다 주의연 특집!”'“뻘소리하지 말고 술이나 마저 마시고 가자.”'“너무 변했어, 우리 의연이. 다, 김민호 그 새끼 때문이겠지?”'소주병을 든 의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른쪽 어금니에 물었던 오징어에서 짭짤한 맛과 함께 비린 맛이 난다. 볼 살을 깨물었나 보다. '“내가 뭐! 내가 뭐 어떻게 변했는데! 나 그대로야! 5년 전 그대로라고!”'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러버린 의연은 피 묻은 오징어를 바닥에 버리고는 오징어 몸통을 죽죽 찢었다. 술의 노예가 되어버린 소리는 의연이 화가 났든 말든 실없는 웃음과 함께 몸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마안이 변했지. 18살 의연이는 긴 생머리에 하늘하늘 이쁘기도 했지. 머리띠가 트레이드마크였잖아, 그치? 어디서 또 그렇게 예쁜 머리띠는 구하는지…… 근데 지금은 뭐야 이건 뭐 누가 24살이라고 하면 믿겠어?”'소리의 말에 의연은 머쓱해져 괜히 얼굴을 만졌다. 지금, 그렇게 엉망인가. '“너 로션은 바르냐? 머리는 이게 또 뭐야, 미용실 좀 가라 이년아. 옷은 펑퍼짐해가지고…… 치마도 입고! 구두도 신고! 화장도 좀 하고!”'“치마 입고 어떻게 일해? 구두 신고 일하라고? 어차피 일하다 지워질 화장 왜 해!”'“너, 왜 일하는데?”'뜬금없는 소리의 질문에 의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든지 말든지 풀린 소리의 눈빛이 의연을 향해 있다. '“누가 너보고 죽자살자 일하랬는데!”'“그럼 노냐? 학교도 안 다니는데 일해야지!”'“누가 너보고 학교 다니지 말랬는데? 어? 성적도 좋았던 애가 왜 대학을 안 다니고 일하는데.”'“……내가 그만둔 거잖아 고등학교.”'“그러니까아, 왜! 와이! 어째서 니가 그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둬야 했느냐고!”'그냥 기절시켜서 업어 들고 가버릴까. 바득 이가 갈리는 걸 참으면서 의연은 마지막 남은 술을 자신의 술잔에 부었다. 오늘따라 소리는 꼬장을 부리는지. '“그래…… 니가 이제야 좀 괜찮아지는 것 같으니까 말하는 거야. 작년까지만 해도 너…… 완전 봐주기 힘들었어.”'“…….”'나도 알아. 하지만 말꼬리가 늘어질까 봐 하고 싶은 말을 술과 함께 목 안으로 넘기며 의연은 팔짱을 꼈다. 야외 포장마차라 그런지 꽤 춥다. 소리는 눈이 반쯤 감긴 거 보니 마지막 단계인 듯하다. '“대박 미친년 같았다니까? 행여 그 새끼 생각날까 봐 그렇게 일한 거지? 자기 몸 상하는지도 모르면서……. 근데 말야 너 그 새끼 잊으려고 그렇게 알바, 알바, 알바하면서도 니 눈빛은 어땠는지 알아?”'뭐래. 의연은 짜증난다는 듯이 눈앞에 온 소리의 검지 손가락을 쳐다봤다. 다시 한 번 소리의 향수 냄새와 술 냄새가 섞여서 전해온다. '“김민호, 눈에 걸리기만 해봐 죽여 버릴 거야. 나 건드리기만 해봐 다 불 싸질러 버릴 테니까. 뭐 이런 살기 어린 눈? 엄청 무서웠어, 암튼.”'쾅. 아. 아프겠다. 굉음과 함께 플라스틱 테이블에 엎어진 소리를 보며 의연은 제 이마가 찌그러진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일어나 소리의 재킷 주머니를 자연스레 뒤지는 의연이었다. '“멋 부리려면 얼어 죽어야 한다더니 이년 치마 보게.”'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소리의 치마에 혀를 두르며 의연은 소리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모, 여기 얼마예요?”